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대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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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로마 대화재.jpg

1. 개요
2. 배경
3. 경과
4. 네로가 방화를 지시했는가?
5. 사후 조치



1. 개요[편집]


64년 7월 18일에서 24/27일,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발생한 대규모 화재.


2. 배경[편집]


서기 1세기 중순, 로마는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한 대도시였다. 그러나 로마는 화재에 쉽게 노출되는 문제점이 있었다. 다른 지중해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건물이 목재로 제작되었으며 주택 간의 간격이 매우 가까웠고 거리는 좁고 구불구불해, 한번 불이 일어나면 퍼지기 쉽고 진압하기 어려웠다. 27년 피데네 극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건물이 붕괴되는 사건이 벌어졌고, 54년에 캄포 마르치아에서 심각한 화재가 발생해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가 주민들을 위한 진화 및 구조 작업을 지시하기도 했다.

이렇듯 화재 사고가 자주 발생했기에, 로마 정부는 7개 집단의 자경단을 구성하여 불을 끄는 임무를 맡겼다. 이들은 각각 14개의 구역에 막사와 경비초소를 세우고 시내를 경비했다. 그러나 기동할 수 있는 공간이 협소했고 필요한 곳에 물을 신속하게 공급하기 어려워서 화재 진압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불 자체를 끄기 보다는 불이 일어난 곳 주변의 건물을 허물어서 불이 퍼지는 걸 막는 방식을 주로 택했지만, 이것만으로는 한계가 명백했다.


3. 경과[편집]


타키투스에 따르면, 64년 7월 18일에서 19일 사이의 밤에 막시무스 연극장에서 화재가 시작됐다고 한다. 불은 바람과 상점의 물품에 의해 번져 건물 전체로 순식간에 퍼졌고, 뒤이어 주변으로 매우 빠르게 퍼졌고, 사람들은 화마에 휩쓸러 죽거나 이리저리 달아나다 밟혀 죽었다. 이때 몇몇 사람들이 황제의 명령이라고 주장하며 화염을 끄는 걸 막거나 심지어 불을 붙이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이로 인해 다들 불을 선뜻 진압하지 못했다고 한다.[1]

로마 각지로 퍼진 화재는 6일간 이어지다 7월 24일에 많은 건물이 구조원들에게 철거된 에스퀼리노 언덕의 경사면에서 멈췄다. 그러나 7월 27일, 공공 장소에서 다른 화재가 또다시 발생해 수많은 공공 건물이 파괴되었다가 곧 진압되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이 화재는 네로 황제의 근위대장 티겔리누스에 속한 에밀리아누스 정원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타키투스는 대화재로 인해 로마의 14개 구역 중 4개 구역만 손상을 입지 않았고, 3개 구역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다른 7개 구역은 상당수 파괴되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루나 신전, 유피테르 신전을 포함한 일부 고대 신전과 성소들이 파괴되었으며, 누마 폼필리우스가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계시록, 그리스 미술 작품과 고대 문헌 등이 소실되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100만 이상의 주민 중 3분의 1만이 화재로 인한 피해를 모면했으며, 사망자 수는 수 만 명이고, 부상자와 장애를 입은 자의 수는 훨씬 많았으며, 수십 만 명이 집을 잃었다고 한다.


4. 네로가 방화를 지시했는가?[편집]


파일: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며 악기를 연주하는 네로.jpg

타키투스는 네로가 부하 또는 노예들을 시켜 화재를 일으키고 궁전의 무대에 올라 트로이의 함락을 노래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서술했으며, 수에토니우스는 네로가 하인들을 시켜 불을 지르게 했으며, 마이케나스 탑에서 무대 의상을 입고 화재에 휩싸인 로마를 바라봤으며, 폐허에 남아있는 모든 것을 약탈하기 위해 잔해와 시체를 제거하게 했다고 기술했다. 3세기의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 역시 네로가 트로이가 불타 없어지는 장면을 연출할 계획을 세우고, 부하들을 시켜 술에 취한 채 도시 여러 지역에 불을 지르게 했으며, 병사들은 불을 끄기보다 퍼뜨리는 걸 목표로 삼았다고 했다. 또한 그는 황제가 궁전 지붕에 올라가 수금을 들고 노래를 불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타키투스에 따르면, 네로는 실제로는 화재가 발생했을 당시 로마에서 80km 떨어진 해안 도시 안티움(오늘날 안치오)에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화재 소식을 듣자 마자 전차를 몰고 로마로 달려가서 현장에 직접 나서 화재 진압을 진두지휘했다고 한다. 한편, 그는 별궁을 개방하여 집을 잃은 이들을 그곳에 임시 투숙시키고, 주변 도시로부터 보급품을 차출하여 노숙자들에게 나눠줬으며, 밀 가격도 한 부셀(bushel) 당 3세스테르티우스로 책정해 식량을 잃은 로마인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 후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대책을 잘 세우고 재건축 계획도 착실히 수행한 것을 볼 때, 네로가 방화를 자행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네로가 불을 지르도록 지시했다는 소문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화재의 전파 속도, 바람의 방향과는 관계없이 모든 방향으로 확장되었다는 점, 석조 건물도 불에 탄 점, 그리고 화재가 다 진압된지 사흘만에 또다시 화재가 발생했다는 점, 몇몇 도둑들이 황제의 명령을 사칭한 점 등이 방화설의 근거로 제기되었다. 하지만 매우 큰 화재는 연소를 허용하는 산소를 찾아 확장하는 경향이 있어서 외부의 바람과 독립적인 방향으로 퍼질 수 있으며, 석조 건물은 외부에서 나오는 불씨로 인해 불이 붙은 가구와 목재 부품을 태우면서 소실될 수 있다. 그리고 불씨가 재 아래에 남아서 예측할 수 없는 불길을 다시 일으킬 수 있기도 한다. 현대 학계는 이러한 근거를 토대로 고대 문헌이 제기한 방화설은 근거가 없다고 간주한다.

