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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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21대 국왕
희종 | 熙宗

파일:석릉.jpg
석릉 전경
출생
1181년 6월 21일
고려 개경 개성부
(現 경기도 개성시)
즉위
1204년 2월 7일
고려 개경 개성부
(現 경기도 개성시)
사망
1237년 8월 31일 (향년 56세)
고려 양광도 교동현 법천정사
(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도)
능묘
석릉(碩陵)
재위기간
고려 왕태자
1200년 5월 29일 ~ 1204년 2월 7일 (3년)
고려 제21대 국왕
1204년 2월 7일 ~ 1212년 1월 30일 (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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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개성 왕씨

연(淵) → 덕(悳) → 영(韺)
부모
부왕 신종
모후 선정왕후
형제자매
2남 2녀 중 장남
배우자
성평왕후
자녀
5남 5녀
종교
불교

불피(不陂)
묘호
정종(貞宗) → 희종(熙宗)
시호
인목성효대왕(仁穆誠孝大王)[1]
절일
수기절(壽祺節) → 수성절(壽成節)[2]

1. 개요
3. 생애
3.1. 즉위 이전
3.2. 즉위 이후
3.3. 최충헌 습격 사건: 수창궁 사변
3.4. 폐위 이후
4. 평가
5. 가족관계
6. 기타
7.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고려 제21대 대왕.

묘호는 '희종'(熙宗), 시호는 '성효대왕'(誠孝大王). 휘는 처음에는 '연', 태자가 되고나서 바꾼 휘는 '덕'이었으며, 이후 다시 바꾼 휘가 '영'(韺)이다. 자는 '불피'(不陂). 제17대 인종의 손자이고, 제18대 의종과 제19대 명종의 조카였으며, 제20대 신종의 맏아들이고, 제22대 강종의 사촌동생이었다.


2. 묘호, 시호, 존호[편집]


처음 시호는 '정종'(貞宗)이었는데, 만일 이 묘호가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고려에는 한글로 이라는 묘호를 가진 왕만 3명이 될 뻔했다. <김중구 묘지명>에 '정종'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 비석은 제23대 고종 29년인 1242년에 지어진 것이다. 희종이 고종 24년인 1237년에 붕어했으니 최소 사후 5년간 묘호는 '정종'이었다. 이후 묘호가 '희종'(熙宗)으로 바뀌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언제, 왜 바뀌었는지 기록은 되어 있지 않다.

고종이 올린 첫 시호는 '성효대왕'(誠孝大王)이며, 또 시호를 추가해 공식 존호는 '희종 인목성효대왕'(熙宗 仁穆誠孝大王)이었다. 《고려사》 <희종 세가> -총서-에는 '희종 成효대왕'으로 되어 있다.[1]

《고려사》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당대 기록인 묘지명 등을 보면 생전에 옥좌에서 강제로 내려온 뒤 '태상왕'(太上王)으로 올려진 듯하다. 희종 사후에 고종은 희종을 '상황'(上皇)이라 불렀다.[2]


3. 생애[편집]



3.1. 즉위 이전[편집]


선정태후 김씨의 소생이며, 동생으로 양양공(襄陽公) 왕서(王恕)[3], 경녕궁주(敬寧宮主), 효회공주(孝懷公主)가 있었다.

즉위 전 종실인 왕우의 딸을 태자비로 맞으려 했지만 권력 강화를 위해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일 욕심에 가득차 있었던 최충수의 겁박으로 무산되고, 그의 딸을 왕후로 맞이할 뻔 한다. 하지만 최충헌이 이를 막고 결국 형제 간에 골육상쟁을 벌여 그 과정에서 최충수가 죽으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과오를 모른다. 나 또한 스스로 알지 못하니 경들에게 부탁한다. 숨기지 말고 모두 언급해주길 바란다."

