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이제는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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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73년에 김민기가 김지하의 연극 금관의 예수에 쓰일 노래들의 작곡을 도우면서 창작한 곡.
2. 창작 계기[편집]
1971년, 박정희의 긴급조치에 의해 운동권이 자주 열창했던 아침 이슬을 비롯한 김민기의 모든 음반, 앨범에 방송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그런 그의 앞에 홀연히 김지하가 나타났고, 그는 김민기를 도우며, 때로는 야학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후 김민기는 스스로 김지하로 하여금 "내겐 친형 이상이었다", "나에겐 한글의 생동성을 깨우쳐 준 사람"라고 묘사할 정도로 친해졌는데, 이후 2년 뒤인 1973년에 김민기가 김지하의 연극 금관의 예수에 쓰일 노래들의 작곡을 도우면서 창작된 곡이 바로 이 곡이다.[1] 이러한 행적을 통해 김민기는 연극, 희곡에 대한 가르침을 얻게 되고, 5년 뒤 노동 운동계에 길이 남을 명작과 그 후 다시 몇 년 뒤에는 대한민국 최다 상연 뮤지컬을 제작하게 된다.
3. 금관의 예수의 의미[편집]
천주교에서 금관의 예수는 예수에 대한 최대한의 영광을 나타내는 수식어이다. 물론 후술할 가사를 보면 알겠지만 이는 반어법이고, 이 노래에서의 '금관의 예수'는 '얼어붙은 벌판', '가난의 거리'의 '우리'가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며, 예수에 대한 원망이 섞인 말이다.[2] 다만, 그렇다고 종교 자체를 비판하는 내용보다는 일부 종교인들의 가식적인 행태를 비판하는 내용에 가깝다. 실제로 이런 의미로 양희은, 윤종신 등 여러 기독교 신자인 가수들이 부르기도 했다. 따라서 종교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보는게 맞다. 때문에 제목만 보고 이 노래가 찬송가인줄 알았던 이들은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와 예수를 원망하는 가사를 보고 이상함을 느끼는 경우도 더러 있다. 당장 유튜브의 금관의 예수 댓글을 봐도 찬송가인줄 알았는데 들어보고서 아니란걸 느끼게 된 사람이나, 노래를 듣고도 찬송가가 아니란걸 못 느껴서 예수를 찬양하는 이들도 몇 있다. 사실 본래 연극의 의도 등을 생각해보면 예수보다도 예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종교인들을 원망하는 것에 가까우니 이런 관점에서 감상하는게 맞다.
다시 말해 제목은 신적인 존재를 담고 있으나, 역설적이게도 가사는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이야기이다. 가난과 폭력에 시달린 그 시절의 사람들과, 가수의 삶이 살얼음판 그 자체였던 김민기의 삶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이야기.
4. 가사[편집]
기울임체 처리된 부분은 아이들이 부르는 부분. 볼드체 처리된 부분은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김민기가 무덤덤하게 말하는 부분. 혼자 부를 때는 이를 할 수 없어 볼드체 친 부분 없이 부른다. 대표적으로 양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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