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봉 (문단 편집) == 일화 == * 출가 당시 학력과 과거 행적을 완전히 숨기고 오직 ‘못 배운 엿장수’였다고 자신을 소개했으므로, 모두들 효봉을 ‘엿장수 중’으로 불렀다. 그 후 같은 법원에 근무했던 [[일본인]] 판사가 관광차 절에 왔다가 우연히 조우, 그동안 숨겨왔던 판사 전력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효봉은 ‘판사 중’으로 불리게 되었고, 사찰의 법률문제만 생기면 효봉을 찾게 되었다. 이에 효봉은 이 일이 번거로워 [[금강산]]을 떠나 남행길에 오르게 되었고, 그 덕택에 남북분단 후 이 나라 불교계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런데 위에 설명했듯이 판사 출신이 아니라는 게 거의 확실해짐에 따라 '사람들이 법률문제를 의논해서 번거롭게 했다'라는 얘기도 나중에 덧붙여진 허구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 [[6.25 전쟁]]이 일어나 [[해인사]]에까지 인민군의 발길이 뻗쳐 왔을 때, 모두들 피난을 갔지만 효봉과 구산, 법흥, 원명, 보성 등의 문도들만 해인사에 남았다. 피난 가자고 보채는 제자들에게 효봉 曰 “저 소는 지난 여름 내내 농사 짓느라고 죽도록 부려먹었다. 그런데 이제 저 소를 버리고 사람만 피난을 가잔 말이냐?” 하지만 결국 소를 빼앗기자 효봉 曰 “소 버리고 사람만 피난갈 수 있느냐, 그 소가 우리 대신 죽었구나. 그 소가 우리 대신 죽었어” * 효봉의 생전 법어나 일화를 모은 <효봉 노트>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 때 조계종단 대표로 다른 종교 대표들과 함께 경무대로 초대받았을 당시 일화로, 고관대작들의 인사를 받던 이 대통령은 효봉이 들어오자 일어나 손을 잡고 앉을 자리를 권하며 “스님 생일은 언제입니까” 하고 물었는데, 효봉은 “생불생(生不生) 사불사(死不死)"를 말하며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데 생일이 어디 있겠소?'''”라고 답했고, 이 대통령은 한참이나 효봉이 말한 ‘생불생 사불사’를 되뇌었다고 한다. [[https://www.hani.co.kr/arti/well/news/1013160.html|#]] * 효봉의 제자였던 법정의 회고에 따르면 성격은 의외로 어린애 같아서 시자들과 장난도 곧잘 치고 자비롭기 그지없었다고 하는데, 시줏물을 낭비하는 것엔 엄중했다고 한다. 초 심지가 다 타서 내려 앉기 전엔 새 초를 갈아 끼지 못하게 했다. 수도인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 곧 부자살림이라고 금강산 시절부터 쓰던 다 닮아진 세숫비누를 쌍계사 탑전에 와서도 쓸 만큼 철저했으며, 무더운 여름날 단 둘이 앉아서 공양을 하면서도 가사와 장삼을 입고, 죽비를 쳐서 심경[* 식사 전 외우는 글]을 외우면서 엄숙히 음식을 먹었다고. * 남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제자에게는 나쁜 짓인줄 알고 있으면 너나 잘하면 될 것이지, 어쩌자고 남의 허물만 고자질 하느냐고 어김없이 “너나 잘해라! 너나 잘해!”라고 호통을 치셨다. 그래서 나중에 ‘너나 잘해라 스님’이란 별명이 붙었다. [[파일:효봉스님과함석헌선생.jpg]] * 개신교인인 [[함석헌]]과는 같은 평양고등보통학교 선후배[* 효봉이 1기, 함석헌이 8기]로 가까운 사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