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희종(고려) (문단 편집) === 폐위 이후 === 최충헌은 진상 확인을 한 다음 왕준명 등 실행자만을 유배시키고, 희종은 폐위시킨 뒤 그보다 29세나 연상인 사촌형 한남공 왕오를 옹립했으니, 그가 바로 고려 제22대 임금인 [[강종(고려)|강종]]이다. 이로써 강종은 최충헌에 의해 폐태자가 되었다가 다시 최충헌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는 웃지 못할 처지가 되었다. 이후 최충헌은 희종을 강화도[*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로 유배보냈다가 자연도[* 현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도]].], 다시 교동(喬桐)[*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조선 제10대 [[연산군]]이 유배가서 1개월 만에 죽은 곳이기도 하고, '''20세기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는 황막한 곳이었다'''.]으로 옮겨가며 유배시켰다. 이때 최충헌의 부하가 희종을 찾아가자 그는 자신을 죽이러 온 줄 알고 매우 놀랐으며, 희종의 [[재산]]을 확인하자 고작 [[쌀]] 6가마가 전부인 꼴을 부하가 확인하고는 최충헌에게 딱한 사정을 보고했으나 >"내가 어지고 용서할 줄을 몰랐다면 왕 부자가 어찌 오늘날까지 목숨을 보전했겠는가? 왕준명의 일을 다시 생각하면 내 머리카락을 곤두서게 한다!" 최충헌은 이렇게 말하며 거절하고는 희종의 처우를 개선하지 않았으니 상당히 고달픈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는 언급이 없으나 희종은 폐위된 후 유배당한 처지이지만 표면적으로는 '태상왕'(대상왕)에 봉해진 것으로 보인다.[* 제19대 명종도 《고려사》에 없지만 <명종 애책문>에 '태상왕'으로 올려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23대 고종 재위 연간에 사망한 <최보순 묘지명>(崔甫淳 墓誌銘)에는 아직 살아있었던 희종을 '대상왕'(大上王)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종이 희종의 아내 [[성평왕후]]의 시호를 올릴 때 희종을 '상황'(上皇)이라 부르기도 했다.[* 사실 고종에게 있어서 희종은 [[친척]]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장인이었는데, 그의 아내인 [[안혜태후]] 유씨의 아버지가 바로 희종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다가 1219년 4월에 그의 3녀 덕창궁주가 최충헌의 아들 최성[* 또는 최전. 기록이 많이 엇갈리는 편이다.]과 혼인을 하면서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전에 [[태조(고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고려)|낙랑공주]]가 [[경순왕]] 김부와 혼인한 적이 있었으나 이것은 제도가 정비되기 이전의 일이고, 고려 왕실의 족내혼 풍습이 고착화된 이후로는 최초로 [[공주]]가 족외혼을 한 사례였다.[* [[조선]]식으로 비유하자면 [[단종]]이 폐위되었다가 한명회와 사돈을 맺어서 [[서울특별시|한양]]으로 돌아온 거나 마찬가다. 그만큼 최충헌의 [[권력]]이 기형적이었던 것이다.] 희종은 1219년 4월에 왔는데 최충헌은 같은 해인 1219년 9월 20일에 [[사망]]했으니 그래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가능성은 있지만 기록이 없으니 두 사람이 실제로는 만났는지, 과연 사돈댁을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본인들만이 알 것이다. 최충헌의 [[사돈]]이 된 그는 8년간 개경에서 잘 먹고 잘 살았으나, 1227년에 희종 복위 시도가 발각되면서 다시 인생이 꼬이게 된다.《[[고려사]]》<최우 열전>에는 당시 집권자 [[최우]]가 아끼던 무신 노지정[* 다른 이름은 노인수. 《고려사》에 본인 <열전>이 있다. 본인 <열전>을 보면 알겠지만 일생을 [[노답]]으로 살다 간 [[인간]]이었다.], 금휘, 김희제[* 《고려사》에 본인 <열전>이 있다. 본인 <열전>을 보면 알겠지만 희종 복귀 시도에 참가하지 않았고, 최우의 일방적인 오해였다.], 주연지[* 처음 이름은 최산보. [[승려]]였다. <최우 열전>을 보면 알겠지만 점을 치는 땡중이었다.]가 서로 모의해 최우를 죽이고, 희종을 복위시키려 한 것이다. 최우가 주연지의 [[집]]을 조사했을 때 주연지가 희종에게 보낸 밀지가 발견됐고, 밀지 중 한 부분에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 생사를 같이 할 것을 맹세하고 아버지처럼 섬기겠습니다." 음모는 발각되어 가담자들은 삼족이 몰살당하는 참화를 겪었는데 [[편지]]까지 발견된 것을 보아 주연지 일파가 정변을 일으키기 위해 희종을 [[꼭두각시]]로 내세웠던 것이거나, 아니면 희종이 최우 일당의 불화를 이용해 나름 복귀 시도를 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아버지 최충헌과 마찬가지로 희종을 결코 시해할 수는 없었던 최우는 희종을 제거하지 않고, 다시 강화도로, 얼마 후 [[교동도]][*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로 거듭 유배시키는 데에 그쳤다. 이번에는 ~~최우와 사돈을 맺지 못해서~~ 개경으로 돌아가지 못하다가 1237년 근처 [[절(불교)|절]]인 법천정사에서 [[자연사]]했다. 중간에 개경에서 지낸 기간을 빼도 향년 57세로 죽은 사람이 유배만 18년을 살았다. 사후에도 개경에 돌아오지 못하고 강화도에 묻히는 박대를 받았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고려 왕조의 능을 거의 관리하지 않은 [[북한]]이 아니라 형식적인 관리라도 해주던 [[대한민국|남한]]에 의해 비교적 잘 보존된 왕릉에서 쉬고 있으니 이 또한 새옹지마라 할 만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