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미히토 (문단 편집) == 결혼과 가정 == || [[파일:attachment/후미히토/kiki1.jpg|width=100%]] || || [[파일:external/www.jiji.com/aki211-31-jpp04626619.jpg|width=100%]] || [[1990년]] [[6월 29일]], [[가쿠슈인대학]] 1년 후배인 [[가와시마 키코]]와 결혼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된 것은 키코가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심리학과]]에 입학한 1985년 봄이라고 한다. 대학 내의 서점 세이분도(成文堂)에 자주 드나들다가 여기서 만나 알게 되어 [[동아리]] 활동 등을 함께 하며 사귀기 시작했고, 후미히토가 20살의 키코에게 청혼했다고. 키코는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며 거절하였고, 어머니 미치코 황후도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키코가 23살이 되었을 때 '결혼시켜 주지 않으면 집을 나가겠다.', '친왕(황족)의 지위를 포기하고 키코와 [[영국]]으로 가겠다.'고 했다고 한다.[* 장녀 [[코무로 마코|마코 공주]]가 20세 기념 기자회견(2011.10.23)에서 "아버지는 내 나이 때 결혼을 생각하신 것 같다." 하며 이 에피소드를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 [[파일:external/livedoor.sp.blogimg.jp/345a0cba.jpg|width=100%]] || 결혼 초의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 뒷편의 집은 후미히토의 셋째 고모 [[다카쓰카사 가즈코]]가 살던 집이다. 카즈코는 불행한 결혼생활 끝에 과부가 된 후 친정인 황실로 돌아와 [[이세 신궁]]의 [[신관]] 일을 하며 조용히 살다가, [[1989년]]경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로 이 집에서 두 사람은 둘째 [[카코 공주]]까지 낳아서 현 저택(구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저택)으로 이전하였는데, 2019년 2월부터 약 10억엔 가량을 투입하여 이 저택 자리에 임시거처를 지어서 현 저택 개보수가 끝나는 약 3년 정도 지낼 예정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dcf12a56adae7760b5ae93a3050dabd0b03f7c1f0b643b6b3b99bd91c1f7dd74.jpg|width=100%]]}}} || || '''[[1997년]]의 아키시노노미야 일가.''' || 당시 이 둘은 대학에서 [[캠퍼스 커플]]로 만나 [[동아리]] 활동 등을 함께 하며 꽤 오랫동안 교제한 사이로, 원래는 [[나루히토]] 황태자가 결혼한 다음에 차차 결혼할 생각이었다.[* [[일본 황실]]의 적장자 계승 체제와 서열은 매우 굳건하다. 후미히토는 원래 [[가쿠슈인대학]]보다 훨씬 더 좋은 대학으로 부정입학하려 했다. 그러나 형인 나루히토 황태자가 가쿠슈인대학에 진학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가쿠슈인대학에 [[부정입학]]했다. 감히 일개 황자가 적장자인 황태자보다 좋은 대학에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과 출산 또한 황태자가 먼저 하는 것이 황실 내 서열에 따르는 행동이다. 후미히토 부부가 1994년 둘째 카코 공주를 [[임신]]했을 때, [[히사코 비]]에게 "황태자 부부가 아이를 낳지 못했는데 계속 아이를 낳다니, 황실 내 서열을 알고 행동하길 바랍니다!"라고 욕을 먹은 이유도, 이런 서열 문제와 관련 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나루히토 황태자의 혼사 문제가 빨리 해결되지 않았다. 당시 [[미치코 상황후|미치코 황후]]가 시어머니 [[고준 황후|나가코 태후]] 및 구 황족/[[화족]]들에게 얻어터지며 [[미치코 상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온갖 시집살이]]를 당한 것은, 일본 전 국민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황태자비 후보에 오른 여성들은 죄다 날치기 결혼을 하거나 외국으로 뜨는 바람에, 황실은 황태자비 간택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거기다 [[나루히토]] 황태자부터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길 원했는데, 하필이면 나루히토가 사랑하는 여자인 [[마사코 황후|오와다 마사코]]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외국에서 자란, 능력 있는 진취적인 커리어우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사코는 나루히토의 청혼을 거절하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도피유학|도피성 해외연수]]를 떠났다. 나루히토는 마사코를 잊어 보려고 [[가쿠슈인]] 출신 한 여자와 진지하게 만났지만, [[궁내청]]의 심사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결국 오와다 마사코를 잊지 못해 사이도 흐지부지되었다.(…) 그렇게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는, 무려 7년에 걸쳐 청혼-거절 테크를 [[무한 반복]]하는 중이었다. 결국 참다 못한 후미히토 친왕은 [[가와시마 키코]]에게 청혼했다. 청혼한 장소가 가쿠슈인대학 근처 횡단보도의 [[신호등]] 아래여서 일명 '신호등 아래의 청혼'이라는 이야기로 화제가 되었고, 문제의 그 장소도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