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이보익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2> '''{{{+1 이보익}}}'''[br] '''李寶益'''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리보익.jpg|width=100%]]}}} || ||<|2> '''출생''' ||[[1876년]] [[5월 31일]]|| ||[[조선]] [[평안도]] [[평양부]] 생이방(現 [[평양시]] [[사동구역]] 오류리)|| ||<|2> '''사망''' ||[[1959년]] [[10월 18일]] (향년 83세)[* [[위키백과]]에는 1958년으로 서술되어 있으나, 북한 측 자료에는 1959년으로 나온다.]|| ||[[북한]] [[평양시]]|| || '''가족''' ||남편 [[김보현(북한)|김보현]][br]아들 [[김형직]], 김형록[* 김형직 형제들 중 유일하게 해방때까지 생존해서 만경대로 돌아온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지만 이후로 딱히 고위직을 맡지는 않았고 사망년도도 미상이다. 다만 김형록의 장남인 [[김창주(1922)|김창주]]는 고위직을 맡았다.], [[김형권]][br]딸 김구일녀, 김형실, 김형복[br]며느리 [[강반석]][br]손자 '''[[김일성]]''', [[김철주(북한)|김철주]], [[김영주(북한)|김영주]], [[김창주(1922)|김창주]][* 김형록의 아들.], 김원주[* [[김형권]]의 아들.][br]증손자녀 '''[[김정일]]''', [[김만일(북한)|김만일]], [[김경희(1946)|김경희]], [[김평일]], [[김영일(북한)|김영일]], [[김현(북한)|김현]], 김백연[br]현손자녀 [[김정남(북한)|김정남]], 김설송, 김춘송,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br]내손자녀 [[김한솔]], [[김주애]]|| || '''종교''' ||[[개신교]] {{{-2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목차] [clearfix] == 개요 == [[북한]]의 농민이자 '''[[김일성]]의 할머니'''[* 김일성이 1912년생이니 '''36세'''에 할머니가 되었다.]이다. [[북한]]에서는 두음법칙 미적용에 따라 '리보익'이라고 부른다. == 생애 == 1876년 5월 31일, [[평안도]] [[평양부]] 생이방(現 [[평양시]] [[사동구역]] 오류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김보현(북한)|김보현]]과 혼인하여 슬하에 3남 3녀 (아들 김형직, 김형록, 김형권, 딸 김구일녀, 김형실, 김형복) 등을 두었다.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할머니 이보익에게 존경과 애틋한 마음을 담아 회고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투쟁을 하던 자신을 회유하여 체포하기 위해 일제는 할머니 이보익을 인질로 잡고 두 차례에 걸쳐 1년 반 동안 [[간도]] 일대를 끌고 다녔다고 한다. 엄동설한의 날씨에 고령 노인의 몸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녔을 할머니에게 김일성은 죄송한 마음이 크다고 적었다. [[파일:154770458776_20190118.jpg|width=60%]] 고향집에 돌아온 김일성과 상봉한 이보익. 해방 이후 조국에 돌아온 손자가 [[북한]] 정권을 수립하고 최고권력자로 등극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남편 김보현과 함께 [[만경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여생을 보내다가 1955년 남편 김보현의 임종을 본 후 1959년 10월 18일 세상을 떴다. [[파일:htm_2011122011628m260m261.jpg]] 손자 김일성, 증손자 [[김정일]]과 함께 찍은 사진. == 여담 == [[파일:118105_52918_3936.jpg]] 바느질하는 이보익의 사진. 당시 평균 수명이 50대였음을 감안하면, 83세로 장수한 편이다. 자신의 남편의 임종도 보았고, 심지어 장남인 [[김형직]]보다 33년,삼남인 [[김형권]]보다 26년을 더 살고 갔다. '''[[김일성|자신의 손자]]가 40살 중년의 나이에 [[6.25 전쟁|씻을 수 없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저지르고 그 책임을 [[남로당]]에게 돌려 숙청하는 모습까지 다 지켜보고 죽은 것이다.''' 사실 김일성이 권력을 잡은 시점에서는 김일성의 할머니라는 사실 외에는 특별한 점이 없었지만, 그 사실 하나만으로 현재까지 우상화되고 있다. 36세에 손주를 얻어 할머니가 되었으니 할머니로서의 시간이 47년인 것이다. 김일성의 어머니인 [[강반석]]과 함께 '''개신교 신자였다!''' [[안식일교]] 신자였다고 한다. 일제 치하 감옥에서 순교한 안식일교 지도자 [[최태현(목사)|최태현]] 목사의 막내아들인 재미교포 안식일교 장로 [[최희만]]의 증언에 따르면, 최희만은 일제강점기 당시 김일성의 숙부인 [[김형권]]의 아들 김원주와 함께 현재 평양 [[순안구역]]에 있는 안식일교 계통의 학교인 의명학교에 다녔는데, 김원주는 할머니 이보익과 함께 종종 칠골 안식일교회당을 다녔다고 한다. 현재 만경대 생가에는 남편과 함께 반신상이 세워져 있으며, 집 안에는 여러 사진들이 걸려 우상화되고 있다. 남편 김보현과 함께 김일성을 "일성아" 혹은 "성주야"라고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외에 사적으로는 [[김책]], [[최현(북한)|최현]], [[최용건]] 등뿐이었다. [[분류:1876년 출생]][[분류:1959년 사망]][[분류:평양시 출신 인물]][[분류:일제강점기의 개신교 신자]][[분류:북한의 개신교 신자]]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