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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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행적
3. 무공



1. 개요[편집]


풍종호의 무협소설 『지존록(至尊錄)』에서 200여 년 전, 탈혼마제(奪魂魔帝)와 싸운 암천향(暗天香)은 얻은 유산을 자신의 은거지에 모아 놓고, 그중에서 신주제파(神州諸派)의 절세(絶世)적인 고수의 일대기에 해당하는 서책들은 따로 숨겨 둔다. 그것이 나중에 인연이 닿은 풍현에게 전해지면서 스스로를 산인(散人)이라 일컬었던 아미(峨嵋)의 시조 이야기가 밝혀진다.



2. 행적[편집]


원래 곤륜(崑崙) 너머의 서역(西域)에서 살던 산인이 아미산까지 오게 된 이유는 친구를 따라왔기 때문이다. 후일 청성(靑城)의 시조가 되는 전귀(戰鬼)가 마검(魔劍)으로 악명을 얻어 고향을 등지려 하자 친구를 홀로 둘 수 없어던 산인도 함께 오게 된 것이다. 아미산에 당도해서는 '대정(大靜)'이라는 두 자를 산인 위에 덧붙이게 되었는데, 칠현대금을 탄주하며 풍류를 즐기는 그가 정좌하면 산중의 맹호조차도 그 고요함을 추종하여 흉내 낸다는 일화 때문이다.[1]

이런저런 이유로 대정산인의 주변에는 사람이 모여 시끌벅적함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러한 사교성은 아미파의 초석을 다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산인으로서는 전귀의 후예와 자신의 후대에 대해 한 가지 염려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살기(殺氣)가 강한 천람(天嵐)이라 불리는 전귀의 마검법이 사라지지 않았으며, 그 천람을 압도하려고 산인이 창안한 진룡항마검(眞龍抗魔劍)에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패기(覇氣)가 맴돌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대정산인은 아미에 십수(十秀)라 부르게 될 10명의 특별한 제자를 두었고, 그들을 위해 진룡무경을 기술했다. 더불어 그 일부로서 탄금지(彈琴指)와 복호살법(伏虎殺法) 24수를 아미 본문에 유출한다. 함부로 절기를 남용하는 자가 문중에 나올 경우에는 십수가 나서 심판할 수 있다는 본보기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귀의 천람이 재현되고 아미 문중에서 진룡항마검을 연성한 자가 없어 홀로 감당할 수 없을 때, 십수가 있다면 그 난관과 번뇌를 눌러 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것이다.

대정산인이 이런 안배를 마쳤음을 알리자 전귀는 벽운도(劈雲刀)와 비류보(飛流步)를 보여준다. 이는 두 문파의 시조를 웃게 한 끝에 한 가지 결말을 내도록 했다. 천람이 남용될 경우를 막기 위하여 전귀는 벽운도와 비류보의 전승자를 두기로 하였으며, 산인은 진룡무경의 기반이 되는 진룡항마검을 삭제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두 시조의 모든 절예를 배운 대제자인 항마검선(降魔劍仙)과 표풍검랑(飄風劍郞)은 진룡항마검과 천람이 사라져야 한다는 부분에서 동의하지 않았기에 스승의 유언을 어기고 문파에 오직 한 사람의 전승자만 두는 진룡보전(眞龍寶傳)과 표풍보록(飄風寶錄)을 남긴다.



3. 무공[편집]


  • 진룡항마검(眞龍抗魔劍): 대정산인은 전귀가 검을 마물(魔物)이라며 혐오하는 것을 그만두게 할 생각으로 복마신룡검(伏魔神龍劍)의 예를 들었으나, 신화는 전혀 마음에 닿을 수 없는 동화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방법을 바꾸어 실례를 들고자 택한 수단이 그 보검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가 매우 강력한 파사절기(破邪絶技)인 진룡항마검으로, 위력은 하늘조차 뒤집을 폭풍을 일으킨다는 천람을 제압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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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는 대정산인의 기백에 산중 짐승이 버텨낼 까닭이 없었던 탓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