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미히토 (문단 편집) ==== 후미히토에 대한 또 다른 관점 ==== 이제 후미히토는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없다. 형 나루히토가 [[천황]] 재임 기간에 급사하거나 심각한 병에 걸려 생전퇴위를 하는 일이 벌이지지 않는 한, 권력의 논리에서 후미히토가 뭘 하기는 어렵다. 더군다나 이제는 일본 국민들 모두가 아키히토 덴노의 생전퇴위 선언 이후 궁내청과 후미히토 일가의 실상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예전처럼 헛수작을 부리려 해도 믿기보단 불신하고 비난할 확률이 높다.[* 실제로 2019년 4월 히사히토를 두고 살인미수 사건이 터졌을 때, 조금 이상한 내용의 기사들이 2~3개 정도 나오자, 많은 일본 대중들이 후미히토 일가가 또 정보 통제를 건다며 음모론을 떠들었을 정도였다. 사건 이후 5월 11일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중학교 학부모회의에 참석한 키코 비에 대해선 '학부모들의 항의를 막으러 간다.'고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이미 일본에서 후미히토 일가가 신망을 잃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2010년대 말 기준이라 향후 변화할 여지도 있지만 쉽진 않을듯.] 신뢰를 쌓는 것은 어렵지만, 한 번 잃은 신뢰를 다시 되찾는 것은 몇 배로 어렵다. 하물며 이 집안처럼 그동안의 행동이 지나치면 더더욱 그렇다. 후미히토에 대한 일본 내부에서의 여론은 부정적인 관점이 압도적이다. 히사히토 탄생 전에는 우익과 친했기 때문에 그쪽으로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고, 히사히토 탄생 뒤로는 일반인들까지 인기를 포섭했지만, 장녀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으로 시작된 각종 사건사고로 지금은 긍정적인 여론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극우들조차 입을 다물고 있을 정도. 히사히토를 교육하는 방식조차 과거 정치계에서 '늦었지만 황태자(나루히토) 일가로 보내서 최대한 교정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논의가 있을 만큼 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후미히토도 [[일본 황실]]의 [[가부장제|가부장적]]인 서열에 피해를 입은 케이스일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그 선봉장에는 다름 아닌 아버지 아키히토가 있었으며, 어머니 미치코 황후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형 나루히토는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가 결혼 1년만에 얻은 귀하디 귀한 첫아이이자 차기 천황 후계자였다. 특히 후계 생산의 중책을 담당하고 있었던 데다 고된 시집살이까지 당하고 있던 미치코 황후에게는,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해준 귀한 아들이었을 것이다. 마사코 황태자비와 달리 미치코 황후에게 이혼설이 안 나왔던 이유가, 후계자의 어머니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일본 황실을 이을 책임이 있었던 아키히토 황태자에게도 장남 나루히토는 그 존재가 각별했을 것이다. 반면에 5살 아래인 후미히토는 많은 축복을 받긴 했지만, 장남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자랐고, 여기에 가장 중요한 시기인 4살 때 여동생인 사야코 공주가 태어나버리면서 후미히토에 대한 천황 부부의 관심이 흩어져버렸다. 그런데 이것이 계속 고착화되면서 사실상 '''방임'''이 되고 말았다. 남녀의 역할이 명백하게 구분되어 있는 일본 황실에서 3남매의 [[육아]]를 전담했을 미치코 황후가, 황실 내부에서 자행된 엄청난 수준의 고된 시집살이를 당하는 과정에서 온 정신을 3남매에게 다 쏟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미치코 황후의 시집살이 에피소드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처음부터 놓으려고 놓은 게 아니라, 일단 태클부터 걸고 보는 황실 사람들이 후미히토에 대한 훈육에도 필요없이 참견한 부분이 있기는 했다. 장난치고 말썽을 피워서 그에 대해 훈육하려 하면 "어딜 평민이 황자께 손을 대느냐"고 한소리 하는 식.] 미치코 황후의 시집살이는 [[쇼와 덴노]]가 사망하고 미치코 황태자비가 황후로 즉위한 뒤에도 이어졌기 때문에, 나루히토가 마사코 황태자비와 결혼한 다음 해에 실어증 사건을 겪었고, 시어머니 나가코 태후가 죽는 2000년까지 미치코 황후의 시집살이는 지속되었다.