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글라우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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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글라우키아
라틴어: Gaius Servilius Glaucia

생몰년도
미상 ~ 기원전 100년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지위
파트리키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세르빌리우스 글라우키아(아버지?)
직업
로마 공화정 호민관, 법무관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로마 공화국 호민관, 법무관.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의 지지자로서 급진 정책에 힘을 보탰지만 기원전 100년 집정관 당선자 가이우스 멤미우스 피살 사건에 연루되어 사투르니누스와 함께 원로원에게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혀 살해되었다.


2. 생애[편집]


파트리키 가문인 세르빌리우스 씨족의 일원이지만, 글라우키아 지파는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단지 기원전 162년 원로원이 셀레우코스 제국과 협상하기 위해 소아시아에 파견한 사절단의 일원인 '세르빌리우스 글라우키아'(프라이노멘은 전해지지 않는다)만 기록에 전해질 뿐이다. 미국의 성직자이자 역사가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는 이 인물이 기원전 100년 법무관 글라우키아의 아버지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가 자유민 중 가장 낮은 신분이었다고 주장했지만, 글라우키아를 '국가를 혼란에 빠뜨린 비천한 자'로 몰아붙이기 위해 과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캐나다의 고전학자이자 라틴 문헌학자인 토머스 로버트 세넌 브로튼과 섬너는 그가 기원전 109년에 재무관을 역임했고, 기원전 108년에 감찰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에부르누스과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게타에 의해 원로원 의원으로 뽑혔을 거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102년 감찰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는 지난해에 호민관으로서 자신에게 정치 공세를 퍼부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에게 반감을 품고 호민관 임기가 만료된 사투르니누스와 그의 동맹자인 글라우키아를 원로원에서 축출하려 했다. 하지만 두 번째 감찰관인 가이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카프라리우스가 반대하자 결국 포기했다.

많은 고대 사료에서는 기원전 2세기 말에 반포된 <사법권에 관한 세르빌리우스 법(lex Servilia de repetundis)>을 언급한다. 이 법률은 원로원 계급과 에퀴테스 사이의 사법권의 부분적 재분배를 정했다. 다수의 학자들은 이 법을 통과시킨 인물은 어느 시점에 호민관을 맡은 글라우키아였을 거라 추정한다. 프리드리히 뮌처는 그가 기원전 111년 호민관 가이우스 멤미우스 이전에 호민관을 맡았을 거라 추정하며, 로버트 브로튼 등은 기원전 101년에 맡았을 거라 추정한다.

그는 기원전 101년 말 호민관 선거 때 사투르니누스가 호민관에 또다시 당선되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했다고 전해진다. 또다른 후보인 아울루스 노니우스는 사투르니누스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밝혔다가 선거 전날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아피아노스는 노니우스가 선거에서 승리한 후 사망했다고 기술했지만, 선거 전에 사망했다는 다른 기록과 불일치하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한편, 글라우키아는 기원전 100년 법무관에 당선되었다.

그가 법무관을 맡은 당시 로마 정계 내부의 투쟁은 극도로 심각해졌다. 사누르니누스와 글라우키아는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와의 동맹에 의존해 로마 빈민들에게 나눠주는 빵의 가격을 대폭 인하하고 시칠리아, 아카이아, 마케도니아, 갈리아 등지에 식민도시들을 건설하고 이탈리아 각지의 토지를 마리우스의 퇴역병들에게 분배하는 정책을 정적들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통과시켰다. 그 후 두 사람은 원로원에 민회에서 통과된 모든 법안을 지키겠다고 맹세하지 않으면 20달란트의 벌금을 부과하고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모든 원로원 의원은 새 법을 지지하겠다고 밝혔지만,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만은 끝까지 거부했다. 이에 사투르니누스는 원로원 의사당에서 메텔루스를 몰아내기 위해 관원들을 보냈다. 메텔루스를 추종하는 이들이 들고 일어나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메텔루스를 끌어내지 못하자, 사투르니누스는 민회에서 메텔루스 때문에 아무도 땅을 받지 못할 거라고 선동했다. 또한 글라우키아는 메텔루스를 추방하기 위한 법률을 준비했다. 결국 메텔루스는 스스로 로마를 떠나기로 했다. 사투르니누스는 이렇게 승리를 거듭했지만 귀족들의 증오를 샀고, 호민관의 급진 정책에 두려움을 느낀 많은 민중과 에퀴테스 역시 그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사투르니누스는 자신이 추진한 법안을 공고히하려면 기원전 99년 호민관 선거에서 또다시 당선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려면 마리우스의 지원이 필요했다. 마리우스는 기원전 99년 집정관 선거에서 불출마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글라우키아를 집정관으로 세우고자 했다. 기원전 180년에 제정된 빌리우스 아니니우스 법에는 법무관을 맡은 자가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려면 최소 3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지만, 사투르니누스와 글라우키아는 이를 무시하고 마리우스의 뜻에 따라 집정관 선거에 돌입했다.

그러나 글라우키아는 기원전 100년 12월 10일 집정관 선거에서 낙선했고, 또다른 후보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와 가이우스 멤미우스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사투르니누스 지지자들이 반발해 폭동을 일으켰다. 안토니우스는 가까스로 빠져나왔지만, 멤미우스는 피살되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몽둥이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 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를 때려죽였다고 한다. 모든 고대 기록은 사투르니누스가 암살을 사주했다고 주장했지만, 일부 학자들은 또다른 집정관 경쟁자인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가 암살을 사주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집정관 당선자가 피살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자, 원로원은 즉시 사투르니누스와 글라우키아를 암살의 배후로 규정하고 원로원 최종 결의(Senatus Consultum Multatum)을 통해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 뒤,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이들을 토벌하여 국가를 구할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마리우스는 동맹 세력인 사투르니누스를 버리느냐, 로마 정부를 상대로 반역을 일으키느냐를 놓고 고심한 끝에 원로원의 최종 권고에 순종하여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과 사투르니누스 타도를 목표로 똘똘 뭉친 귀족 무리를 무장시킨 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공격하여 토벌했다.

글라우키아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마리우스의 설득을 받아들여 항복한 뒤 큐리아 회랑으로 이송되었다가 지붕에 올라간 반대파 민중이 내던진 타일에 가격당해 목이 부러져 죽었다고 한다. 플로루스에 따르면, 큐리아를 습격한 군중에 의해 사투르니누스와 함께 곤봉을 얻어맞고 사망했다고 한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그는 클라우디우스라는 사람의 집에 피신했다가 곧 끌려나와 군중에게 짓밟혀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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