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엄사 (문단 편집) === 임진왜란 이후 현재까지 === 그러다가 [[임진왜란]]의 와중인 [[1597년]](조선 [[선조(조선)|선조]] 30년) 인근 [[석주관 전투|석주관]]에서 일본군과 대치할 때 승군과 군량을 지원해 준 보복으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고, 살아남은 승려들은 [[지리산]]과 주변 [[동굴]]에서 은신하다가 다시 모여 이 절의 폐허를 본 뒤 분개하고는 이 '대화엄종주'를 다시 세우기로 맹세하고 절을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1630년]](조선 [[인조]] 8년)에 벽암선사가 중심이 되어 재건을 펼쳐서 대웅전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건물들은 [[1636년]], 각황전은 [[1703년]](기록에 따라서는 [[1643년]])에 완료했다. 이러한 재건을 거치면서 화엄사는 [[1701년]](조선 [[숙종(조선)|숙종]] 27년)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가람]](大伽藍)(큰 절)으로 정했다. 선교양종이란 불교의 일파인 [[선종(불교)|선종]]과 [[교종]]을 가리키는데 선종은 [[참선]]을 통한 스스로의 [[깨달음]]을 중시하고, 교종은 [[경전]]을 중요시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다. 두 일파를 다 갖춘, 요즘 식으로 [[왕중왕|절 중의 절]]이라는 뜻.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화엄사 전경 국립중앙박물관.jpg|width=100%]]}}}|| || 일제강점기 화엄사 전경 || 1925년 수해 복구를 위해 화엄사 청년회에서 53원 30전을 보냈다. 1931년 정병헌이 주지가 되었다. 1934년 정병헌이 화엄사 주지 재선에 성공하였다. 63표 중 33표를 받았고 소병선은 24표로 낙선되었다. [[6.25 전쟁]]때 '[[빨치산]]들이 지리산의 절에 숨을 수도 있으니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당시 이를 받은 [[차일혁]] 초대 경찰 총경이 "태우는 건 하루면 족하지만 다시 세우려면 천 년도 부족하다." 하면서 대신 빨치산이 숨기 힘들도록 문짝만 모두 떼어 태울 것을 건의하여 살아난 이야기가 유명하다. 심지어 당시 차일혁 총경이 담당하던 지역은 전라북도였다. 한 마디로 경계를 넘어서 일을 벌인 것. 이 때문에 차일혁 총경은 감봉 조치를 당했지만 후일 화엄사를 비롯해 지리산의 문화유적을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보관문화훈장(3등급)이 [[추서]]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