1200년 3월(신종 3년) 희종은 신하들에게 위처럼 말했다고 하는데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왕자를 칭찬했다고 한다. 희종이 무신 집권자 중 최악인 최충헌을 제거하려고 시도했음을 생각해보면 왕자 시절부터 명군의 조짐이 있었다. 1200년 4월 19세의 젊은 나이에 왕태자로 책봉됐다가 아버지 신종으로부터 선위 받았던 것이 《고려사》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3.2. 즉위 이후[편집]


1204년(희종 원년) 어머니를 태후로 높였고, 8세의 맏아들인 왕지(王祉)를 왕태자로 봉했으며, 자신의 절일을 '수기절'에서 '수성절'로 바꿨다. 《동문선》 제30권 <수기절일하전>에 보면 희종이 '왕태자 전하'(王太子殿下)로 불리고, 전문(箋文)을 받았는데 수기절은 희종의 왕태자 시절의 절일인 듯하다.

1205년 권신 최충헌을 '진강군 개국후'(晋康郡 開國侯)로 봉했다. 이어 벽상삼한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상장군 상주국 병부어사대판사 태자태사로 임명했다.[4] 최충헌이 내세운 임금인 만큼 아무 권력도 없었으며, 결국 국가의 주요 중대사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최충헌한테 끌려다녔다.

1208년 최충헌이 새로 지은 암자 '모정'(茅亭)에 가서 새로 지은 걸 축하해주고 시를 나누었다. 《동국이상국집》에 이 때 나눈 시와 표문이 남아 있다. 당시 참가한 이규보를 포함한 신하들은 희종을 '상제'(上帝), '자미천'(紫微天)으로 비유하고, 자신들을 '구문선'(九門仙, '아홉 신선')으로 비유하면서 그야말로 놀자판을 벌였다. 최충헌의 집에 갔을 때

'천자(天子)의 기운이 만호국후(萬戶國侯)를 밝혀준다며 오황(吾皇)께서는 오래 살라.'

는 시를 받는다. 희종은 '천자의 사랑을 받는 후작 최충헌'의 지위를 찬양하고 빛나게 해주는 도구 수준이었으며 최충헌이 길을 헐고 십자각을 짓거나 그의 수하들이 무엇을 하든 막지 못했다. 재위 초반에는 이렇듯 최충헌의 말을 잘 듣는 군주로 보였으나 속으로는 최충헌의 전횡을 고까워하고 최충헌을 치려 하고 있었다.


3.3. 최충헌 습격 사건: 수창궁 사변[편집]




1211년(희종 7년) 12월, 희종은 별궁인 수창궁(壽昌宮)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고, 최충헌 역시 일을 보기 위해 수창궁에 와 왕을 알현했다. 희종이 편전에 들어가자 최충헌 역시 자신을 시종하러 온 노영의 등 수하들과 함께 그 곳을 떠나려 했으나 중관(中官)[5]들이 최충헌 무리에게 '지'(旨)[6]가 내려져 음식을 나눠주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믿은 최충헌과 그의 수행원은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최충헌의 권력은 이미 왕을 능가하였으나 어쨌든 형식적으로는 윗사람인 왕의 호의를 대놓고 거절할 수는 없었고, 설마 제 아버지 신종 대부터 자기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젊은 임금 희종이 감히 자신을 죽이려 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궁궐 안으로 들어간 최충헌을 기다리고 있던 건 왕준명승려 10여 명과 부하들이었다. 그들은 최충헌의 수하들을 죽인 다음 최충헌도 마저 죽이려 들었는데 놀란 최충헌은 편전으로 뛰어가 당황한 상태로 말했다.

"상께서 신을 구해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희종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편전의 문도 열리지 않았다. 다급해진 최충헌은 급하게 지주사방[7]의 문 사이에 숨어들었다. 승려들은 흩어져 최충헌을 찾았고, 한 승려가 지주사방에 들어와 3번 정도 훑었지만 최충헌을 발견하지 못했다. 도방의 김약진, 최충헌의 사돈인 지주사 정약첨 등이 급보를 듣고 다급하게 수창궁으로 와 승려들과 싸움을 벌였는데 노영의가 최충헌을 끌고 나와 지붕에 올라가 외쳤다.

"우리 공(公)은 무사하다!"

