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봉 (문단 편집) == 생애 == 효봉에게는 '1914년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당시 [[일제강점기|일제]] 치하에서 한국인 최초로 [[판사]]를 역임했다'라는 [[도시전설]]이 오랫동안 따라다니고 있다. 그리고 [[평양]] 복심법원에서 10년 동안 재직하던 중 어떤 조선인에게[* 독립운동가였다는 버전도 있다.] [[사형]] 선고를 내린 것에 회의를 품고 번민하다가[*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된 사람이 나중에 무죄로 밝혀져 충격을 받았다는 버전도 있다.] 돌연 가족과 직장동료 등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종적을 감춘 뒤 [[엿]]장수로 변신해 3년여를 떠돌다가 출가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효봉과 같이 근무하던 일본인 판사가 1933년 당시 [[유점사]]를 방문했다가 10여년 동안 종적이 묘연하던 효봉을 마주치고 경악한 뒤 절대 자신의 과거를 발설하지 말아달라는 효봉의 간곡한 부탁에도 결국 [[촉새|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고]] 발설해버리면서 판사 출신이라는 게 밝혀졌다는 얘기다. 1933년 당시 [[유점사]]에 왔던 일본인 판사가 그때 자신과 같이 근무하던 이홍종이라는 조선인 판사와 효봉을 혼동했거나 애초에 연보 등 효봉 관련 문헌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19991120017002|#]]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5830|#]] 그런데 워낙 유명한 일화라서 아직까지 저 얘기가 사실처럼 많이 떠돌아 다닌다. 다만 효봉이 엿장수로 떠돌다가 37세에 [[금강산]] [[신계사]] 보문암에서 석두를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출가 후 5년이 지나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그는, 각오를 하고선 1년 6개월간 금강산 법기암 뒤 토굴에 들어가 정진했다. 좌복에 엉덩이살이 눌러붙을 정도로 정진해서 ‘절구통 수좌’로 불렸다고. 이후 깨달음을 얻고 많은 후학을 길러냈으며, 송광사 삼일선원에 주석할 때 성철, 일타, 탄허 같은 선승들이 그를 따라 모여 수행했고, 송광사 방장 자리를 이은 구산(九山), 무소유의 [[법정(승려)|법정]]이 그의 제자였으며, [[고은(시인)|고은]]도 한때 일초라는 법명으로 효봉의 제자였다. 고은은 효봉에 대해 “나는 스님을 모시고 목욕을 할 때 그 궁둥이와 발가락, 발바닥에 그 고행의 자취가 역력히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법정의 경우는 1956년 효봉이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 가서 한철 정진을 할 때 시자로 데리고 간 유일한 사람이었다. 또한 효봉은 1962년 한국불교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며, 많은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