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방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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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방전쟁의 여러 전투들


1. 개요
2. 배경
3. 전쟁의 전개
3.1. 스웨덴의 초전에서의 승리와 나르바 전투
3.2.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역
3.4. 오스만 제국의 참전과 반스웨덴 동맹의 재결성
3.5. 전쟁의 후반기와 칼 12세의 전사
4. 전쟁의 결과
5. 여담
6. 같이 보기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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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1709년까지의 전개도1709~1721년까지의 전개도

1700년에서 1721년까지 루스 차르국스웨덴발트해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다.

표트르 1세 휘하의 루스 차르국은 발트해 진출을 숙원으로 삼아 당시 발트해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던 스웨덴을 겨냥해 덴마크, 작센[1]과 반스웨덴 동맹인 소위 북방동맹에 가입하였다.

전쟁은 동맹군이 스웨덴을 선제공격함으로 1700년에 시작하였으며, 전쟁이 길어짐에 따라 여러 정치외교적 상황으로 인해 여러 정치세력이 참가하거나 탈퇴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작센 동군연합, 덴마크, 영국-하노버 선제후국 동군연합, 프로이센 왕국, 오스만 제국, 우크라이나 자포로제 카자크,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이 참가하는등 동맹도 여러번 바뀌었다.

뉘스타드 조약, 스톡홀름 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1721년 종전되었다. 전쟁의 결과로 스웨덴 제국은 몰락의 시발점이 되었고, 루스 차르국은 러시아 제국으로 승격을 선언하며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전쟁사에서 가지는 의의중 하나는 러시아 본토로 진격, 잘 밀고 들어가다 동장군과 물량에 밀려 대패하고, 결국 역으로 털리면서 제국마저 무너진 첫 사례라 할 수 있다.


2. 배경[편집]



30년 전쟁 및 수 차례의 북방전쟁 결과 스웨덴은 발트해 연안의 리보니아, 포어포메른[2], 브레멘 등을 비롯한 북독일 지역을 상당부분 장악하여 북유럽의 맹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또한 루스 차르국의 대공위시기인 혼란 시대에 개입하여 러시아의 유일한 발트해로의 출구인 잉그리아 지역도 장악한 상태였다. 때문에 루스 차르국은 어떻게든 이 지역을 탈환하여 발트해로서의 진출을 모색하였지만 대홍수 당시 칼 10세 구스타브가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덴마크로 기수를 돌렸을 때 알렉세이 1세가 리보니아 침공을 감행했으나 스웨덴 지방 방위군도 뚫지 못한채 망신만 당했던 전력이 있었다. 알렉세이 1세 사후 두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젊고 야심만만한 개혁군주 표트르 1세는 서구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부동항의 확보와 서구로의 진출을 위해 군사력을 신장시키고 있었다.

한편 스웨덴에서도 검술에 능하고 무골이었던 젊고 야심만만한 군주인 칼 12세칼 11세의 뒤를 이어 1697년 약관 15살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어리다고 얕보지 말라는 듯 부국강병을 꾀하며 군사력을 정비하고 있었다.

시기 적절하게 서유럽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해 동유럽북유럽으로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고, 대홍수에 버금갈 정도로 동유럽은 물론 유럽 전역의 판도를 뒤흔들만큼 중요한 전쟁이었던 이 전쟁은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아무도 개입할 수 없었다.


3. 전쟁의 전개[편집]



3.1. 스웨덴의 초전에서의 승리와 나르바 전투[편집]