이 말을 들은 김약진임금이 있는 별궁에 사병인 도방 6번을 제 마음대로 투입시켜 최충헌을 데려가면서 최충헌 제거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사실 《고려사》에는 수창궁 사태의 주동자가 희종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이 사건이 희종이 있는 궁궐 깊숙한 곳에서 발생했고, 희종이 최충헌을 완전히 무시하며 도와주지 않은 점을 보아 최소 살해 계획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해보인다. 최충헌은 그동안 많은 암살 시도를 겪었지만 이번만큼 본인의 목숨이 가장 위태로웠던 시도는 없었다. 김약진이 그에게 말했다.

김약진: "제가 병사를 궁 안으로 데려가 모든 사람을 죽이고 대사(大事)도 치르겠습니다."[8]

최충헌: "네가 그리 하면 나라가 무슨 꼴이 나겠는가? 훗날을 위해 넌 가볍게 움직이지 마라."

여기서 자신이 왕에 의해 죽을 고비를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왕을 죽이지 않은 최충헌의 남다른 정치 센스를 알 수 있다. 왕이 자신을 죽이려했으니 당연히 화는 났겠지만 그렇다고 자기가 반대로 칼을 휘두르면 정치적 리스크가 너무 커지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전 당시 집권자였던 이의민이 폐위된 의종을 죽이고 어마어마한 욕을 퍼먹은 전례도 이같은 판단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9]


3.4. 폐위 이후[편집]


최충헌은 진상 확인을 한 다음 왕준명 등 실행자만을 유배시키고, 희종은 폐위시킨 뒤 그보다 29세나 연상인 사촌형 한남공 왕오를 옹립했으니, 그가 바로 고려 제22대 임금인 강종이다. 이로써 강종은 최충헌에 의해 폐태자가 되었다가 다시 최충헌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는 웃지 못할 처지가 되었다.

이후 최충헌은 희종을 강화도[10]로 유배보냈다가 자연도[11], 다시 교동(喬桐)[12]으로 옮겨가며 유배시켰다. 이때 최충헌의 부하가 희종을 찾아가자 그는 자신을 죽이러 온 줄 알고 매우 놀랐으며, 희종의 재산을 확인하자 고작 6가마가 전부인 꼴을 부하가 확인하고는 최충헌에게 딱한 사정을 보고했으나

"내가 어지고 용서할 줄을 몰랐다면 왕 부자가 어찌 오늘날까지 목숨을 보전했겠는가? 왕준명의 일을 다시 생각하면 내 머리카락을 곤두서게 한다!"

최충헌은 이렇게 말하며 거절하고는 희종의 처우를 개선하지 않았으니 상당히 고달픈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는 언급이 없으나 희종은 폐위된 후 유배당한 처지이지만 표면적으로는 '태상왕'(대상왕)에 봉해진 것으로 보인다.[13] 제23대 고종 재위 연간에 사망한 <최보순 묘지명>(崔甫淳 墓誌銘)에는 아직 살아있었던 희종을 '대상왕'(大上王)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종이 희종의 아내 성평왕후의 시호를 올릴 때 희종을 '상황'(上皇)이라 부르기도 했다.[14]

그렇게 살다가 1219년 4월에 그의 3녀 덕창궁주가 최충헌의 아들 최성[15]과 혼인을 하면서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전에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경순왕 김부와 혼인한 적이 있었으나 이것은 제도가 정비되기 이전의 일이고, 고려 왕실의 족내혼 풍습이 고착화된 이후로는 최초로 공주가 족외혼을 한 사례였다.[16] 희종은 1219년 4월에 왔는데 최충헌은 같은 해인 1219년 9월 20일에 사망했으니 그래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가능성은 있지만 기록이 없으니 두 사람이 실제로는 만났는지, 과연 사돈댁을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본인들만이 알 것이다.

최충헌의 사돈이 된 그는 8년간 개경에서 잘 먹고 잘 살았으나, 1227년에 희종 복위 시도가 발각되면서 다시 인생이 꼬이게 된다.《고려사》<최우 열전>에는 당시 집권자 최우가 아끼던 무신 노지정[17], 금휘, 김희제[18], 주연지[19]가 서로 모의해 최우를 죽이고, 희종을 복위시키려 한 것이다. 최우가 주연지의 을 조사했을 때 주연지가 희종에게 보낸 밀지가 발견됐고, 밀지 중 한 부분에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 생사를 같이 할 것을 맹세하고 아버지처럼 섬기겠습니다."

