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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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서(胤緖)
본관
영양 남씨[1]
출생
1892년 1월 23일[2]
경상도 영해도호부 오서면 삼계동
(현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삼계리)
사망
1974년 10월 5일[3]
경상북도 영덕군
묘소
경상북도 영덕군 온정면 조금리 우물골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남만기는 1892년 1월 23일 경상도 영해도호부 오서면 삼계동(현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삼계리)에서 아버지 남병희(南秉熙)와 어머니 진성 이씨 이만규(李晩圭)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숙부 남학희(南學熙)에 입양되었다.[4]

그는 1919년 3월 19일 신기동 구장 이현설(李鉉卨)과 이수각(李壽珏)·이현우(李鉉祐)·권재형 등이 주도한 창수면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고, 오후 4시경 창수 경찰주재소에 이르러 군중과 함께 주재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기물과 서류를 파기한 후 객사 및 주임순사 타카기 이사부로(高木伊三郞)의 숙소와 소유물 등을 파괴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3개월 동안 미결수 상태로 고문을 당하다가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영덕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4년 10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남만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 회령공파(會寧公派) 15대손 만(萬) 항렬. 영양 남씨 23세.[2] 음력 1891년 12월 24일.[3] 남씨대동보 5권 밀직공파(영양 본관)-회령공파 43쪽에는 11월 22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4] 양부 남학희는 본래 생부 남병희의 친동생이나, 남병희가 5촌 당숙인 남수악(南壽岳)에게 입양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6촌지간으로 멀어졌고, 남만기에게도 남병희는 족보상으로 7촌 재종숙(再從叔)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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