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멤미우스(기원전 111년 호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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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멤미우스
라틴어: Gaius Memmius

생몰년도
미상 ~ 기원전 100년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지위
노빌레스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가이우스 멤미우스(아버지)
루키우스 멤미우스(형제)
직업
로마 공화정 호민관, 법무관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로마 공화국 호민관, 법무관. 유구르타 전쟁유구르타로부터 뇌물을 받아먹은 파트리키들을 공격해 정계에서 매장시켰다. 기원전 100년 12월 집정관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일당이 일으킨 폭동에 휘말려 살해당했다.


2. 생애[편집]


기원전 3세기부터 쿠르수스 호노룸을 역임했지만 집정관에는 이르지 못한 노빌레스 가문인 멤미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역사가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는 그가 "나는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자유를 사용할 것이다."라고 밝혔다고 기술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그의 아버지 가이우스 멤미우스도 호민관으로서 플레브스의 수호자라는 명성을 떨쳤다고 추정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누만티아 전쟁 당시 로마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대대장 '가이우스 멤미우스'가 화려하지만 실용이 없는 장식품으로 치장한 요리 도구를 소장하고 다니는 것을 보고 "당신은 나와 국가에 부적합한 자다."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 인물이 기원전 111년 호민관과 동일인물이라고 추정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근거없는 이야기로 간주한다.

기원전 111년 호민관에 선임된 그는 마침 유구르타 전쟁에 민심이 격양되자 이를 이용해 명성을 드높이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유구르타가 왕위를 놓고 경쟁하던 아드헤르발을 키르타 시에 포위하자, 아드헤르발은 로마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로마에서 파견된 사절단이 중재하려 했지만, 그는 사절들이 아드헤르발과 접촉하는 걸 막았고, 그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아챙긴 사절단은 그냥 돌아갔다. 결국 1년간의 공성전 끝에, 로마인과 이탈리아인 상인들이 아드헤르발에게 목숨을 부지하는 대가로 항복을 제안하라고 요구했다. 아드헤르발은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여 그에게 협상을 제안했고, 그는 기꺼이 수락하겠다고 전했다. 그러나 정작 성문을 열고 나오는 아드헤르발을 체포한 뒤 잔혹하게 죽여버렸고, 키르타에 살던 로마인과 이탈리아인 상인들마저 학살했다.

키르타 학살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로마 민중은 매우 분노했다. 그는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아 사태를 무마하려는 귀족들의 실상을 폭로해 이러한 여론을 더욱 키웠다. 이후 유구르타를 무찌르기 위해 아프리카로 파견된 집정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가 30마리가 넘는 코끼리와 상당한 양의 금화를 받고 유구르타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고 선언하고 로마로 귀환하자, 멤미우스는 베스티아가 유구르타에게 매수되었다고 규탄했다. 원로원은 진상 조사를 위해 법무관 루키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특사로 보냈다.

유구르타는 카시우스의 조언에 따라 로마로 와서 재판을 받기로 했다. 재판 분위기는 유구르타에게 지극히 적대적이어서, 유구르타가 유죄 판결을 받을 게 분명해 보였다. 그는 이 재판에서 유구르타를 신랄하게 공격해 민중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유구르타가 처음 발언하려는 순간, 호민관 가이우스 베비우스가 거부권을 행사했다. 시민들은 그가 유구르타에게 매수되었다는 걸 눈치채고 격렬한 야유를 퍼부었지만, 재판은 그대로 무산되었다. 그 후 유구르타는 유유히 본국으로 돌아갔다.

기원전 110년,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휘하의 로마군이 유구르타를 토벌하려 시도했으나, 유구르타가 싸움에 응하지 않으면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 집정관 선거가 다가오자, 그는 선거를 주관하기 위해 로마로 향하면서 군대를 동생 아울루스에게 맡겼다. 아울루스는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적이 있었기에 나중에 이 사실이 고발될까 걱정하다가 공적을 세워 만회해야겠다고 판단하고 유구르타가 보물을 보관해뒀던 수흘 마을을 공격했다.

그러나 유구르타의 첩자들이 사전에 이러한 적의 움직임을 간파했고, 그는 군단병들을 매수해 숲으로 유인했다. 그 후 누미디아군이 로마군을 포위했을 때, 리구리아와 트라키아 출신의 기병대가 적에게 매수되어 탈주했다. 누미디아군의 뒤이은 공세로 막심한 피해가 속출하자, 이제 싸워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아울루스는 항복했다. 유구르타는 패배한 지휘관과 병사들이 멍에 아래로 지나가게 한 뒤 2주 안에 누미디아에서 떠나라고 명령했다. 로마군이 그런 굴욕을 당하고 쫓겨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인들은 극심한 분노에 휩싸였다.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자들을 색출하기 위한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를 통해 수많은 로마 귀족들이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당했다. 이때 그도 위원회의 일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기원전 102년 이전의 모종의 사기에 법무관을 역임했으며, 마케도니아 총독을 뒤따라 맡았다. 이후 로마로 귀환했다가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와 함께 마르쿠스 그라티디우스에게 속주민 착취 혐의로 고발되었다. 기소측 증인으로는 당시에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 중 한 명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도 있었다. 하지만 그와 핌브리아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기원전 100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의 뒤를 이어 2등으로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사전에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밀약을 맺고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글라우키아를 집정관에 선출하려 했던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일당이 반발해 폭동을 일으켰다. 안토니우스는 가까스로 빠져나왔지만, 그는 피살당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몽둥이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 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를 때려죽였다고 한다. 모든 고대 기록은 사투르니누스가 암살을 사주했다고 주장했지만, 일부 학자들은 또다른 집정관 경쟁자인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가 암살을 사주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집정관 당선자가 피살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자, 원로원은 즉시 사투르니누스와 글라우키아를 암살의 배후로 규정하고 원로원 최종 결의(Senatus Consultum Multatum)을 통해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 뒤,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이들을 토벌하여 국가를 구할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마리우스는 동맹 세력인 사투르니누스를 버리느냐, 로마 정부를 상대로 반역을 일으키느냐를 놓고 고심한 끝에 원로원의 최종 권고에 순종하여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과 사투르니누스 타도를 목표로 똘똘 뭉친 귀족 무리를 무장시킨 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공격하여 토벌했다. 그렇게 사투르니누스를 죽음으로 내몬 마리우스는 원로원으로부터 국가를 구한 영웅이란 찬사를 받았지만, 이후에는 민중의 외면을 받고 동맹시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은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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