음모는 발각되어 가담자들은 삼족이 몰살당하는 참화를 겪었는데 편지까지 발견된 것을 보아 주연지 일파가 정변을 일으키기 위해 희종을 꼭두각시로 내세웠던 것이거나, 아니면 희종이 최우 일당의 불화를 이용해 나름 복귀 시도를 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아버지 최충헌과 마찬가지로 희종을 결코 시해할 수는 없었던 최우는 희종을 제거하지 않고, 다시 강화도로, 얼마 후 교동도[20]로 거듭 유배시키는 데에 그쳤다. 이번에는 최우와 사돈을 맺지 못해서 개경으로 돌아가지 못하다가 1237년 근처 인 법천정사에서 자연사했다. 중간에 개경에서 지낸 기간을 빼도 향년 57세로 죽은 사람이 유배만 18년을 살았다. 사후에도 개경에 돌아오지 못하고 강화도에 묻히는 박대를 받았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고려 왕조의 능을 거의 관리하지 않은 북한이 아니라 형식적인 관리라도 해주던 남한에 의해 비교적 잘 보존된 왕릉에서 쉬고 있으니 이 또한 새옹지마라 할 만 하다.


4. 평가[편집]


최씨 정권기에 집권한 고려 국왕들 중 그나마 최충헌에게 정면 승부를 걸었으나 무참히 실패하고, 꽤나 고단한 삶을 산 임금이다.

조선 왕조는 《고려사》나 《동국통감》 등에서

"고려 희종은 흉적들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은 가상하나 한치의 실수로 일을 그르쳤다."

고 안타까워 했다. 왕당파 측 인사들 중 몇 명이 최충헌 같은 권신을 제거하는데 흥분해 갈팡질팡했고, 그 속에서 잡음이 생겨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희종의 측근이 지주사방에 숨어 있던 최충헌을 찾아내 암살했다면 최씨 무신정권은 혼란 그 자체였을 것이다.[21] 만약 정말 수창궁 사변 때 최충헌의 암살을 성공시켜 왕정복고를 이룩했다면 고려 역사는 그야말로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희종은 여러모로 결정적이고 동시에 아쉬운 역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형적인 무신정권이다 보니 최충헌 하나가 죽는다고 큰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곧바로 최우나 다른 누군가가 최충헌의 자리를 차지했을 수도 있었다.

희종의 암살 시도는 신라 하대의 제45대 신무왕 김우징이 진골 귀족들과 정면 대결하기 위해 청해진의 장보고와 손을 잡고 기득권을 싹 갈아버리려 했으나 실패하고, 자신이 요절하며 장보고의 암살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보면 공통점이 크고, 조선의 제12대 인종 역시 조광조가 추진했던 개혁을 상당 부분 추진하려 했으나 요절로 끝났다는 점에서 보면 그런 왕들과 비슷했다. 개혁을 추진하려고 의욕적으로 움직인 것은 좋았으나 단지 그뿐 결국 실패했는데, 왕의 명분이 아무리 좋아도 명분에 집착한 나머지 실리를 놓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왕이었다는 점에서는 한계점을 드러낸다. 개혁 관련에 있어서 조선의 제24대 헌종과도 묘하게 매치되는 듯 하다.


