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이인직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3> '''[[신소설|{{{#Wheat 신소설 3대 작가}}}]]''' || || '''이인직''' || [[이해조]] || 최찬식 || [include(틀:한국의 현대문학)]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 0%, #000 20%, #000 80%, #000)" '''{{{+1 이인직}}}[br][ruby(李人稙, ruby=りじんしょく)]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인직.jpg|width=100%]]}}} || ||<|2> '''출생''' ||[[1862년]] [[7월 27일]] || ||[[경기도]] [[이천시|음죽현]] 동면 거물리[br](현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노탑2리 거머리마을)[* [[https://blog.daum.net/leejh5551/883|#]]] || ||<|2> '''사망''' ||[[1916년]] [[11월 1일]] (54세) || ||[[경기도]] [[경성부]] || || '''본관''' ||[[한산 이씨]][* 25세 직(稙) 항렬.] || || '''별칭''' ||[[아호|호(號)]] : 국초(菊初) || || '''주요 이력''' ||[[일본]] 관비 유학생[br][[일본제국 해군]] 통역[br]《국민신보》 주필[br][[대한제국 중추원]] 부찬의[br][[성균관|경학원]] 사성(司成) || || '''주요 저작''' || '''《[[혈의 누]]》, 《모란봉》[br]《[[은세계]]》, 《치악산》''' || [목차] [clearfix] == 생애 == [[조선]] 말기 ~ [[일제강점기]] 시절의 [[신소설]] 작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1862년]] [[7월 27일]] ~ [[1916년]] [[11월 1일]]. 호는 국초(菊初). [[경기도]] 음죽(陰竹)(현재의 장호원) 출생. [[8.15 광복|광복]] 이후 한국 [[국사]]와 [[국어]]교과서에서는 이인직을 최초의 신소설을 쓴 선각자로만 가르쳐왔고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침묵했지만 1990년대 국어교과서에서는 《[[혈의 누]]》를 기재하면서 작가 소개에 작품과 별개로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걸 서술하기도 했다. == 일생 == 1862년([[철종(조선)|철종]] 13년) 7월 27일에 경기도 음죽현 동면 거물리(현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노탑2리 거머리마을)의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 관비 유학생 시험에 합격해 [[도쿄]]정치학교의 청강생으로 입학한 1900년([[광무]] 4년) 이전까지의 행적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 유학 시절 우수한 성적을 기록해 [[러일전쟁]] 때 [[일본]] 해군의 [[한국어]] 통역관으로 종군하면서부터 출세길이 열린다. 전쟁 후 [[일본]] [[통감부]]의 추천으로 실세 [[이완용]]과 인연을 맺어 [[이완용]]의 통역관으로 들어간 것. 이 때부터 친일 행적이 시작됐다. 이후 [[이완용]]의 추천으로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보]]》의 주필을 맡게 되았고, 이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신소설]]의 집필에 들어갔다. 1906년(광무 10년) 《[[만세보]]》에 〈[[혈의 누]]〉 등 '''친일소설'''을 연재하고,[* 상편은 만세보에 연재하고 하편에 해당하는 모란봉은 1913년 2월부터 6월까지 63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되다가 미완성으로 끝났다.] 1908년([[융희]] 2년)에는 [[원각사]]라는 서양식 [[신파극]] 극장을 만들어 '''친일희곡''' 〈[[은세계]]〉를 상연했다. 이 공(?) 때문인지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부터 [[성균관]] 대사성직을 임명받아 죽기 전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러나 낭비가 심했는지 생활은 가난했다. 자전소설인 1912년 《빈선랑의 일미인》(가난한 조선 남자의 일본인 아내) 에서는 돈이 없어 사기를 쳐서 돈을 벌 목적으로 옛친구를 만나고 다니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즉 이인직은 일본식 저택을 지어서 살고 있었는데 이를 유지할 비용이 없었던 듯하다.] 1916년 11월에 신경병으로 사망했다. 언제 입교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본의 신종교인 [[천리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1916년에 사망했을 때에도 천리교 예법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 유학 == 작품 내적으로 주인공의 [[미국]] 유학 부분은 "화성돈([[워싱턴 D.C.|워싱턴]]의 [[음역]])에서 선진 사상을 공부하고 귀국했다." 한 마디로 대충 넘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이해조]]의 작품을 비롯해 당시 신소설 대부분의 작품에서 유학을 가는 장면은 이런 식으로 묘사된다.[* 이해조의 《구의 산》, 《춘외춘》, 《화의 혈》, 최찬식의 《안의 성》 등. 당시 유학 장면이 나오는 신소설 치고 그 세부 행적을 자세히 묘사하는 작품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유학이라는 개념은 선진국에 갔으니 당연히 선진 문물을 배워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돌아온다는 지극히 단편적이고 단순한 사고였고, 따라서 유학해서 배우는 신학문의 실체와 그 구체적인 실천 과정은 생각하지 못했다. 이는 일반 대중은 물론이고, 당시 집필하던 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즉, 신소설에서의 유학이라는 것은 일종의 수사적 장치처럼 행위의 구조 속에 끼워넣은 것이다.[* 《한국현대문학사 1》, 권영민, 2002, 민음사, p.137.] 고전 소설에서 광대, 왕, 사또, 포도대장이 그 이름에서 기대되는 역할을 작중에서 맡듯이. 사실 이런 부분은 근대소설인 [[이광수(소설가)|이광수]]도 마찬가지라서, [[무정(소설)|무정]]에서도 유학이 이런 식으로 다이제스트 처리된다. [[분류:이천시 출신 인물]][[분류:한산 이씨]][[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1862년 출생]][[분류:1916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