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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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익
李寶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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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76년 5월 31일
조선 평안도 평양부 생이방(現 평양시 사동구역 오류리)
사망
1959년 10월 18일 (향년 83세)[1]
북한 평양시
가족
남편 김보현
아들 김형직, 김형록[2], 김형권
딸 김구일녀, 김형실, 김형복
며느리 강반석
손자 김일성, 김철주, 김영주, 김창주[3], 김원주[4]
증손자녀 김정일, 김만일, 김경희, 김평일, 김영일, 김현, 김백연
현손자녀 김정남, 김설송, 김춘송,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
내손자녀 김한솔, 김주애
종교
개신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북한의 농민이자 김일성의 할머니[5]이다. 북한에서는 두음법칙 미적용에 따라 '리보익'이라고 부른다.


2. 생애[편집]


1876년 5월 31일, 평안도 평양부 생이방(現 평양시 사동구역 오류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김보현과 혼인하여 슬하에 3남 3녀 (아들 김형직, 김형록, 김형권, 딸 김구일녀, 김형실, 김형복) 등을 두었다.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할머니 이보익에게 존경과 애틋한 마음을 담아 회고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투쟁을 하던 자신을 회유하여 체포하기 위해 일제는 할머니 이보익을 인질로 잡고 두 차례에 걸쳐 1년 반 동안 간도 일대를 끌고 다녔다고 한다. 엄동설한의 날씨에 고령 노인의 몸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녔을 할머니에게 김일성은 죄송한 마음이 크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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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에 돌아온 김일성과 상봉한 이보익.

해방 이후 조국에 돌아온 손자가 북한 정권을 수립하고 최고권력자로 등극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남편 김보현과 함께 만경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여생을 보내다가 1955년 남편 김보현의 임종을 본 후 1959년 10월 18일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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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김일성, 증손자 김정일과 함께 찍은 사진.


3.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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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하는 이보익의 사진.

당시 평균 수명이 50대였음을 감안하면, 83세로 장수한 편이다. 자신의 남편의 임종도 보았고, 심지어 장남인 김형직보다 33년,삼남인 김형권보다 26년을 더 살고 갔다. 자신의 손자가 40살 중년의 나이에 씻을 수 없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저지르고 그 책임을 남로당에게 돌려 숙청하는 모습까지 다 지켜보고 죽은 것이다. 사실 김일성이 권력을 잡은 시점에서는 김일성의 할머니라는 사실 외에는 특별한 점이 없었지만, 그 사실 하나만으로 현재까지 우상화되고 있다. 36세에 손주를 얻어 할머니가 되었으니 할머니로서의 시간이 47년인 것이다.

김일성의 어머니인 강반석과 함께 개신교 신자였다! 안식일교 신자였다고 한다. 일제 치하 감옥에서 순교한 안식일교 지도자 최태현 목사의 막내아들인 재미교포 안식일교 장로 최희만의 증언에 따르면, 최희만은 일제강점기 당시 김일성의 숙부인 김형권의 아들 김원주와 함께 현재 평양 순안구역에 있는 안식일교 계통의 학교인 의명학교에 다녔는데, 김원주는 할머니 이보익과 함께 종종 칠골 안식일교회당을 다녔다고 한다.

현재 만경대 생가에는 남편과 함께 반신상이 세워져 있으며, 집 안에는 여러 사진들이 걸려 우상화되고 있다.

남편 김보현과 함께 김일성을 "일성아" 혹은 "성주야"라고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외에 사적으로는 김책, 최현, 최용건 등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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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키백과에는 1958년으로 서술되어 있으나, 북한 측 자료에는 1959년으로 나온다.[2] 김형직 형제들 중 유일하게 해방때까지 생존해서 만경대로 돌아온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지만 이후로 딱히 고위직을 맡지는 않았고 사망년도도 미상이다. 다만 김형록의 장남인 김창주는 고위직을 맡았다.[3] 김형록의 아들.[4] 김형권의 아들.[5] 김일성이 1912년생이니 36세에 할머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