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환관 (문단 편집) === 중국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중국의 환관조직)] 중국에서는 [[상나라]] 시대의 갑골문에 이미 강(羌)족의 전쟁 포로들을 환관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사마천]]의 《[[사기(역사책)|사기]]》에서는 이미 요순 시대에 [[궁형]]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고대 중국의 환관 중에는 [[진시황]]의 뒤를 이은 [[영호해]]의 측근으로, 권모술수에 능하여 온갖 권세를 휘둘렀던 [[조고]], 후한 말의 [[십상시]], 그 이름도 유명한 [[조조]]의 의붓 할아버지이자 십상시의 스승격인 [[조등]]이 유명하다. 실제로 온갖 전횡을 부리던 십상시가 유일하게 어려워한 인물이 바로 조등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본디 환관이 되려면 절삭한 남근을 담은 항아리에 태감의 직인이 찍혀 있어야 환관이 될 수 있었는데, 십상시의 그 항아리에는 '''조등의 직인이 찍혀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환관의 영향이 매우 커서, [[명나라]]에 이르러서는 무려 1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환관이 존재하기도 했다. 황제 전용의 행정관료이기도 했기 때문. (자세한 것은 [[명나라]] 항목 참조.) 그 때문에 명나라 대에 이르러 권력을 독점하고 악행을 행한 환관들이 숱하게 등장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명나라의 [[왕진(명나라)|왕진]], 유근, [[위충현]] 등이다.[* 특히 [[엄숭]]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조선에서 나온 명나라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나오는 권세쥐고 나라를 쥐락펴락 하는(쉽게 말해 '''간신''') 환관의 이름은 죄다 엄숭이다(…) 참고로 실제 엄숭은 환관이 절대로 아니었다.] 다만 명나라 때의 환관들은 말 그대로 뒤웅박 팔자라서, 황제의 총애를 잃는 순간 모든 걸 잃는 운명이었다. [[한나라]]나 [[당나라]] 때의 황제의 목숨까지 쥐락펴락하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명나라]]는 환관을 충당하기 위해 조선에 이런 저런 이유로 남성으로서 생식기능을 상실한 12세에서 18세 사이의 남자아이를 보낼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를 화자(火者)[* 말 그대로 사람(人)에서 고환을 상징하는 2개의 점이 떨어져나간 사람을 뜻한다. 흔히 이런 사람을 고자(鼓子)라고도 했는데, 이는 북처럼 속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라고 한다. 그중에서 1428년([[세종대왕|세종]] 10년) 10월 3일자에 명나라에 들어간 [[황해도]] [[신천군]] 출신의 정동(鄭同)은 명나라 황궁 생활에 잘 적응한 결과 최고의 권세를 누리는 환관으로 성장했다. 정동이라는 이름이 다시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것은 1469년([[해양대군|예종]] 1년) 1월 30일자에서다. 명나라 사신으로 최안[* 정동과 마찬가지로 조선 사람으로 [[온양]] 출신이었다.], 정동, 심회 3명이 곧 [[한양]]에 들어오게 될 것이라는 보고서였다. 41년 전에 화자로 갔던 바로 그 정동이 이제 명나라 환관들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인 태감(太監)이라는 벼슬을 갖고서 조국의 땅을 다시 밟게 된 것이다. 정동은 한양에 머무는 동안 별도의 집을 마련했고, 중간에 고향 신천도 방문하고 왔으며, 가까운 친척의 관직 청탁도 서슴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정동의 청을 빠짐없이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4월 6일에는 그의 고향 신천을 현(縣)에서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어쨌거나 정동의 입장에서는 금의환향(錦衣還鄕)이었다. 당시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들어오면, 3~4개월 정도 머물며 온갖 향응과 유람을 즐기다가 더 이상 싣고 가기 힘들 정도의 각종 선물을 받고서 [[북경]]으로 돌아갔다. 정동도 5월 2일 돌아가는 길에 고향 [[신천군]]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호조판서 [[노사신]]이 [[황해도]]까지 안내를 맡았다. 화자가 명나라 태감이 되었다는 사실의 신분상승적 의미는 그만큼 컸다. 이후 [[명나라]]를 방문하는 [[조선]]의 사신은 무조건 [[북경]]에 있는 태감 정동의 집을 방문해 현안에 관한 입장 조정을 거쳐야 했다. 정동도 가능하면 고국의 문제들이 잘 풀릴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많은 애를 썼다. 어쩌면 [[세조(조선)|세조]]부터 [[성종(조선)|성종]]대의 대명외교를 연구하는 데 정동은 가장 중요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참고로 [[세종대왕]] 때 명나라의 사신으로 자주 온 윤봉이란 이도 조선 출신에 세종 말년에 조선을 위해 큰 활약(?)을 했는데, 조선이 그토록 바라는 [[금]]과 [[은]]의 조공을 중지하게 힘을 써줬다. 대신 받아먹는 건 엄청나게 받아먹어서, 그의 동생을 재상급까지 만들었고, 여생을 조선에서 보내고 싶다며 집과 땅까지 받아냈다(…) 1479년 1월 4일 성종과 [[한명회]]가 나누는 대화의 한 대목을 보면 이미 정동은 명나라 조정 내에서 핵심요직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동이 병사(兵事)를 맡은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조정(朝廷)의 일을 많이 장악하고 있으니, 명의 대신이 모두 삼가고 반드시 그를 꺼릴 것이다. 내가 만약 정동에게 [[뇌물]]을 내렸다가 중국 조정에서 안다면 반드시 나를 비루하다고 할 것이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001004_002|성종실록 100권, 성종 10년(1479년) 1월 4일 신유 2번째 기사]] 정동에게 뇌물을 줘야 한다고 했던 인물이 바로 [[한명회]]였다. 따라서 한명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이 무렵 이미 한명회는 동시통역사인 장유화를 매개로 해서 정동과 깊은 유착관계를 형성해 놓고 있었다. 그것이 조선 조정 내에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환관 정치의 폐해가 만연하던 [[명나라]]를 거울로 삼아 환관조직을 축소하고 환관의 수를 줄였다. 명말 [[자금성]]에는 5만명의 환관이 재직하고 있었으나, 북경에 입성해 자금성을 접수한 [[도르곤]]은 이를 천명으로 줄이고, 순수하게 환관 본연의 임무인 황제나 비빈의 시종노릇만 하게 했다. 그리고 환관은 글을 배우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리하여 전대인 명나라와는 달리 청나라 역사 내내 환관은 역사에 거의 등장하지 않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