루스 차르국과 작센, 덴마크 동맹군은 1700년 일제히 스웨덴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또한 처음엔 주저하던 폴란드-리투아니아도 결국 지원병을 보내 사방팔방에서 스웨덴을 압박했다. 러시아군은 잉그리아와 핀란드로 침공해들어갔으며 덴마크군은 스코네, 작센-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리보니아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칼 12세는 당황하지 않고 7만명의 병력을 모았으며 핀란드 방면의 스웨덴군이 러시아 공세에 버틸동안 가까운 덴마크부터 제압하기로 결정하였다. 1700년 8월 영국 해군의 도움을 얻어 코펜하겐 북부에 상륙한 칼 12세의 대부대는 순식간에 덴마크 군대를 패퇴시키고 코펜하겐을 포위하였다. 이에 덴마크 왕 프레데리크 4세는 평화조약을 맺고 동맹에서 탈퇴하였다. 이후 칼 12세는 발트해를 가로질러 에스토니아 패르누에 상륙, 눈과 비를 맞으며 강행군을 해서 러시아의 공세에서 버티고 있던 지역 스웨덴군과 합류하였다.

이후 11월 양 군대는 나르바에서 일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스웨덴군은 약 10,500명에 대포 37문,[3] 지휘는 칼 12세가 직접 하고 있었다. 반면 러시아군은 3만 7천명 정도에 대포는 195문. 총지휘관은 표트르 1세였지만, 국내 정치 문제로 자리를 비우고 러시아군 총사령관 압테몬 골로빈은 외무 장관이기도 해서 표트르 1세와 함께 떠난지라, 전투 당일에는 군사 고문인 샤를 외젠 드 크루아 공작이[4] 지휘하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비록 숫자는 적었지만 강도높게 훈련되어 있던 스웨덴군과 칼 12세는 눈보라가 치는 날씨를 잘 이용하여 부대의 기동을 은폐해 성공적인 기습 공격을 가한다. 크루아가 스웨덴군이 가까이 다가온 걸 발견했을 때 정찰대를 내보내려 했지만 러시아 장교들이 외국인 명령 듣기 싫다고 뻗대서 실패했다고. 졸지에 기습을 당한 러시아군은 나르바 성을 포위하던 모습 그대로, 즉 남북으로 긴 횡대 대형으로 이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동안 구축한 포위진지가 오히려 그들의 기동에 방해가 되었다. 스웨덴 군은 우선 북쪽과 중앙 사이를 공격해 러시아군의 중앙과 우익을 양분시킨다. 더군다나 눈보라가 스웨덴군의 배후에서 러시아군을 향해 불어오고 있어, 스웨덴군의 공격은 도와주고 러시아군의 공격은 방해했다. 북쪽, 즉 우익에 있던 근위연대는 표트르 1세가 신경써서 양성한 정예부대였기에, 그나마 수레로 임시 방벽을 쌓고 처절하게 항전했고 일부 병사들도 이들에게 합류했다. 하지만 이들을 제외한, 중앙과 좌익의 러시아 부대들은 실질적인 총사령부였던 우익과 연결이 끊어지자 지휘체계가 무너지면서 붕괴했다. 러시아군이 포위하고 있던 나르바는 그 이름의 유래가 된 나르바 강변에 조성된 도시였으므로 러시아 군은 앞에는 스웨덴군을 맞이하고, 뒤로는 역시 스웨덴군이 주둔한 성채도시와 강물을 등지게 되었다. 탈출하기 위해서는 정면의 스웨덴 군을 뚫고 나가거나 북쪽에 있는 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결국 다리가 몰려든 러시아 병사들의 무게를 못 견디고 무너지면서 퇴로도 끊겨버렸다. 명목상의 사령관이었던 크루아는 퇴로가 끊긴데다가 통제 불능이 된 병사들을 보고 절망해 항복했다. 북쪽에서 방벽을 만들고 저항하던 부대들은 대포들이 포위해 오자 장교들만 포로가 되고 병사들은 개인 무기를 지닌채 후퇴한다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그나마 남쪽에서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 전력을 보존하고 있던 바이데 장군의 사단은 다음 날 동이 터오면서 남은 아군 부대가 없는것을 확인하자 항복했다. 스웨덴 기병들은 그날 내내 돌아다니며 흩어져 있던 러시아 병사들을 포로로 잡아왔다. 이렇게 러시아군은 전멸했다. 러시아군은 최소 8천여명이 전사하고[5] 2만여명이 포로로 잡혔고, 스웨덴군은 장교 30 여명, 병사 6백여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러시아군의 모든 연대기와 대포, 수만정의 머스킷 등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했다.