5. 가족관계[편집]


  • 태자비 왕씨 / 김씨: 희종이 일개 왕족이던 시절의 아내로 보인다. 태자비의 아버지는 제15대 숙종의 4대손 창화후 왕우였으며[22] 어머니는 명종의 딸 수안궁주였다. 희종과의 사이에서 자식은 없었던 걸로 보인다. 태자비는 기본적으로 왕족이라 왕씨일테지만 외할머니의 성씨인 김씨를 썼을 수도 있다. 희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가 되었다. 허나 최충수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올리기 위해 강제로 내쳤다. 《고려사》 <최충헌 반역 열전>에 따르면 신종은 노골적으로 싫어했지만 최충수가 두번 세번 떠 보자 결국 충수의 뜻대로 폐비했다고 한다. 태자비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펑펑 울었는데, 선정태후마저도 같이 울었고, 결국 궁중의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태자비는 평복을 입고 쫓겨났고, 이후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23]
  • 정장성평왕후 임씨(任氏):성평왕후는 생전 희종 7년인 1211년에 왕비 - 함평궁주(王妃 - 咸平宮主)에 봉해졌다. 《동문선》 37권엔 성평왕후가 위의 작위에 봉해진 뒤, 신헌선정태후에게 올린 <사태후표>(謝太后表)[28]가 남아 있다. 이 표문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우선 고려시대엔 왕태후에게도 표(表)를 올렸다는 것이다. 또한 '왕태후 전하'(王太后殿下)란 표현을 보아 왕태후는 '전하' 경칭을 받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성평왕후는 스스로를 '첩'(妾)이라 표현했다. 희종과 금슬이 굉장히 좋았던 듯 하다. 아들이 5명, 딸이 5명으로 총 10명의 자식이 있었다.
    • 태자 왕지(王祉): 맏아들. 아버지가 내쫓긴 뒤 폐태자되었다. 훗날 창원후(昌原侯)에 봉해진 뒤 창원공(昌原公)으로 진작되었다.
    • 시령후(始寧侯) 왕위(王禕): 차남. 아버지에게 황친(皇親)[24]으로서 번병(藩屛)[25]에 봉해지고 수사도(守司徒)[26] 검교태위(檢校太尉)[27] 상주국(上主國)을 받았다. 봉지인 '시령'은 현 황해도 신천군이다.
    • 경원공(慶原公) 왕조(王祚): 3남. 제25대 충렬왕 대까지 살았으며 제24대 원종 대엔 왕실의 큰어른으로 많은 지식을 전달했다고 한다. 봉지인 '경원'은 현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이다.
    • 4남과 5남은 각각 원정국사(圓靜國師), 충명국사(冲明國師): 고려시대엔 꼭 왕자 몇 명을 출가시켰다. 희종의 경우, 이 두 아들이 승려가 됐다.
    • 맏딸 안혜태후
    • 영창궁주(永昌公主): 차녀. 정간왕의 8세손인 승화후와 영녕공(永寧公)의 형제 단양군의 아내.
    • 덕창궁주(德昌宮主): 3녀. 이 궁주가 자신의 아버지를 비참하게 내쫓은 최충헌의 아들과 결혼했다. 두 사람이 과연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의문이다.
    • 가순궁주(嘉順宮主): 4녀. 이 궁주의 딸은 제24대 원종의 2비 경창궁주였다.
    • 5녀 정희궁주(貞禧宮主)


6. 기타[편집]


  • <최충헌 묘지명>에는 희종을 최소한으로만 언급했다. 신종이 최충헌을 불러 태자 왕덕에게 선위하고, 자기한테 공신호가 추가된 점과 희종이 시도한 본인 제거 작전을 희종은 아무 것도 몰랐다는 식으로 대충 우대해준 뒤 강종으로 넘어간다.
  • 한반도 남부에 묻힌 4명의 고려 군주 중 한 명이다.[29] 능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의 석릉.(碩陵)
  • 최근 연구에 의하면 성평왕후 임씨도 강화 천도 시기에 사망했기에 그녀의 능인 '소릉'(紹陵)도 희종의 '석릉' 근처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능묘의 석수, 부장품, 무덤 구조로 보아 정순왕후의 능인 '가릉'이 성평왕후의 소릉이고, 위쪽의 능내리 석실 고분군을 가릉으로 비정한 결과도 있다.#