[* 지금은 종영된 [[SBS]] 프로그램인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봐도, 이런 일은 주변에 아주 비일비재하다.] 나루히토는 장남이었기에 미치코 황후가 못하는 부분은 아키히토가 제왕학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최대한으로 커버할 수 있었고, 막내인 [[사야코 공주]]는 같은 여자라서 황실 내부에서 심한 [[성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공통점 때문에, 늘 미치코 황후의 곁에 붙으면서 힘이 되어주었다. 또 언젠가 평민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평민 출신으로서 이것저것 교육에 신경을 써준 것을 2005년 사야코 공주의 결혼식 때 미치코 황후가 했던 말로 알 수 있다. 그러나 후미히토는 어머니인 미치코 황후와 아버지 아키히토 덴노가 방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셋 다 챙길 수 없는 상황에서 어차피 방계 황족으로 황실에 남아 요구하는 것만 하며 살면 되기에 내버려둔 것일 수도 있다. 정말 큰 문제는 의미 있는 상호작용의 부재로 후미히토가 뭐가 옳고 그른지에 대해 판단을 못하고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망나니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황족의 자세조차 천황 내외가 교육 제대로 안 시켰다는 것[* '황실의 망나니'라고 불리우면서 온갖 구설수에 올랐던 토모히토 친왕조차도 자신의 두 딸 아키코 공주와 요코 공주를 제대로 교육시킨 것과 비교하면, 후미히토는 부모로부터 황족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교육조차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토모히토의 두 딸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등 한국인 관점에서는 우익-극우적으로 껄끄럽게 보이는 행동을 하지만, 그를 제외하고는 딱히 정치적으로 모난 발언을 한 적은 없으며 후미히토 일가처럼 대놓고 국민적 소동을 일으킨 적도 없다.]이 후미히토의 행동으로 고스란히 파악할 수 있다. 후미히토가 권력욕이 심했고 그것이 안 그래도 막장인 사고방식과 겹쳐 지난 10년 간 천황 앞에서 차기 천황을 두고 황실 암투가 벌어지게 되었고 지금은 자녀교육 문제로 후계자인 아들인 히사히토까지 천황 자격을 놓고 찬반 논란이 벌어졌다. 역사상 차남 이하의 왕자들 중에 권력욕이 셌던 인물들이 많긴 했지만, 그 인물들은 최소한 주변 상황을 보며 행동했다.[* 대표적으로 조선의 [[세조(조선)|세조]]. 아버지 [[세종(조선)|세종]]과 형 [[문종(조선)|문종]]이 살아있을 적에는 권력욕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으며, 형이 죽고 조카 [[단종(조선)|단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한 그 시점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종이 오래 살았으면 수양대군도 야심을 접었으리라는 게 중론이다.] 그러나 후미히토는 주변을 보지 않고 마구잡이로 행동하다가 아버지 아키히토가 대놓고 망신을 당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상황을 정리하는 바람에 큰 창피를 당했다. 사실 명백히 말해 아키히토 덴노의 생전 퇴위 발표는, 장남은 감쌌지만 차남은 공개적으로 내친 것과 다름없는 처분이다. [[만세일계]]를 이을 혈통인 히사히토가 있었고, 이 3명 이외에는 황실 인원이 부족했던 덕에 후미히토 일가를 쫓아내지만 않았을 뿐, 징벌의 강도는 대놓고 내쳤다고 볼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아키히토 덴노가 그정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오히려 나루히토 당시 황태자가 쫒겨났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만큼 후미히토와 궁내청이 막나가면서 나루히토를 견제했던 것.] 일본인들은 히사히토 탄생 후 10년 넘게 형 나루히토 황태자와 형수 마사코 황태자비, 조카 아이코 공주 등 황태자 일가에게 허위사실 등을 만들어서 상상 이상의 공격을 가하면서까지 천황에 대한 강한 야심을 드러내는 후미히토 일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아키히토 덴노는 때가 될 때를 기다렸다가 본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계책인 생전 퇴위 발표로 모든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워낙 변명도 못하는 상황이라 후미히토 & 키코 비 & 궁내청은 국내외적으로 큰 망신을 당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궁극적으로 천황이 되려고 했던 후미히토는 황태자나 황태제가 아니라 황사라는 이름의 상당히 애매한 직책을 부여받아서 현재보다 더 많은 공무를 떠안아야만 했다. 