이것이 바로 나르바 전투로 칼 12세 최대의 영광이자 표트르 1세 최대의 위기였다. 전투에서 압승을 거둔 칼 12세는 러시아군 패잔병을 계속 추격하여 패퇴시키기보다는 거슬렸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치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돌려 남진하였다. 이에 표트르 1세는 간신히 숨통을 돌릴 수 있었고 급히 군사력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만약 여기서 칼 12세가 표트르 1세와 유리한 평화협상을 했다면 스웨덴은 후방을 안정시키고 폴란드-리투아니아를 갈아마시며 무난하게 스웨덴의 전성기를 이어갔을 테지만 혈기왕성한 젊은 왕은 여기서 만족하지 못했다.


3.2.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역[편집]


한편 나르바에서 러시아군이 대패하고 스웨덴군이 물밀듯이 폴란드-리투아니아로 처들어오자 연방의 의회였던 세임은 당황하였다. 작센 선제후면서 폴란드왕에 선출된 아우구스트 2세가 리보니아를 되찾자고 주장할때 반대하였지만 결국 국왕이 강행하자 좋은게 좋은거라고 지원을 하던 상황에서 이렇게 갑자기 전개가 불리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작센군과 폴란드군이 연합해서 스웨덴군과 맞서 싸웠지만 전황은 계속 불리해져만 갔다.

스웨덴이 연방을 침공하기 전 다우가바 강을 건너야했는데 아우구스트 2세 혼자만의 그럴싸한 계획이라도 있었는지 폴란드의 정예병은 아무도 향하고 있지 않은 곳을 외롭게 방어하게 지시했다. 이 뻘짓을 하는 동안 스웨덴은 순조롭게 정예병이 빠진 다우가바 강을 도하하려고 하는데 칼 12세의 전략으로 허수아비로 가득찬 가짜 배부터 띄워 연합군의 포탄을 허비시키고 뭐에 씌여서 겁을 상실한건지 총사령관인 칼 12세가 가장 선두에서(!) 스웨덴 최정예 부대를 이끌며 상륙하였다. 뻘짓으로 인해 정예병이 없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고 이걸 보고 모랄빵이 나버린 러시아 지원군은 총알 한발 못쏴보고 빤쓰런했다. 이 때 스웨덴군은 여기서 승리한게 크게 작용하였는데 칼 12세는 연방을 침공할때 보급품을 안들고왔다. 싸워서 적의 보급품을 빼앗아서 진격하자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였지만 진짜로 실현됐다.(...) 성공하면 곽거병 실패하면 초식동물 작센-폴란드 연합군과 러시아 지원군을 갈아마시고 보급품까지 빼앗아 겨울나기가 대단히 수월해진 소년왕 칼 12세는 어린 아이답게 장교들과 눈싸움을 하며 적진 한가운데에서 여유롭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현자타임이 온것인지 멀쩡한 창문을 깨부숴서 극한의 추위를 안방에서 느낄려는 기행을 저지르며 지나치게 안락함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한다. 그리고 겨울이 끝나자 칼 12세는 미친듯이 행군하여 연방의 수도 바르샤바로 진격했다.

1702년 클리슈프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작센-폴란드 연합군은 패퇴하였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초토화되었으며 연방의 양대 도시인 바르샤바와 크라쿠프까지 포위될 정도로 수세에 몰렸다. 스웨덴군은 연방 북부를 휩쓸면서 무차별적인 파괴와 약탈을 자행하였다. 다급해진 세임은 칼 12세에게 협상을 요청했고 칼 12세는 평화 수용을 조건으로 아우구스트 2세를 폐위하고 새 국왕을 선출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1704년 친스웨덴파 귀족들이 장악한 세임은 친스웨덴파 귀족인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를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선출하였다. 쫓겨난 아우구스트 2세는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과 함께 내전을 벌였으나 스웨덴군은 아우구스트 2세를 박살내고 급기야 1705년에는 아우구스트 2세의 원래 영지인 작센까지 쳐들어갔으며 결국 1706년 알트란슈테트 조약으로 폴란드 왕위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후 친스웨덴파가 장악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편을 갈아타고 1709년까지 스웨덴 편에서 싸우게 되었다.


