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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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1. 그로턴 고지 전투
2.1.2. 영국군의 파괴
2.2. 19세기의 번영
2.4. 잠수함 기지



1. 개요[편집]


New London

미국 코네티컷주의 도시. 주도 하트퍼드에서 동남쪽으로 60km, 뉴헤이븐에서 동쪽으로 50km 떨어진 템즈 (세임스) 강의 하구에 위치한다.[1] 메사추세츠 주와도 가까워 그 주도인 프로비던스는 동북쪽으로 70km 거리이다. 보스턴이나 필라델피아에 버금갈 정도로 미국의 유서깊은 도시들 중 하나로, 미국 독립 전쟁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미국사에 종종 등장한다. 항만 일대의 다운타운에는 높은 첨탑을 지닌 교회들을 비롯하여 옛 건물들이 많다.

19세기에는 고래잡이 (포경) 산업의 거점, 18-20세기에는 해군 및 잠수함 기지로써 중시되었다. 다만 근래에 들어서는 그 모든 기능을 상실하고 인구 2만 7천의 소도시로 남아있다. 교통 시설로 1848년에 세워진 뉴런던역과 동쪽 그러턴의, 2개의 활주로를 갖춘 그로턴-뉴런던 공항이 있다. 교육 시설로는 시가지 북쪽 외곽에 코네티컷 칼리지 및 해안경비대사관학교, 남쪽에 미첼 칼리지가 있다.

2.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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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타운의 근대 역사 거리 (좌측 건물은 시청사[2]다)

본래 미국 원주민 중에 피쿼트[3] 부족이 거주하던 곳으로, 원주민 언어로 '나메우그'라 불렸다. 1646년 존 윈트로프가 이끄는 영국인 이주민들이 유입되어 코네티컷의 13번째 정착촌을 세웠다. 주민들은 마을을 기존의 나메우그 (Nameaug) 혹은 피쿼트 (Pequot)라 불렀는데, 1650년대 들어 본국의 런던을 따서 '런던'으로 명명하려 하였다. 하지만 코네티컷 주의회가 페어리 하버 (Faire Harbour)를 지명으로 강력히 권고하자, 주민들은 크게 반발하며 런던으로 명명할 수 없다면 차라리 원주민들의 지명인 나메우그라 부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주민들의 반발에 승복한 주의회는 뉴런던 지명을 승인하였다. (1658년) 롱아일랜드 지협 최고의 심해항인 뉴런던은 코네티컷의 주요 항구 중 하나로 발전하였다.

2.1. 미국 독립전쟁[편집]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뉴런던은 1775년 창설된 미국 해군의 주요 기지 중 하나였다. 다만 당시에는 늘 그랬듯이 정식 해군이라기 보다는 '해적'에 가까운 형태였고, 순화하여 사략선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어쨋든 당시의 미해군 거점들 중 최대 규모인 4백 - 8백인의 해적 내지는 해군이 배치되었고, 그들은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영국 전함들을 직접 공격하기 보다 원정군의 식량과 물자를 실은 보급선들을 주로 습격하였다.

1781년 뉴런던의 사략선들은, 독립전쟁 도중 미해군의 최대 전리품인 거대한 보급선 한나를 나포하는 쾌거를 올렸다. 그동안 무시해오던 미해군에 일격을 당한 영국군은 즉각 보복에 나서 코네티컷 출신의 변절자 베네딕트 아놀드 휘하의 1천 7백 병력을 파병하였다. 영국군 수뇌부에 있어 뉴런던 및 그로턴 공격은 또한 주력군을 이끌고 버지니아로 남하하던 조지 워싱턴과 로샹보 후작의 시선을 돌리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2.1.1. 그로턴 고지 전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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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런던의 세임스 강 맞은편에 위치한 그리스올드 요새

당시 뉴런던은 미해군의 군사 거점이자 보급 기지였고, 영국군은 도시의 초토화를 목적으로 삼았다. 그해 9월 뉴런던-그로턴에 다다른 영국군과 헤센 용병대는 병력을 양분하여 주력군은 템즈 강 동안의 그리스올드 요새, 나머지는 서안의 트럼불 요새와 시가지를 공격하였다. 트럼불 요새는 손쉽게 함락되었지만, 뉴런던-그로턴 지역의 방어 중심지인 그리스올드 요새에 배치된 중령 윌리엄 레드야드 휘하의 수비대는 강력히 저항하였다. 뉴런던 인근 노리치 출신으로, 일대의 지리를 잘 알던 베네딕트 아놀드는 해안 포대의 포격을 피할 수 있는 경로로 함대를 인도하였다.

따라서 별 피해 없이 상륙에 성공한 800여 영국군은 곧바로 요새를 공격하였다. 150인의 코네티컷 민병대로 구성된 수비대는 5배가 넘는 병력 차에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저항했지만, 성벽이 돌파되자 항복하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격렬한 저항에 50인에 달하는 전사자 및 150인의 부상자가 난 것에 분노한 베네닉트 아놀드는 레드야드 중령을 포함한 수비대 중 상당수를 그대로 공격하게 하여 학살하였다. 전투 결과 수비대 중 83명이 전사하고 39명이 중상을 입은 채로 포로가 되었다. 후일 요새 내에는 당시의 전사자들을 기념하는 오벨리스크가 세워졌다.

