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관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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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동관 대전
장소
장안 중심의 관중 서부 지역, 양양 중심의 형주 북부 지역, 합비 중심의 회남 지역
기간
기원후 234년경
교전세력
촉한
오나라
위나라
지휘관[1]
제갈량
마속
왕평
강유
마충
위연
이엄
오의
손권
육손
조예
사마의
장합
왕릉
진태
문흠
하후현
하후패
하후무
신비
병력
촉한 병력 14만 5천
손오 병력 20만
총합 35만 이상
30만~35만 이상 추정[2]
피해 규모
피해 불명
10만명 이상(추정)
결과
촉한-동오 연합군의 승리
영향
촉한의 장안 수복 및 관중 서부 장악
동오의 양번 함락 및 형북지역 영향력 확대
촉한-동오의 상용 대치 및 분할
촉한 승상 제갈량 병사, 촉한 권력 구조 변동



1. 개요
2. 배경
2.1. 1차 북벌 성공 후의 정세
2.2. 손오의 요동 원정
3. 진행
3.1. 촉한과 오나라의 거병
3.2. 촉한의 대전략
3.3. 대회전
3.4. 패퇴하는 위군
3.5. 동오 전선
3.6. 전후: 상용 대치
4. 결과




1. 개요[편집]


간절히의 대체역사소설 아! 내가 마속이다에 등장하는 가공의 전쟁. 소설의 분기점이 되는 최대의 사건으로[3] 제갈량의 2차 북벌임과 동시에 촉한과 손오가 힘을 합쳐 조위를 향한 대대적인 북벌에 나선 사건. 또한 작품 내 최대 규모의 전쟁이다.[4]

명칭은 동관대전이지만 사실 가장 결정적이고 중심이 되는 전장이 동관이었기에 그렇지, 전투는 동관만이 아니라 합비와 형북에서도 벌어졌다.[5] 다만 소설의 주역 세력이 마속을 비롯한 촉한 측인지라 대오 전선 쪽은 자세히 묘사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작중에서는 주로 동관 전투라고만 표현되기에 이렇게 서술한다.


2. 배경[편집]



2.1. 1차 북벌 성공 후의 정세[편집]


마속의 빙의로 인한 제갈량의 1차 북벌의 성공 이후, 위나라는 옹량주를 탈환하기 위해 16만이 넘는 대군을 투사하여 반격을 가했으나 패배, 오히려 제갈량의 역공으로 장안의 주요 방어선인 옹성과 미성마저 잃고 만다. 다행히 헌제를 이용한 사마의의 계략으로 진군을 멈추기는 했으나 옹량 지역은 완전히 촉한의 권역으로 굳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써 촉한은 파촉 지역에 눌려있던 신세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위나라와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무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여전히 위나라의 세력은 강대하여 판을 뒤집기는 무리가 있었고, 촉한은 여전히 만성적인 인재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물며 아직 장안을 탈환하지 못하고 관중 일부만 얻은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촉한의 초조함은 가속화되었다. 이에 촉한은 더 늦기 전에 다시 한번 전쟁을 벌여 장안을 수복해야 한다고 여겼다.


2.2. 손오의 요동 원정[편집]




3. 진행[편집]



3.1. 촉한과 오나라의 거병[편집]




3.2. 촉한의 대전략[편집]


제갈량은 본인의 대전략은 굉장히 안정적이지만 그만큼 읽히기도 쉽다는 것을 인정하고, 지금껏 제갈량 휘하에서 일하며 능력을 증명한 4명의 양장(마속, 강유, 왕평, 마충)들을 따로 납치불러다가 대전략 수립을 일임한다. 이에 4명의 장수가 내놓은 전략은 바로 과거 마초조조를 상대로 시도했던 대범한 동관 진출 작전의 재현. 위수를 따라 진격해오는 10만 대군을 미끼삼아 최소한의 병력 4만 5천명으로 장안의 후미인 동관을 기습 점령하여 장안을 양면에서 포위하는 전술을 택한다.

이를 전혀 예상치 못해 허를 찔린 위나라는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낙양 쪽에서 황하를 통해 동관을 수복하려는 진태, 문흠 등의 위군 3만명을 왕평과 마속이 1만 병력으로 포판현에 묶어두면서 장안을 고립시킨다. 사마의는 제갈량의 이런 움직임에 경악하면서도 위수에서 10만 촉군만 막는다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그 10만명은 이엄과 마충이 지휘하고 있었다. 장합이 뒤늦게야 마속과 위연의 신속한 움직임을 보고서야 제갈량이 동관에서 인근의 위군을 격파하고 있음을 진언한다.[6] 결국 제갈량이 동관에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사마의 역시 주력을 동관으로 돌린다. 비록 10만 정예병을 제외한 나머지 자투리 병력이 제갈량에게 격파당한 뒤였으나 일단 병력의 양은 여전히 위군이 우세했고, 결국 사마의는 미성에서 촉군 10만을 막는 4만 5천을 제외한 나머지 5만 5천으로 제갈량을 격파하기 위해 진군한다.


3.3. 대회전[편집]


사마의의 과감한 진격에 제갈량은 포판현에 있는 마속과 일부 병력을 동관으로 소환하고, 마대와 고상에게 1만의 군사를 맡겨 동관을 지키게 한 뒤 남은 3만 4천의 병력을 이끌고 사마의와의 정면승부를 결의한다. 결국 동관 인근에서 촉군과 위군의 대대적인 야전이 벌어진다.[7]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며 촉한에서는 위연, 위나라에서는 장합이 각각 전사하는 격렬한 전투 끝에 마침내 제갈량이 이끄는 촉군이 사마의가 이끄는 위군을 대파하는 것에 성공한다.