3.3. 루스 차르국의 반격과 폴타바 전투(1709)[편집]


한편 나르바에서 대패한 표트르 1세의 러시아군은 칼 12세가 연방에서 싸우고 있는 틈을 타서 잉그리아 지역을 점령했고 표트르 1세가 세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해군력을 증강하고 군사력을 재정비하는데 성공하였다.[6] 칼 12세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벨라루스 일대를 가로질러 러시아 중부의 스몰렌스크를 공략하였으나 러시아의 초토화전술[7]과 강력한 방어에 휘말려 제대로 공략은 성공 못하고 군사력만 낭비하였다. 이에 방향을 돌려 우크라이나로 남하했는데 당시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헤트만인 이반 마제파가 칼 12세를 적극 지원하여 루스 차르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일제히 봉기하였다. 허나 레스나야 전투에서 스웨덴 별동대가 러시아군에 패배하면서 보급이 끊겼고 카자크 근거지가 제압당하면서 일부 카자크는 마제파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고 루스 차르국에 충성을 다짐했다. 따라서 마제파가 약속했던 2만이 넘는 지원군은 5~7천 밖에 오지 않았다. 그렇게 서서히 러시아의 우주방어에 지쳐가던 스웨덴군에게 혹독한 겨울의 추위는 더더욱 상황을 악화시켰다.

이 와중에 1708년 말에서 1709년 초에 찾아온 엄청난 대한파로 인해 양측은 한동안 전투를 치르지 못 하고 전황이 지체되었던데다, 슬슬 공세종말점에 봉착해버려서 표트르 1세가 풀도 태워서 초식 동물조차 못 될거같아 시간이 촉박해진 스웨덴-카자크 연합군은 결전을 위해 1709년 폴타바를 포위하였고 이에 표트르 1세는 자신이 직접 이끄는 정예병을 이끌고 우크라이나 폴타바로 진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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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타바를 지켜보고 있는 칼 12세와 이반 마제파

칼 12세는 전투전에 저격을 당해 다리를 다친 상황이었다. 따라서 1709년 7월 8일 벌어진 폴타바 전투는 그의 장군들이 도맡아 지휘하였다. 표트르 대제는 그간 키워낸 병력을 총동원한 상태였으며 스웨덴보다 전력이 훨씬 강성한 상황이었다. 결국 폴타바 수비군과 함께 스웨덴군을 오히려 역포위해버렸고 스웨덴군은 지휘의 연계성이 떨어저 우왕좌왕 하였다. 칼 12세는 포위군 북쪽을 돌파하려 하였으며 러시아군이 이를 막으려 하였다.

전투초기에는 치열한 접전끝에 스웨덴군이 잠시 유리한 상황이 있었으나 미리 구축한 야전진지에서 표트르 1세가 차분하게 방어한 결과 스웨덴의 공세는 둔화되어 버렸다. 이후 러시아군이 반격을 가해 좌우익의 기병대로 스웨덴군의 측면을 공략하였다. 좌-우익의 스웨덴 기병대와 전열이 붕괴해버리자 중앙도 사실상 버티지 못하고 패주해 스웨덴-카자크 연합군은 궤멸해버렸다.

러시아에서 제작한 대북방전쟁 - 폴타바 전투 영화 <군주의 하인>의 한 장면.[8]


3.4. 오스만 제국의 참전과 반스웨덴 동맹의 재결성[편집]


우크라이나에서 대패한 칼 12세와 이반 마제파는 패주한 병력을 데리고 남쪽으로 도주하여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하였다. 생뚱맞게 북유럽의 국왕의 도착을 환영한 오스만 제국의 아흐메트 3세는 이 기회를 틈타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려 하였다.