2.1.2. 영국군의 파괴[편집]


그리스올드 및 트럼불 요새의 함락 후 영국군은 뉴런던 시가지로 진입하였다. 소수의 민병대가 저항했지만, 6인의 전사자 및 24인의 부상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비슷한 규모의 피해를 입은 영국군은 시가지 및 (미처 상류로 피하지 못한) 선박들을 철저히 약탈한 후 방화하였고, 이로써 한세기 이상 이어지던 도시는 전소되고 말았다. 코네티컷 당국 추산 50만 달러의 재산 피해가 났고, 100가구 이상이 집을 잃었으며 9개의 관광서 건물이 파괴되었다. 미국 측에 심각한 피해를 야기한 뉴런던-그로턴 전투는 미국 독립 전쟁에 있어 북부 (뉴잉글랜드)에서 벌어진 최후의 전투 중 하나이자, 영국군의 마지막 승전 중 하나였다. 비록 3주 후의 요크타운 전투에 밀려 묻히긴 했지만, 뉴런던-그로턴 전투는 코네티컷 민병대의 영웅적인 저항으로 기록되었다.

1784년 1월, 파리 조약의 비준과 함께 열린 코네티컷 주의회에서 뉴런던은 이웃한 뉴헤이븐과 함께 (코네티컷 내에서) 처음으로 미국으로의 병합이 선포된 두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독립전쟁 이후로도 뉴헤이븐은 계속해서 미해군 기지로 유지되었고, 1812년 미영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전함들을 파괴하기 위한 어뢰정들이 배치되었다. 이들은 영국 해군의 주력함인 HMS 라말리즈가 인근에 정박하자 격침을 시도하였다. 이에 함장 할디는 '잔인하고 전대미문의' 어뢰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면 항구 일대의 가옥들을 전부 파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번에는 미국 측이 경고에 순응했기에 뉴런던은 2번째로 파괴당하는 일을 겪지는 않았다. 영국의 해상권 장악 후 뉴런던은 1815년 종전 때까지 별 역할을 하지 못한 채로 있었다.

2.2. 19세기의 번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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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런던 항만 일대 건물들의 스카이라인

19세기 들어 산업용 고래기름의 수요가 급증하며 미국 북동부에서는 고래잡이가 성황을 이루었고, 뉴런던은 메사추세츠 주의 뉴베드퍼드 및 (모비딕의 무대인) 낸터켓과 함께 미국의 3대 고래잡이 도시로 번영하였다. 현존하는 뉴런던의 근대 건물들 대부분이 19세기 포경 산업으로 유입된 자금으로 세워진 것으로, 당시의 부를 상징한다. 이를 바탕으로 1850년대 뉴헤이븐, 1870년대 스프링필드와의 철도가 부설되었다. 20세기 들어 포경 산업이 쇠퇴한 후에도 뉴런던은 미국 해군의 주요 기지 중 하나이자, 사관학교가 위치한 도시로써 중시되었다.

2.3. 미국 해안경비대사관학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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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반기 내내 각종 사관학교로 쓰였던 트럼불 요새 전경

19세기 중반, 그리스올드 요새와 달리 완전히 재건되어 미국 해군 기지로 쓰이던 트럼불 요새는 20세기 들어 근해의 피셔스 섬이 해안 방어의 중추가 되자 밀수 감시대 사관학교로 활용되었다. 1915년 밀수 감시대가 미국 해안경비대로 개편된 후에는 해안경비대의 사관학교가 되었다. 1932년 해안경비대 사관학교는 메사추세츠의 세관순시선훈련학교와 통합하며 현 위치인 뉴런던 북쪽 외곽으로 확장, 이전하였다. 이후 트럼불 요새에는 2차 세계대전미국상선단사관학교가 입주했다가 전후 롱아일랜드의 킹스포인트로 이전하였다. 한편 뉴런던과 그로턴의 해병들은 1919년 붉은 여름 당시 백인과 흑인 그룹으로 나뉘어 폭동을 일으킨 흑역사가 있었다. 사관학교 이전과 함께 그러한 역사도 잊혀졌다.

2.4. 잠수함 기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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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뉴런던 잠수함 기지 전경

비어 있던 트럼불 요새에는 1950년 미해군 산하 수중 음향 연구소가 설치되어, 음파탐지기 (소나) 등의 고급 군수품을 제작하였다. 한편 구도심 북쪽의 스테이트 피어에는 2차 대전기부터 그로턴 잠수함 기지가 있었고, 전후 해산되었다가 냉전과 함께 1951년부터 핵잠수함 기지가 되었다. 그로턴 잠수함 기지에 배치된 제10 잠수함 편대는 세계 최초로 8-10대에 달하는 편대의 잠수함 전부가 핵잠수함으로 구성된 것으로 유명했다.

다만 1991년, 냉전의 종식과 함께 기함 USS Fulton이 반세기 간의 복무 후 퇴역함과 동시에 편대 역시 해체되었다. 이후 스테이트 피어는 컨테이너 터미널로 개조되었다. 수중 음향 연구소 역시 냉전의 막바지인 1990년, 로드아일랜드 뉴포트의 해군 수중 시스템 센터에 병합되며 사라졌다. 이후 1996년까지 뉴런던의 해군 시설은 전부 철거되었고, 도시 규모에 맞지 않게 큰 부두 시설과 해안경비대 사관학교 정도만이 과거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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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의 템즈강-런던 지명을 그대로 따온 것[2] 1856년에 처음 세워진 후 1912년 도시의 웅장함을 더한다며 현재의 고전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그 외의 근대 건물들은 대부분 18-19세기의 것 그대로이다[3] 피쿼트 전쟁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