7.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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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7 14:31:17에 나무위키 희종(고려)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희종의 왕후인 성평왕후가 '성'(成)자 돌림 시호를 받은 걸 보면 이 버전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2] 《고려사》 <종실 열전> -희종 후비- 중.[3] 이 사람이 제34대 공양왕의 직계 조상이다.[4] 품계나 명예직, 훈위를 제외하면 실 직위는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상장군, 병부어사대판사이다.[5] 환관의 별칭.[6] 임금의 명령을 뜻한다. 보통 성지(聖旨), 선지(宣旨), 왕지(王旨) 등으로 말한다.[7] '지주사'는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직위의 장으로 조선의 도승지, 현대의 대통령비서실장 급이라 할 수 있었다. '지주사방'은 지주사의 사무실이었다.[8] 대사는 '큰 일'이란 뜻으로 당연히 왕을 시해하는 것을 의미한다.[9] 훗날 이성계가 제32대 우왕과 제33대 창왕을 죽인 것은 애초부터 고려를 멸망시킬 생각에서 한 짓이고, 그나마 우왕과 창왕을 왕씨가 아니면서 왕위를 찬탈한 역적이라는 명분을 만들었다. 사실 이마저도 두 왕이 죽으면 자기 자리는 공고해지고 욕은 이성계가 다 먹을 거라는 계산이 있던 공양왕이 자꾸 재촉해서 그런 거지 이성계 일파는 적어도 폐주 두 명을 그렇게 빨리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10]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11] 현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도.[12]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조선 제10대 연산군이 유배가서 1개월 만에 죽은 곳이기도 하고, 20세기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는 황막한 곳이었다.[13] 제19대 명종도 《고려사》에 없지만 <명종 애책문>에 '태상왕'으로 올려졌다고 기록되어 있다.[14] 사실 고종에게 있어서 희종은 친척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장인이었는데, 그의 아내인 안혜태후 유씨의 아버지가 바로 희종이었기 때문이다.[15] 또는 최전. 기록이 많이 엇갈리는 편이다.[16] 조선식으로 비유하자면 단종이 폐위되었다가 한명회와 사돈을 맺어서 한양으로 돌아온 거나 마찬가다. 그만큼 최충헌의 권력이 기형적이었던 것이다.[17] 다른 이름은 노인수. 《고려사》에 본인 <열전>이 있다. 본인 <열전>을 보면 알겠지만 일생을 노답으로 살다 간 인간이었다.[18] 《고려사》에 본인 <열전>이 있다. 본인 <열전>을 보면 알겠지만 희종 복귀 시도에 참가하지 않았고, 최우의 일방적인 오해였다.[19] 처음 이름은 최산보. 승려였다. <최우 열전>을 보면 알겠지만 점을 치는 땡중이었다.[20]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21]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최충헌의 권력이 강했다고는 하나 삼별초를 비롯한 수백명의 사병만 보유한 수준으로 지방의 무신들은 손도 대지 못했다. 몽골의 침략때 고려군이 많아봐야 고작 50,000명이 넘지 않는 몽골군을 상대로도 조직적인 저항을 일절 못하고, 강화도로 피난간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22] 사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긴 한데, 1180년 수안궁주가 아버지 명종과 5개월간 동거할 때 삼촌인 충희와 간통했으므로 실제로는 그의 자식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희종이 1181년생이므로 추정되는 그녀의 출생연도도 이에서 그다지 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23] 비슷한 신세인 강종비 사평왕후가 폐출 후 추존된 것을 고려했을 때, 그녀가 복권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폐비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재가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24] 왕의 친족.[25] 제후의 별칭.[26] 수직으로 삼공 직이다.[27] 검교직으로 '검교'는 명예직을 뜻한다. 태위는 삼공 중 하나로 가장 높다.[28] 태후에게 감사하는 표문.[29] 나머지 셋은 강화도에 묻힌 제22대 강종과 제23대 고종, 고양에 묻힌 제34대 공양왕이다. 이 중 강종의 '후릉'(厚陵)은 강화도에 있다는 기록만 남아있을 뿐 상세한 위치는 유실되었다. 다만 제32대 우왕과 제33대 창왕은 현재의 남한 영토에서 교살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시신 역시 남한 영토 내에 묻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최대 6명이다. 다만 조선시대 내내 이들은 고려 국왕 취급도 못 받았기 때문에 왕릉은 조성조차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