파일:기독교인 박해.jpg

이렇듯 네로가 방화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정황은 명백했지만, 로마인들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네로가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다 못해 탐닉했고, 로마가 너무 지저분하고 촌스럽다며 죄다 허물고 새롭게 단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자주 하는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네로는 이러한 대중의 의심을 다른 데 돌리기 위해 기독교 신자들에게 방화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네로는 민중을 모아놓고 기독교도에게 짐승의 가죽을 덮어 씌운 다음 사냥개를 풀어 물어 죽이게 하거나, 십자가형에 처하거나 화형시키는 등 온갖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민들은 네로가 기독교인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잔인하게 죽이는 것이라 여겼고, 평소 기독교인들을 미워했던 자들도 네로의 잔인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비참하게 죽었다며 동정했다고 한다. 네로는 이 일로 후대 기독교 학자들로부터 적그리스도의 대명사로 낙인찍혔다.


5. 사후 조치[편집]


네로는 로마시 재건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건축 자재로 목재 등 가연성 재료를 쓰는 것을 금지했으며, 건물 소유주는 불을 끄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항상 준비되어 있는지 검사받아야 했다. 그리고 수로에서 가져온 물이 더 많이 보급되도록 하고자 개인이 물을 낭비하는 것도 금지했다. 또한 잔해를 치우는 일을 친히 감독했고, 오스티아 항구에서 곡식을 가득 채운 수송선을 테베레 강으로 올려보내 빈민들에게 나눠주도록 했다. 그리고 건물 재건축 사업을 대대적으로 시행하여 집을 잃은 이들에게 나눠주고 1년 이내에 집값을 내도록 했다.

그러나 네로는 도시 재건 과정에서 그리스색이 지나치게 들어간 건물을 대량으로 제작해 많은 이의 지탄을 받았다. 더욱이 불에 타 소실된 지역 중 광대한 영역에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 황금 궁전)를 짓도록 해, 시민들의 거처를 빼앗는 짓이라고 생각한 원로원 의원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때 클라우디우스의 신전터도 도무스 아우레아 부지에 포함되었기에 더욱 큰 비판을 받았다. 또한 네로는 대공사를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이탈리아와 속주에 거두는 세금을 대폭 늘렸으며, 신전을 대거 털어서 재원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렇게 마련 재원을 도시 재건축에 그대로 쓰지 않고 개인의 사치에 상당수 써먹었다.

네로의 이같은 행보는 수많은 이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2]. 그리하여 네로는 여러 암살 음모에 직면해야 했고, 이를 막으려고 수많은 이를 잔인하게 숙청했으나 오히려 더 큰 반발을 초래했다. 급기야 로마 군인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코르불로를 의심해 자살을 강요하는 짓까지 저지르는 바람에 군대의 지지마저 잃어버렸고, 결국 68년 갈바가 황제를 자칭하고 원로원과 근위대 마저 갈바의 편을 들자 절망에 빠져 자살했다. 그 후 로마는 갈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비텔리우스가 잇따라 황위에 올랐다가 피살되는 혼란에 휩싸였다가 베스파시아누스플라비우스 왕조를 개창하면서 비로소 안정되었다.

로마 시는 이후에도 종종 대형 화재에 시달렸다. 69년엔 베스파시아누스 지지자들과 비텔리우스 지지자들 사이의 전투로 인한 화재로 원로원 의사당이 파괴되었으며, 80년엔 큰 화재가 발생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막대한 재산 피해가 벌어졌다. 191년 화재 때 로마시 절반이 파괴되자, 콤모두스 황제는 재건 작업을 지휘하면서 로마를 "콜로니아 콤모디아나(콤모두스의 땅)"이라고 이름짓고 달력에서 달의 이름을 자신과 관련된 이름으로 바꾸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되면서 시행되지 않았다. 283년 카리누스 황제의 집권기 때 화재가 발생하여 포로 로마노의 건물과 카리누스 황제의 기념비 등이 파괴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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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혼란을 틈타 도둑질을 하려는 도둑들로 추정되지만 이들 때문에 네로 방화 음모론이 퍼지게 되었다.[2] 아마 화재로 피해를 입은 장소에 '황금 궁전'을 세우는 등의 부적절한 행동이 구전되는 과정에서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질렀다'고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와 비슷하게 머나먼 후대 사람인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1977년에 수도 부쿠레슈티에 대지진이 발생하자 나이지리아에서 부랴부랴 귀국하고는 지진 현장에서 생존 한계로 간주되는 기간을 넘어서도 희생자들을 계속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후에 부쿠레슈티 재건을 명분으로 수많은 건물들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인민궁전 같은 건축물을 지은 것이 해외에서는 '차우셰스쿠가 대지진 때 구조작업이 시간을 낭비한다며 매몰자가 생존해 있던 상황에서도 구조 작업을 중지하고 잔해를 불도저로 싹 밀어버리라고 했다'는 식으로 와전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