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환관 (문단 편집) ==== 고려 ==== [[파일:BcWd2PtCUAAJtV1.jpg]] 이후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까지는 환관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다가, 고려의 제11대 왕인 [[문종(고려)|문종]]대에 다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고려사]]에 부기된 이제현의 찬에 보면, 문종의 검소한 생활에 대하여, '환관과 급사를 10여명 밖에 두지 않았다'는 표현이 있다. 이는 뒤집어보면 이전에는 어느 정도 환관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고려의 [[내시]]는 환관과는 별개였다. 대표적인 내시로는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척준경]]의 아들도 내시를 했고 고려 후기 지식인 안향도 내시였다. 이처럼 내시는 문벌귀족의 자제들이 기용될 정도로 엘리트 계층으로 환관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헌데 고려의 제18대 왕인 [[의종(고려)|의종]]시기부터 환관의 힘이 막강해졌다. 본디 환관은 남반직에 속해서 7품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같은 제도가 의종시기부터 무너졌다. 의종은 자신을 젖 먹여 키워준 [[유모]]의 남편이요, 의종이 친동생에게 밀려 하마터면 왕위를 놓칠 뻔했을 때 비호자로 활약해준 환관 정함을 정7품 문관 벼슬인 합문지후에 임명하고, 왕광취, 백선연 등의 환관을 총애했다. 그러나 문신과 대간들은 "전례 없는 일"이라며 강력히 반대했고, 심지어 최숙청은 정함이 세를 믿고 권력을 남용한다면서 몰래 죽이려다가 발각되어 외딴 섬으로 귀양을 갔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의종은 [[단식투쟁]]까지 해가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정함은 환관이 내시가 되는 데 물꼬를 텄다. 의종은 신하들과 거리를 두고 조정에도 잘 나가지 않았으며, 환관을 통해 조정에 필요한 일을 알리고 신하들의 말도 환관을 통해 전해들었다. 자연히 환관의 권력이 강대해졌고 정함이 죽은 뒤에는 백선연이 의종의 후궁 무비와 결탁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의종을 몰락시키고 [[무신정권]]시대가 되자, 왕광취 등이 환관들이 반란 세력의 핵심 인사들을 궁궐로 끌어들여 살해하려다가 환관 한숙이 밀고하여 실패로 끝나 오히려 모두 죽음을 당하였고, 이후 무신정권 시대 동안에는 환관이 기를 펴지 못했다.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된 뒤 [[원 간섭기]]가 되자, 원나라는 고려에서 환관을 차출해갔다. 이 중에는 [[원사(역사책)]] 환자편에 오를 만큼 출세한 [[박불화]] 같은 인물도 있었다. 원나라 조정에서 봉사한 환관들의 영향은 막강해서, [[충선왕]] 시기에 환관들이 대원군, 군에 피봉될 정도로 권세를 크게 누렸다. 환관이 각광받는 직업이 되자 스스로 성기를 거세해서 환관이 되는 자가 많아져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고려시기엔 궁형이 없어서, 젖먹이 때 불알을 개에게 씹혀서 고자로 만들어 환자로 만들었다고 한다.] 고려 조정에서도 환관의 영향이 확대되었고, [[공민왕]] 시대에는 환관들로 이루어진 [[내시부]]가 만들어지기에 이른다. 공민왕은 특히 환관들과 인연이 깊은 왕이었는데, [[홍건적]]의 침공으로 인하여 [[흥왕사]]에 피신해 있을 당시, [[김용(고려)|김용]]이 난을 일으켜서 죽을 위기에 처한 일이 있었다. 그 때에 왕을 호위하던 이들은 모두 달아났으나, [[안도치]]라는 환관은 다른 환관인 이강달로 하여금 왕을 업고 피신하게 한 후 자신이 왕으로 가장하고 침전에 누워있다가 반역자들에게 대신 살해당하였다. 그야말로 자신의 몸을 바쳐 왕을 구한 셈.[* 이강달은 이후 공신에도 책록되고 공민왕의 신임을 얻었으나 방자하게 행동한다는 탄핵을 받고 권세가 한풀 꺾인다. 그러나 공민왕 시해 후 궁 안팎의 보안을 철저히 하고 기밀을 엄수해 자칫 발생할 수 있던 후계자 분쟁같은 왕실의 큰 혼란을 미연에 방지한 공을 세웠다. 공민왕이 갑작스레 사망한지라 후계자를 딱히 내정한 것도 아니였는데 공민왕의 생전 유지를 받았다는 이인임이 나서 우왕이 보위를 잇기를 주장했음에도 경복흥이나 이수산 등 다른 원로들이 혈통이 더 명확한 방계 종실을(창왕 폐위 후 이성계 세력이 추대한 신종의 7대손인 공양왕같은) 세우자고 했고 명덕태후 역시 이에 동조했을 정도로 우왕의 혈통은 미심쩍고 불안정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이인임의 강권으로 우왕이 가까스로 왕위에 올랐는데 직전 이강달의 공이 없었으면 왕위에 공백이 생긴 틈을 타 우왕의 혈통을 부정하며 이를 노리는 무리들이 준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우왕]] 시절에는 환관의 폐단으로 내시부가 폐지되고 환관들은 노비 신분으로 전락했다가 [[공양왕]]대에 이르러서 내시부는 다시 부활했다. 그리하여 내시부 소속인 환관과 본래의 내시는 혼동되어 불리기 시작했으며, 어느덧 최고 엘리트 집단을 지칭했던 내시는 환관의 별칭이 되고, 본래의 내시는 이름은 물론이요 고유의 역할과 지위까지 잃어버렸으며 결국 내시는 환관의 동의어가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내시라는 이름으로 환관을 기억하는 까닭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