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토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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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스웨덴군
3.2. 프로이센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편집]


7년 전쟁 시기인 1758년 11월 18일 독일 구스토우 마을 근처에서 프로이센군과 스웨덴군이 맞붙은 전투. 프로이센군이 승리했다.

2. 배경[편집]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스웨덴은 중립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프랑스-오스트리아-러시아의 연맹이 프로이센을 상대로 우세를 점하자, 스웨덴은 과거 대북방전쟁 때 프로이센에게 빼앗긴 포메른 지을 되찾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1757년 3월 21일, 스웨덴은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함께 독일의 자유를 보장하는 군사 행동을 벌이기로 합의했다. 프랑스는 스웨덴에게 재정 지원을 약속했고, 스웨덴은 이에 따라 2만 가량의 병력을 독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1757년 9월 13일, 스웨덴군은 포메른을 전격 침공했고 9월 22일에 프로이센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당시 스웨덴군은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병력 수와 물자 모두 부족했으며 병사들의 훈련 상태도 엉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포메른 지역의 몇몇 마을을 점거했을 뿐 더이상 남하하지 않았다.

1758년 9월 말, 스웨덴군은 자신들을 포메른 지방에서 몰아내려는 프로이센군과 토르노프 전투, 페흐벨린 전투를 치러 적보다 훨씬 많은 희생을 기록했지만 자신들의 위치를 고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스웨덴군은 적의 추가 공세를 피해 스트랄순트로 후퇴했다가 전염병이 돌면서 많은 손실을 입었다. 이후 1758년 11월, 라인홀트 요한 폰 링겐 장군은 본국으로부터 구스토우 마을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고 출격한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스웨덴군[편집]


  • 사령관: 라인홀트 요한 폰 링겐
  • 병력: 보병 1,100명, 기병 500명, 대포 4문.

3.2. 프로이센군[편집]


  • 사령관: 알 수 없음.
  • 병력: 보병 수백명, 기병 400명, 대포 1문.

4. 전투 경과[편집]


1758년 11월 18일, 달라나스 보병대와 메이젤펠트 척탄병 부대를 선두에 내세운 스웨덴 보병대와 대포 2문이 구스토우 마을로 들어섰다. 여기에 스웨덴 기병대는 후방에 대기하면서 적 기병대가 역습할 것을 대비했고 대포 2문도 예비로 보유했다. 마을에는 높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교회가 있었다. 프로이센 척탄병들은 이 돌담에 배치되어 스웨덴군에게 총탄을 퍼부었고 마을 곳곳에 배치된 프로이센군도 집집마다 숨어서 적을 공격했다. 스웨덴 보병 예비대는 지원을 위해 마을에 보내졌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스웨덴군 포병대가 포격을 가했으나 프로이센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얼마 후, 프로이센 후사르 기병대와 드래곤 분대가 적 보병대를 향해 돌격했다. 이에 스웨덴 병사들은 허겁지겁 후퇴했고, 스웨덴 기병대는 뒤늦게 투입되었으나 적 기병대의 압도적인 전투력을 이기지 못하고 보병대 뒤로 피신했다. 이에 스웨덴 포병대가 산탄포를 발포하고 스웨덴 보병대가 일제 사격을 가했고, 프로이센 기병대는 몇몇 사상자를 기록한 뒤 철수했다. 이리하여 구스토우 전투는 스웨덴군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5. 결과[편집]


구스토우 전투에서 양측이 입은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스웨덴군이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분명하며, 지휘관 링겐 장군 역시 큰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이후 스웨덴군은 1758년이 끝날 때까지 별다른 공세를 벌이지 않았고 프로이센 역시 러시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집중하느라 이들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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