애초에 일본 황실의 왕위계승 특성상 천황이 죽으면 황태자에게 승계되도록 명시되어 있다. 천황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고, 황태자가 없으면 황태손을 삼는다. 따라서 황사와 별개로 천황이 황태자를 따로 책봉하더라도 별 다른 문제가 없으며 이 경우에 나루히토가 죽어도 황실전범상 황사를 놔두고 황태자가 즉위하게 된다. 그 때문에 궁내청은 황사로 책봉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와 동시에 그동안 자신에게 호의적이였던 여론의 지지기반을 상당히 잃고 말았다. 차세대 천황 후계자인 히사히토가 생긴 후 10년 넘게 주변 사람들로부터 형님인 나루히토를 대신하여 천황이 될 수 있다고 떠받들어지고, 자신도 그런 착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 아키히토의 공개 생전 양위 선언으로 후계에서 대놓고 내쳐졌다. 이쯤되면 말이 좋아 [[천황]]의 남동생이고 황사지, 사실상 목숨을 대가로 황실의 종신 공무노예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상황이 그렇게 밀어 내려고 안간힘 쓰던 형인 나루히토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자신은 자녀교육 문제로 비난에 시달리는 이 역전된 상황을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2019년 즈음부터 시종들로부터 구해온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런 상황 변화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사실, 후미히토가 이렇게 막장이 된 것에는 부모인 아키히토와 미치코 황후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후미히토가 말을 안 들어먹을 것처럼 보였다 해도 부모님인 아키히토와 미치코 황후는 나루히토와의 권력다툼이 발생할 때 단 한 번이라도 후미히토를 강하게 타일렀어야 했고, 그럴 기회 역시 있었다. 후계자가 있어도 장남은 형이니, 형을 존중하고 절대 천황 자리를 넘보지 말라고 했어야 했다. 이렇게 가장 기초적인 조치조차 취하지 않고 있다가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들면서 다른 한 쪽을 확인사살하듯이 내치는 것은 부모로서 할 짓이 아니다.[* 성장과정에서야 정신없고 바빠서 그랬다 쳐도, 성인이 된 이후까지도 황실 질서가 개판 5분 전이 되도록 후미히토의 행위를 방관만 한 것은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다. 다만 아키히토가 일본의 우경화에 부정적인 입장이고 그동안 후미히토의 뒤를 봐준 것이 [[궁내청]]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키히토는 후미히토를 씨앗으로 삼아 궁내청 극우세력의 폭주가 충분히 무르익기를 기다려 나루히토에게 대숙청과 함께 궁내청을 일거에 갈아엎을 기회를 물려주려 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어느 쪽이 되었건 결국 아키히토에게 후미히토는 자식으로서 큰 의미가 없었다는 말이 되니, 뭔가 짠할 지경이다.][* 영국의 경우 [[엘리자베스 2세]]는 자신의 손으로 양육한 [[앤드루 왕자]]나 [[에드워드 왕자]]를 매우 총애했으나 맏형인 [[찰스 3세]]에게 맞서서 선을 넘는 행동은 절대 하지 못하게 조처했었다.] 사실상 생전 양위 선언 자체가 후미히토를 후계에서 완전히 내치고 장남인 나루히토와 손자이자 후미히토에게는 친아들인 히사히토만 천황 후계로 인정한 것이다. 후미히토는 아들 덕분에 그 사이의 징검다리로 끼어들어갔고(…). 상술하였으나 나루히토가 재임 기간에 급사하지 않는 한 후미히토가 천황이 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된다고 해도 고령에 진입하는 나이인지라 오래 재임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미 위키의 일본 황실 관련 여러 문서에 아키히토 내외가 첫째 나루히토나 셋째 구로다 사야코와 달리, 둘째 후미히토를 아들로서 제대로 대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부모와 자녀 간의 상호작용이 성인 이후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아는 사람이면, 떠오르는 바가 있을 것이다. 사실 현실에서 성인이 되어 행동적인 문제와 더불어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 중 대다수가, 어릴 적에 부모와의 사이에서 문제가 있었던 경우가 많다. 어떤 의미로 후미히토는 [[일본 황실]] 내의 [[가해자가 된 피해자]]이자 [[피해자가 된 가해자]]일 수 있다는 것.[* 물론 후자는 앞에서도 꾸준히 지적했듯이 자업자득의 성격이 강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