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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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베스트팀
파일:K리그1 로고.svg

1983 · 1985 · 1986



대한민국의 축구인


파일:빈 가로 이미지.svg

이름
김용세
金鏞世 | Kim Yong-Se
출생
1960년 4월 21일 (64세)
경기도 파주시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신체
192cm
학력
파주연풍초 - 파주중 - 중동고
포지션
공격수, 센터백[1]
소속팀
한국전력 축구단 (1979)
육군 축구단 (1980~1982)
유공 코끼리 (1983~1988)
일화 천마 (1989~1991)
국가대표
파일: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8경기 4골 (대한민국 / 1984~1989)

1. 개요
2. 선수 시절
2.1. 클럽 경력
2.2. 국가대표 경력



1. 개요[편집]


김용세는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이다.

2. 선수 시절[편집]



2.1. 클럽 경력[편집]


파주 연풍초 4학년에 축구를 시작해 파주중을 졸업한 후 중동고로 진학하기 위해 중동중에서 1년 간 유급했다고 한다. 중동고를 졸업한 후 여러 대학 팀들의 스카웃 제의가 왔지만, 어려운 가정환경 덕에 80년대에 드물게 고졸 출신 선수가 됐다.

1979년 한국전력 축구단에 입단해 1년 간 뛰며 청소년 대표팀에 소집됐고, 1979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는 경험을 갖게 됐다. 이후 육군 축구단에 입대해 1982년 제대와 동시에 신생 구단인 유공 코끼리 축구단에 입단하며 프로 선수가 됐다.

리그 원년인 1983년부터 1988년까지 6 시즌 동안 유공에서 주전 공격수로 뛰었다. 입단 동기인 황석근, 김창호 그리고 대학 최고 스트라이커였던 노인호, 은행 최고 골잡이 이상용 등 쟁쟁한 경쟁자들 속에서 주전으로 뛰었고, 2년 차에 28경기 14골로 백종철최순호에 이은 리그 득점 3위, 3년 차엔 피아퐁과 12골로 득점 동률이었으나, 출전 시간이 21경기로 더 많아 득점왕을 놓쳤고, 4년 차엔 월드컵 차출에도 불구하고 13경기 6골 7도움을 기록하는 등, 리그 정상급 공격수로 등극했다.

월드컵 이후 1987년 슬럼프를 겪었고, 이듬해에는 코칭스태프와 불화, 연봉 삭감 등 팀과 갈등을 겪으며 재계약을 거부했다. 이후 FA로 신생 팀인 일화 천마로 이적, K리그 최초의 FA 이적 선수가 됐다.

1989년 신생 팀인 일화 천마에서 주장을 맡아 첫 해 21경기 6골, 이듬해 24경기 7골-1도움을 기록하며 신생 구단의 상승세를 이끌었다. 하지만, 박종환 감독의 훈련 방식이 잘못됐다고 대들다가, 주전에서 밀렸고, 결국 1991년에 이른 은퇴를 하고 말았다.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84, 85 국내리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에 출전하였다. 차범근이 차출됐고, 아르헨티나의 장신 공격수를 견제하기 위해 변칙적으로 수비수로 기용되어 활약하였다.

[1] 상대 장신 공격수를 막기 위해 대표팀에서 변칙적으로 기용되었던 포지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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