칼 12세도 계속 오스만 제국이 루스 차르국을 공격하길 청원했으며 결국 북방과 남방에서 싸우던 러시아군은 1711년 프루트 강 전투에서 표트르 1세가 친정한 러시아군이 오스만군에게 패배하자 한발 물러나 1714년경 아조프를 오스만 제국에 돌려주는 조건으로 병력을 온전히 보존한 채 물러날 수 있었다.

한편 폴타바에서 칼 12세가 대패하고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일시 붕괴했던 반 스웨덴 동맹이 재결성 되었다. 우선 작센의 아우구스트 2세가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를 내쫒아버리고 다시 폴란드 국왕에 복위하여 스웨덴과의 전쟁을 재개하였고 덴마크도 다시 스웨덴에 선전포고하고 공세를 강화하였다.

뿐만 아니라 스웨덴의 약세가 확인되자 북독일 지역의 스웨덴 영토와 포메른을 노리고 프로이센 왕국이 동맹군에 가담하여 참전하였으며 거기다 더해 영국-하노버 동군연합마저 반스웨덴 동맹에 가담하여 브레멘과 홀슈타인 일대를 공략하였다. 당시 브레멘은 스웨덴령이었는데 하노버는 내륙지였기 때문에 영국과 연결되는 해안영토를 얻고자 하였다.


3.5. 전쟁의 후반기와 칼 12세의 전사[편집]


러시아와 역사 깊은 앙숙 오스만 제국에 머물고 있던 칼 12세는 망명 초창기엔 러시아에 맞선 동료로 환영받았으나 이후 체류 비용 문제와 정치적인 상황에 휘말려서 예니체리의 공격을 받아 사실상 유폐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그는 예상 외로 오스만 제국과 루스 차르국이 빠르게 휴전해버리자, 계속 술탄에게 러시아를 더 적극적으로 공격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저 멀리 떨어진 발트해의 스웨덴을 위해 러시아와 병력을 갈아가며 대치를 하는 것도 손해였고, 결국 이런 요청을 귀찮게 여긴 술탄은 결국 그를 무시해버렸다. 이후 오스만 제국 황실에 친스웨덴 세력을 심어 두려고 획책하다가 걸리고 자신과 부하들의 주둔비용이 오스만 제국 재정에 부담을 주면서 점점 칼 12세는 술탄의 마음에 안들게 되었다. 얹혀사는 설움 한편 그의 측근이 막대한 빚을 지자 상인들과 연계되어 있던 예니체리가 쳐들어와서 소규모 충돌을 일으킨 끝에 칼 12세는 찍 소리도 못하고 오스만에서 갇혀 지냈다.

결국 오스만 제국과 스웨덴과의 협상 끝에 풀려나와 급히 육로로 스웨덴으로 복귀하였으나 그가 갇혀있던 시기에 이미 전세는 결정적으로 기울어 1710년 표트르 1세는 에스토니아 레발(Reval)과 핀란드 카리알라 비푸리(Viipuri)를 점령하였다. 1714년 표트르 1세의 신생 러시아 제국 해군 발트함대스웨덴 해군의 소규모 분견대를 공격하려 시도하였고, 이로 인해 핀란드의 항코 반도에서 최초로 러시아 해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러시아군은 1713년에서 1714년 핀란드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1714년 오스트로보트니아(Ostrobothnia)의 이소퀴뢰(Isokyrö)에서 벌어진 나푸에 전투에서 최종적인 격돌이 이루어졌다. 1714년에서 1721년간의 핀란드 정복기간은 거대한 분노[9]로 알려져 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정복 기간동안 많은 핀란드인이 살해당하거나 러시아로 끌려갔다.

