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환관 (문단 편집) == 환관이 되는 법 == [[중국]]에서 초기의 환관들은 [[궁형]]을 받은 죄인들이었다. 하지만 환관들이 점차 막대한 권력을 누리게 되자, 부와 권력을 누리기 위해 스스로 [[거세]]를 선택하여 환관이 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거세]] 수술을 전업하는 기술자 엄공들이 성업하였다. [[조선]]에서는 [[세종대왕|세종]] 때에 이르러 사사로이 [[거세]]하고 환관이 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이는 조선이 건국 이래 유교를 국시로 삼은 것과도 관련이 있다. 거세를 비롯해 스스로 신체를 훼손하는 것은 당시 조선에서는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던 일로, 유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효의 시작이 바로 [[신체발부 수지부모|부모에게 물려받은 신체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종(조선)|성종]] 대에 함흥 천민 출신의 한 환관이 스스로 거세한 사실이 적발되어 쫓겨났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어린 시절 고자가 되어 환관의 [[양자(가족)|양자]]로 들어간 사람이 나중에 환관이 되었다.[* 이를테면 변소에서 변을보다 고환에 묻은 변을 미친개가 달려들어와 뜯어먹어 고자가 되는 경우도 ~~으아아~~ 있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어릴 때 유아가 변을 본 다음 개가 유아의 항문에 묻은 변을 핥아서 변을 닦게 하는 경우가 꽤 있었는데, 이게 잘 넘어가면 좋지만 개가 변을 핥다가 변만 핥는 것이 아니라… 음… 아… 아무튼 대부분의 경우 문제가 없었으니까 풍습으로 이어졌겠지만, 애기 팔자가 개에 의해 조져지는 일이 꽤 있었다고 한다. 70년대 라디오 방송에 집안의 하나뿐인 손주를 고자로 만들어 보신탕이 된 똥개 얘기가 나왔으니…] 환관이 양자를 고자로 만들 때는 반드시 관아에 알려야 했으며, 고자만들기 비용은 어린아이를 양자로 받아들이는 환관이 담당했다. 하지만 흉년이 들거나 하면 호구지책으로 환관이 되기 위해 고자행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고, 이렇게 스스로 거세했다가 환관이 되지 못한 고자들은 여염집에서 하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여염에서도 노비 주제에 결혼을 하겠다느니 자식을 낳는다느니 하면서 귀찮게 굴거나 집안의 여성들에게 손 댈 일이 없으니, 구할 수만 있으면 괜찮은 선택이었을 듯. 하지만 [[일천즉천]]이건 [[종모법]]이건 [[종부법]]이건, 고자 노비는 더 불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좋은 선택이 아니긴 하다. 물론 노비를 죄다 고자들로만 채울 일은 없고, 다른 정상적인 노비들도 많으니 별 문제는 없다. 애당초 노비되겠다고 고자된다는 선택지를 고르느니, 그냥 멀쩡한 몸으로 노비되는 게 더 나을 테고. 거세를 위한 수술방식은 고대에는 [[개]]에게 물어뜯게 하는 등(…) 무식하기 짝이 없었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수술방법도 발전, 고환과 음경까지 잘라도 안전해졌다고. 그러나 [[청나라]] 대에도 거세 수술을 하다가 사망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니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통은 둘째치더라도, 음경은 자르고 적당히 지혈해두면 --물론 지혈이 더럽게 힘들다-- 상처는 자연히 아물지만 고환은 정관이 연결되어 있고 혈관이 많아 출혈량도 상당하다. 지혈도 어려울 뿐더러 대충 봉합해봐야 [[내출혈|파열된 혈관으로부터 신체 내부에 피가 차거나]] 수술 부위가 오염되어 사망에 이르기 십상이라, 현대의학에서도 난이도가 높은 수술로 통한다.] 일단 [[당나라]] 기준으로는 수술 후 1/4~1/3은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100일 이내에 기타 이유로 죽는 사람들이 앞에 나온 비율보다 더 많았다. 즉 환관이 되는 건 '''자기 목숨을 걸고 권력을 얻으려고 하는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거세 방식은 크게 고환과 음경을 함께 절제하는 방식과 고환만 잘라내는 방식의 2가지이다.[* [[당나라]] 때는 이것들보다 더 무식한 방법도 있었는데 '''돌로 고환이고 음경이고 깨버리는 것(…)''' ~~무슨 마약했길래~~] 중국의 환관은 전자, 우리나라의 환관은 후자의 방식으로 거세했다. 음경 절제시 잘라낸 자리에 대롱(…)을 끼워서 요도를 보존한 관계로 소변 조절에 큰 문제는 없었다고. 하지만 고환만 잘라내는 방식에 비하면 사망율이 높았다고 한다. 청말민초의 [[자금성]]에서 일했던 환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소변]]을 조절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요실금]]처럼 속옷에 오줌을 지리는 일이 많아 사시사철 솜바지를 입었다. 거세한 고환과 음경은 소금에 절여 손바닥만한 항아리에 넣고 그 항아리를 상선이 잘 보관해 뒀다가, 해당 ~~고자~~ 환관이 죽으면 원래 있던 자리에다 실로 꿰매서 장례를 치른다. 이는 [[신체발부 수지부모]]에 의거한 것으로, 온전한 신체를 갖추어 조상 곁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였다. [[청나라]] 때 환관의 증언에 따르면 어느 정도 출세한 환관은 자신을 거세했던 도자장에게 양자를 보내 예물을 지급하고 항아리에 보관된 자신의 고환과 음경을 돌려받는데, 이를 받들고 조상의 선영에 가서 떠들썩하게 행차해 [[제사]]를 지낼 때에서야 비로소 바닥을 구르며 대성통곡하는 모습이 애절하기 그지없었다고 술회했다. 고환만 잘라내는 환관은 발기능력에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귀부인들의 장난감(…)으로 많이 활용되기도 했다.[* 사실 삽입성교를 안하더라도 만족을 얻을 만한 방법은 많기(…) 때문에 음경까지 잘라낸 환관도 비슷한 케이스가 왕왕 있었을 것이다.] 의외로 이런 식의 환관을 채용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왕이 공사다망할 경우 하렘에 있는 여자들을 만족시켜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키지만 않는다면 암묵적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중국에서는 고환과 음경이 다 날아가야 환관으로 인정하므로, 그런 환관은 발견 즉시 [[사형]]이었다. 자세한 수술법은 [[거세]]를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