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환관 (문단 편집) ==== 신라 ==== 환관에 관한 기록이 가장 처음 나타나는 것은 [[통일신라]] 시대의 일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흥덕왕]] 원년(826) 기사에는 "왕비가 죽자 슬픔에 젖은 흥덕왕이 시녀들조차 가까이 하지 않고 오직 환수(宦竪)들만을 심부름꾼으로 부렸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초에 편찬된 내시의 사적을 기록한 내반원기에는, 신라 [[문무왕]] 때 수충(守忠)과 아진함(阿珍含)을 환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신라의 관직인 대감(大監)을 내시를 가리키는 태감(太監)과 혼동하여 생겨난 오류다. 다만 아직까지는 환관은 그다지 기를 못 펴던 시기였다. 중국과는 달리 자연적으로 고자가 된 인물들만을 뽑는다는 규정이 있었고 수도 적었기 때문. 무엇보다 망할 때까지 [[골품제]]가 유지되어서, 진골 아니면 권력 핵심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