1715년경에는 이미 포메른, 슈테틴을 비롯한 북독일 지역의 스웨덴 영토도 모조리 다 뺏겼고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등 발트해 연안 영토 역시 루스 차르국의 영토로 넘어갔다. 그나마 이렇게 버틴것도 호른 백작을 비롯한 유능한 스웨덴 장관들 덕분이었다.

한편 스웨덴을 떠난지 14년만에 복귀한 칼 12세는 1716년 덴마크령이던 노르웨이 크리스티아니아로 병력을 모아 공격을 가했으나 이미 철저히 대비한 방어군의 수비에 밀려 제대로 공격도 못해보고 철수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치지 않고 다시 반격을 가해 오늘날 노르웨이 할덴주인 프레드릭스텐을 포위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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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12세의 시신을 매고 철수하는 스웨덴군. 1884년 구스타프 세데르스트룀 작.

그러나 1718년 포위 상황을 순시하던 중 유탄에 맞아 전사함으로서 그 파란만장한 생을 마무리 짓고 말았다. 국왕이 전사하자 스웨덴군은 전면 철수 했다. 이때 눈보라 때문에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스웨덴에서는 이를 카롤리너 죽음의 행군이라 부른다.

칼 12세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후계자도 없었기 때문에 왕위는 조카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와 여동생인 울리카 엘레오노라에게 넘어갔다. 2년후 남성 계승원칙에 의해 그녀의 남편인 프레드리크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후 전투는 교착상황이었으나 스웨덴은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소규모 국지전을 계속 감행하고 있었다. 그렌감 전투에서 승전하여 스톡홀름으로 진격하던 러시아군은 막아냈으나 제해권은 이미 러시아 해군에 잡혀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최후로 덴마크와 러시아 연합 해군의 스웨덴 본토에 대한 강력한 해상 공격이 이루어졌으며 스웨덴의 해안도시들은 불바다가 되고 말았다.


4. 전쟁의 결과[편집]


결국 버티지 못한 스웨덴은 전쟁을 포기하고 1721년 뉘스타드(Nystad)[10]에서 루스 차르국과 스웨덴 사이에 뉘스타드 조약이 최종적으로 이루어졌다. 스웨덴은 핀란드를 돌려받는 대신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 잉그리아, 카렐리아 등 발트해 동부의 영토를 200만 탈러에 매각했다. 그리하여 루스 차르국은 마침내 부동항 발트해 진출의 숙원을 이룩하고 동유럽의 강대국으로 등장, 이후 이 패권에 힘입어 러시아 제국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서구화와 이 전쟁을 통해 먼 동유럽 외곽에서 발트해 일대를 기점으로 유럽 주류 강대국들 사이에 마침내 '등장'한[11] 러시아는 유럽 대륙의 판도를 크게 뒤흔들어 놓을 국가가 되었다.

루스 차르국이 조약을 맺기 전 스웨덴과 스톡홀름 조약으로 강화조약을 맺은 프로이센 왕국은 스웨덴의 슈테틴과 포메른의 일부분을 비롯한 독일 영토를 획득하였다. 영국-하노버 동군연합은 브레멘 일부 지역을 할양 받았다. 대신 그 대가로 1719년 이후 스웨덴편을 들어 해군을 보내 러시아 해군에 압박을 주었다.

하노버 선제후국은 스웨덴의 브레멘-베르덴 영지를 획득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얻은 영토는 없었지만 아우구스트 2세의 왕위가 완전히 인정되었다. 덴마크는 막대한 배상금을 받고 홀슈타인이 일부 차지하고 있던 슐레스비히의 완전한 영유권을 얻은 뒤 홀슈타인과 스웨덴의 동맹을 파기시켰다. 다만 덴마크가 점령하고 있던 나머지 포메른은 스웨덴에 반환 되었다.

