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응 (r6판)

편집일시 :


1. 정의[편집]


서명응(1716∼1787)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2. 내용[편집]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대구 서씨 시조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https://open.kakao.com/o/gBQB1q6c
===생애===
본관은 대구(大邱). 자는 군수(君受). 보만재(保晩齋)라는 호를 정조로부터 내려 받았다. 판서 서성(徐渻)의 5세손이고, 남원부사 서정리(徐貞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찬 서문유(徐文裕)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서종옥(徐宗玉)이며, 어머니는 이집(李㙫)의 딸이다.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의 형이다.


3. 가족[편집]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공.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큰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문한(徐文翰 현감)
************* 큰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
************* 큰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
************* 큰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섭(徐涉. 판서공파(判書公派)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문간(徐文幹 현감)
************* 큰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근중(徐近中, 감찰공파(監察公派)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문덕(徐文德 현감)
************ 큰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습(徐漝)
************ 큰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환(徐渙)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의(徐義 정3품 호조전서)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미성(徐彌性 정3품 목사(牧使))
************* 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거광(徐居廣 언양현감)
************** 고고고고고조아버지:서팽소(徐彭召 사헌부장령)
*************** 큰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후(徐厚 대사간(大司諫) 정3품)
*************** 큰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구(徐久)
*************** 큰고고조할아버지:서포(徐包 증참판(贈參判)
*************** 고고고고조할아버지:서고(徐固 예조참의(禮曹參議)
**************** 고고고조할아버지:서해(徐嶰 학자)
***************** 고고조아버지:서성(徐渻 판중추부사 종1품)
****************** 큰고조할아버지:서경우(徐景雨 우의정 정1품)
****************** 큰고조할아버지:서경수(徐景需 전첨)
****************** 크고조할아버지:서경빈(徐景霦 현감)
****************** 고조할아버지:서경주(徐景霌 달성위 선조부마)
******************* 증조조할아버지 : 서정리(徐貞履 부사)
******************** 할아버지: 서문유(徐文裕 부사)
********************* 아버지: 서종옥(徐宗玉 이조판서 정2품)
********************** 형:서명익(徐命翼 이조판서 정2품)
*********************** 아들양자: 서호수(徐浩修 이조판서 정2품)
************************ 손자: 서유구(徐有榘 대제학 정2품)
********************** 본인: 서명응 (徐命膺 대제학 정2품)
********************** 동생: 서명선 (徐命善 영의정 정1품)
******************* 작은증조조할아버지 : 서정리(徐正履 좌랑)
******************* 작은증조조할아버지 : 서진리(徐晉履 직장)
**************** 작은고고조할아버지:서엄(徐崦)
************* 작은고고고고고고조아버지: 서거정 (徐居正 좌찬성 종1품)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3.1. 활동사항[편집]


1754년(영조 30)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부제학(副提學)·이조판서를 거친 뒤, 청나라 연경(燕京)에 사행하여 다녀왔다. 그 뒤 대제학을 거쳐 상신(相臣: 정승)에 오르고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박학강기(博學强記)로 이름났으며 역학(易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정조가 동궁에 있을 때 빈객(賓客)으로 초치되어 학문 수련에 큰 도움을 주었다. 정조 즉위 직후 규장각이 세워졌을 때 제학(提學)에 첫번째로 임명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규장각 운영에 절대적인 찬획(贊劃: 영향)을 끼쳤다.


3.2. 학문[편집]


흔히 북학파(北學派)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며,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추구하는 학문 정신은 아들 서호수(徐浩修), 손자 서유구(徐有榘)에로 이어져 가학(家學)의 전통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3.3. 악보 편찬[편집]


조선후기 방대한 분량의 악서를 남겼다. 영조 때 『동국문헌비고』의 악고(樂考)를 지었다. 1759년(영조 35) 당시 왕명으로 진행된 악보 편찬사업을 주관하였으며, 장악원(掌樂院)의 악사들과 함께 세종·세조 때의 궁중음악의 악곡들을 수집·정리하여 [[대악전보 |
『대악전보』]]와 『대악후보』를 편찬했다. 영조(1724~1776) 때 그는 홍계희(洪啓禧)와 함께 궁중의식을 위한 악장집인 『국조악장』(國朝樂章)을 편찬하였다. 정조대의 『시악화성』(詩樂和聲)· 『국조시악』(國朝詩樂)· 『악통』(樂通)과 같은 음악이론서는 모두 서명응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저술한 악서(樂書)이다. 정조가 악학에 조예가 깊었고, 또한 학문의 여러 분야에 정통한 것은 모두 동궁시절 스승이었던 서명응의 영향에 기인한다.


3.4. 생애[편집]


본관은 대구. 자는 군수(君受). 보만재(保晩齋)라는 호를 정조로부터 내려 받았다. 판서 서성(徐渻)의 5세손이고, 남원부사 서정리(徐貞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찬 서문유(徐文裕)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서종옥 (徐宗玉)이며, 어머니는 이집(李㙫)의 딸이다. 영의정 서명선 (徐命善)의 형이다.


3.5. 활동사항[편집]


1754년(영조 30)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부제학(副提學)·이조판서를 거친 뒤, 청나라 연경(燕京)에 사행하여 다녀왔다. 그 뒤 대제학을 거쳐 상신(相臣: 정승)에 오르고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박학강기(博學强記)로 이름났으며 역학(易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정조가 동궁에 있을 때 빈객(賓客)으로 초치되어 학문 수련에 큰 도움을 주었다. 정조 즉위 직후 규장각이 세워졌을 때 제학(提學)에 첫번째로 임명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규장각 운영에 절대적인 찬획(贊劃: 영향)을 끼쳤다.
흔히 북학파(北學派)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며,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추구하는 학문 정신은 아들 서호수(徐浩修), 손자 서유구(徐有榘)에로 이어져 가학(家學)의 전통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3.6. 악보 편찬[편집]


1759년(영조 35) 당시 왕명으로 진행된 악보 편찬사업을 주관하였으며, 장악원(掌樂院)의 악사들과 함께 세종·세조 때의 궁중음악의 악곡들을 수집·정리하여 [[대악전보 |
『대악전보』]]와 『대악후보』를 편찬했다. 『대악전보』는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 때 없어졌다. 7권 7책의 『대악후보』에는 세조 때의 악곡들이 전한다. 영조(1724~1776) 때 그는 홍계희(洪啓禧)와 함께 궁중의식을 위한 악장집인 『국조악장』(國朝樂章)을 편찬하였다.

조선후기 방대한 분량의 악서를 남겼고, 이미 영조 때 『동국문헌비고』의 악고(樂考)를 지었다. 정조대의 『시악화성』(詩樂和聲)· 『국조시악』(國朝詩樂)· 『악통』(樂通)과 같은 음악이론서는 모두 서명응이 정조의 명을 받들어 저술한 악서(樂書)이다. 정조가 악학에 조예가 깊었고, 또한 학문의 여러 분야에 정통한 것은 모두 동궁시절 스승이었던 서명응의 영향에 기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