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42년 로마군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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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기원전 342년, 카푸아에 주둔한 로마군이 카푸아를 자기들 통제하에 두려고 반란을 꾀한 사건.


2. 상세[편집]


기원전 342년 로마군 반란은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로마 역사>에 상세하게 서술되었으며,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의 <고대 로마사>와 아피아노스의 <역사>에도 단편적이나마 실려 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343년 로마군이 가우루스 산 전투수에술라 전투에서 삼니움인들을 격파하고 캄파니아에서 몰아낸 뒤, 카푸아 시민들은 로마에 겨울 동안 삼니움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수비대를 배치해달라고 요청했다.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이고 집정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에게 카푸아 수비를 맡을 병사를 뽑게 했다. 발레리우스는 로마에 돌아가지 않고 카푸아에 남아서 봉급을 받기를 원하는 이들을 선발해 수비대를 조직했다. 이들 대부분은 집이나 토지가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빚더미에 허덕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카푸아 시민들이 풍족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들이 도시의 주인이 되어서 그 부를 가로채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원전 342년 집정관에 선출된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는 캄파니아에 주둔한 군대의 임페리움을 맡았지만, 병사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하지만 당장 진압하려 했다간 캄파니아에 주둔한 군대 전체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했다. 일단 내년에도 같은 겨울 숙영지를 가질 것이라는 소문을 퍼트려서 병사들을 안심시킨 뒤, 병사들이 여름 숙영에 들어갔을 때 주모자로 의심되는 자들을 부상 등 각종 이유로 제대시키고 다른 병사들을 여기저기로 이동시킴으로써 딴 마음을 품지 못하게 만들려 했다.

그러나 병사들 사이에서 음모를 주동한 이들이 잇따라 제대 조치를 받은 것에 대한 불안감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대한 병사들이 곧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형될 거라고 의심했고, 자신들 역시 언젠가는 음모에 동참한 혐의로 처벌받을까 걱정했다. 급기야 테라키나에 주둔한 코호트가 루틸루스에 의해 제대 조치를 받고 귀향하던 병사들을 가로막고 반란을 선동했다. 디오니시오스와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들은 삼니움 포로들도 끌여들었다고 한다. 그 결과 2만에 달하는 이들이 반란에 동참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들은 알바 롱가 언덕 아래로 이동한 뒤 누구를 지도자로 삼을 지를 논의한 끝에 근처 별장에 살고 있던 티투스 퀸크티우스를 지도자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이 인물은 군사 경력이 뛰어난 편이었지만 전쟁 중 중상을 입어 한쪽 다리를 절단한 뒤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반란군은 그를 강제로 집밖으로 끌어낸 뒤 지도자로 세웠다. 그 후 반란군이 로마로 진격하자, 원로원은 발레리우스를 독재관에 세우고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 프리베르나스를 기병장관으로 선출해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기세좋게 진격하던 반란군은 막상 토벌대가 다가오자 같은 로마인끼리 피를 보는 것을 꺼렸다. 그들이 협상을 요구하자, 발레리우스가 그들 앞으로 나아가서 작년에 자신과 함께 삼니움인들을 두 번 물리친 것을 상기하라고 호소했다. 여기에 억지로 반란군 지도자가 된 티투스 퀸크티우스가 자신이 책임질 테니 동족을 해치지 말고 말로 해결하자고 요구했다. 반란군은 그렇게 하기로 했고, 퀸크티우스는 반란군을 처벌하지 말고 자비를 베풀 것을 호소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아피아노스는 티투스 퀸크티우스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며, 독재관으로 선출된 이는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마메르쿠스가 아니라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라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알반 산에서 반란군과 대치한 발레리우스는 반란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을 꺼렸고, 숙영지를 세운 뒤 반란군의 의중을 살펴보기로 했다. 이후 두 군대의 병사들이 서로 만나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반란군 장병들은 로마에서 심각한 빚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반란에 가담했다고 밝혔다. 발레리우스는 원로원에 모든 로마인에 대한 부채를 탕감해주고 반란자들을 사면해달라고 요청해 승인을 받았고, 반란군은 이내 무기를 내려놓고 로마로 돌아갔다고 한다.

리비우스는 일부 전기 작가들이 언급한 다른 이야기도 소개한다. 이에 따르면, 반란은 로마 자체에서 벌어졌으며, 기원전 379년 집정 무관 가이우스 만리우스가 반란군 지도자가 되어 도시에서 4마일 떨어진 언덕에서 농성하기 위해 행진했다. 집정관이 다른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저지했는데, 양측 병사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을 맞잡고 껴안는 등 싸울 마음이 일절 없다는 것을 보여주자 원로원에 화해를 제안해 관철시켰다고 한다. 이후 리비우스의 설명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군인 명단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성한 법(Lex Sacrata)'이 통과되었으며, 트리부누스 밀리툼(tribunus militum)은 켄투리오가 될 수 없다는 법도 통과되었다고 밝혔다.

현대 학자들은 기록이 매우 혼란스럽고 앞뒤가 맞지 않은 내용이 많아서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평가한다. 일부 학자들은 반란 자체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단지 '신성한 법'이 통과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반란 자체가 있었을 가능성은 인정하면서도 반란군과 토벌군이 서로 화해하고 원로원이 흔쾌히 받아들였다는 등의 이야기는 리비우스 등 후대 작가들이 윤색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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