3.4. 패퇴하는 위군[편집]


사마의의 주력이 대파당하면서 사실상 대촉 전선에서 위나라의 패배는 확정되었다. 사마의가 위수 지역에 남겨놓은 4만 5천의 병력은 2선급 전력에 불과했던 데다가 10만에 달하는 이엄과 마충, 오의의 군세를 이길 수 없었고, 동관에서의 승리를 알게 된 위수 지역의 촉한군 역시 기세를 불리며 진격을 거듭한다.

하지만 이때 제갈량이 지병으로 쓰러지게 된다. 최고지휘관이 쓰러진 이상 장기전이 불가능함을 알게 된 마속과 촉한군은 최대한 빠르게 장안을 함락시키는 것으로 기조를 변경, 마속은 장안을 지키는 하후무에게 회유를 빙자한 겁박 편지를 보내며 퇴각을 종용한다. 결국 이에 넘어간 하후무는 병주 지역으로 후퇴하고 마침내 장안이 촉한의 품에 돌아오게 된다.


3.5. 동오 전선[편집]


한편 동오 전선은 2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각각의 황제(조예, 손권)가 친정하는 합비 방면, 하나는 육손이 이끄는 별동대에 위나라 형주자사 왕릉이 맞서는 형북 방면이었다.

촉한이 장안을 함락시키던 때 합비에서 손권이 이끄는 오군은 조예의 위군에게 격퇴당하고 말지만, 형북 방면에서 육손은 왕릉의 위군을 야전에서 격파, 이후 이어진 양번 공성전에서도 승리를 거두며 양번 지역을 손에 넣게 된다.


3.6. 전후: 상용 대치[편집]


그러나 이제 위나라를 격파했으니 촉한-오나라 양국의 이해 관계가 수면 위로 올라올 때였다. 육손은 장안을 수복한 촉한을 견제할 수단을 필요로 하여 장안의 바로 아래에 있는 상용 지역을 얻으려 시도한다. 하지만 이를 간파한 제갈량 역시 마지막 명령으로 한중을 경비하는 2천 병력을 빼 상용으로 보냄으로써 그 시도를 저지하고, 결국 상용에서 촉한과 오나라가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후 제갈량 사망 후 마속과 육손이 대표로 회담을 벌인 끝에 상용을 분할해 관리하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하게 된다.


4. 결과[편집]


이로써 촉한은 옛 한나라의 수도였던 장안 일대를 수복하며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하게 된다. 손오 역시 합비 방면에서는 재미를 보지 못했으나 육손의 양번 함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천하대세 역시 이전까지의 1강 2약 체제를 탈피하고 삼국의 힘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게 되어 정세가 훨씬 유동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러나 촉한 역시 유비 시절부터의 맹장이던 위연이 전사하고, 탁고대신이던 이엄이 제갈량 사후의 권력을 탐하다 미리 숙청당하며, 승상이자 나라의 기둥이던 제갈량마저 위독한 끝에 장안 수복 후 진군하던 도중 병사하는 타격을 입고 본격적인 세대교체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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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국 부관급은 제외하고 군사 지휘권자만 기재.[2] 조위가 동원한 병력은 장안 방면에서만 12만~13만. 게다가 사마의가 장안과 동관 일대에 배치된 자투리 병력들이 제갈량의 별동대에게 죄다 격파당했다고, 그들만 있었으면 확실히 우세를 취할 수 있었다고 아쉬워한다. 당시 포판현을 지키다가 동관에 온 마속이 보기에도 동관 일대 위군의 공세가 만만치 않았다고 하는 데다가 사마의 산하의 위군이 10만이기에 자투리 병력도 수천에서 수만은 되었을 확률이 높다. 낙양에서 진태와 문흠에게 군사를 맡겨 보냈지만 포판현에서 묶여 황하를 못 건넌 병력이 3만이다. 즉 최소 15~16만. 또한 동오 전선에서는 동오의 병력이 촉한보다 더 많았고, 황제 조예가 친정을 시행했기에 조위 역시 더 막대한 물량을 동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동오 전선에서 최소 15~20만 추정. 종합해서 30~35만 명 이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3] 사실상 이 사건으로 소설의 1부와 2부가 나뉜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4] 삼국의 병력을 전부 합쳐서 계산하면 동오 20만, 계한 15만, 조위 30만 이상으로 총 60만 이상의 병력이 뒤엉켜 싸운 셈이다. 본래 삼국시대 최대, 최중요 전쟁으로 꼽히는 적벽대전2배 이상의 규모이고, 이후 벌어진 장완의 북벌. 마속의 낙양대전에서도 이 정도 병력은 동원되지 않았다.[5] 사실 규모만 따지면 대촉 전선인 동관 지역보다 오히려 대오 전선 쪽이 더 거대했다. 동오가 20만을 동원했기에 당연히 조위도 그에 맞먹거나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을 것이며, 황제 조예가 직접 친정을 나갔기 때문.[6] 동관이 주전장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진태와 문흠의 3만, 동관 주변에도 최소 수만 단위의 위군이 출현했기에 실제로 동관에도 위군이 훨씬 더 많았다. 그걸 결사적으로 막아낼 정도의 능력자는 당연히 제갈량밖에 없었던 것. [7] 촉군 3만 4천, 위군 5만 5천에 달해 위군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초반 강유의 활약과 제갈량이 준비한 전장에서의 기선제압이 아니었다면 체급부터가 상대하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