이와 같은 스웨덴의 압도적인 패배결과는 스웨덴 제국의 종말의 시작점이었으며 쥐고 있던 북유럽의 패권 역시 소멸하였다. 또 스웨덴의 반러 감정을 부채질시켜 1741년의 스웨덴-러시아 전쟁을 유발시켰으나 그 전쟁도 역시 스웨덴의 패배로 끝났고 오히려 퀴메네 강[12] 동쪽의 영토를 추가로 할양해 향후 러시아의 침공으로부터 핀란드를 지키기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1788년 구스타브 3세가 러시아군 주력 대부분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동원된 틈을 타 선전포고를 했으나 실익을 얻지 못한채 무승부로 끝났고 이후 스웨덴은 대불동맹에 가담하여 반나폴레옹 편에 섰다가 대패한 뒤 포어포메른을 빼앗기고, 1808년 나폴레옹과 일시 동맹이었던 러시아에게 핀란드마저 완전히 빼앗김으로서 30년 전쟁 이래 공세로 일관하던 발트해 정책과 대유럽 정책을 완전히 폐기하고 수세로 전환하였다.[13]


5. 여담[편집]


유튜버 Extra Credits에서 대북방 전쟁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한 시리즈가 있다.

핀란드가 주요한 전장이 되었는데 전쟁중 양국의 샌드위치가 된 후 얻어터진 핀인들은 스웨덴과 러시아 양국을 모두를 한 동안 싫어했다. 이후 나폴레옹이 북유럽의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대륙봉쇄령에 러시아가 참여한 후 핀란드 전쟁을 일으켜 핀란드의 지배자는 향후 100년간 러시아로 바뀐다. 100년간 민족주의를 탄압받던 핀란드는 러시아가 1차 대전에서 얻어터진 후 독립하게 된다.

아무튼 지금도 스웨덴 사람들에겐 아쉬움이 무척 많이 남는 전쟁이고 러시아에는 영광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는 전쟁이다.

블라디미르 푸틴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얻은 땅을 대북방전쟁에서 얻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비교하며 자신이 표트르 대제와 비슷한 일을 하며 원래 차지해야 했을 영토를 얻는 것일 뿐이라고 정당화하였다.


6. 같이 보기[편집]




7. 둘러보기[편집]











[1]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폴란드 국왕 아우구스트 2세로 선출된 상황이었으며 스웨덴령 리보니아의 수복을 노렸다.[2] 현재 폴란드 슈체친독일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에 속한 포메른 지역.[3] 이에 더해 나르바의 수비군은 약 1,800명에 대포 297문이였다고 한다.[4] 러시아 사람이 아니다. 크루아 가문은 부르고뉴에서 시작된 신성 로마 제국의 공작 가문. 샤를 외젠 드 크루아는 스페인계 네덜란드인이었다. 이외에도 당시 러시아군에는 외국인 장교가 많았다.[5] 전투 직후에는 집계된 사상자 총합이 8천여명 이였지만, 추운 날씨 탓에 부상자들이 많이 죽었다.[6] 나르바 전투에서 잃은 수백 문의 대포와 수만 정의 머스킷을 메꾸기 위해서 러시아 전역의 교회에 설치된 종의 1/3을 뜯어다 녹여 대포를 만들고, 상인과 교회에서 고율의 세금을 뜯어내 머스킷 수만 정을 수입해 왔다.[7] 표트르 1세가 한달 내내 자국을 불태우는 미친 짓을 했다.[8] 2007년 작으로 러시아 애국주의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간 영화긴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볼 수 있다.[9] 핀란드어: isoviha[10] 현 핀란드 우시카우풍키(Uusikaupunki).[11] 실제로 대홍수 및 대북방전쟁 이전까지 서유럽에서는 러시아를 유럽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아시아 내지는 그냥 러시아라고 취급하는 인상이 강했다. 그러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립과 함께 시작된 서구화와 대북방전쟁의 승리로 인해 러시아는 무시할래야 할 수 없는 동유럽의 패자가 된 것이었다.[12] 현재 핀란드 퀴미 강[13] 물론 나중에 스웨덴 국왕에 오른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가 덴마크를 두들겨패서 노르웨이를 강탈하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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