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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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가이우스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Gaius Rubellius Plautus)
출생
33년
사망
62년
직위
로마 귀족, 스토아 철학자

1. 개요
2. 생애
2.1. 부모와 가족 이야기
2.2. 반란과 죽음
3. 반란(?)




1. 개요[편집]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방계황족, 스토아 철학자, 원로원 의원.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손녀로 아우구스투스의 손자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외종손녀 리빌라 사이에서 태어난 율리아 리비아 카이사리스가 귀천상혼하여 낳은 아들 중 유일한 생존자다.

로마제국 5대 황제 네로 황제가 결정적으로 몰락하게 된 시발점인 피소 음모 사건, 코르불로 사건(베네벤툼의 음모)의 이전 사건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무고 사건의 서사 격인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반역사건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가 반란을 꾸미거나 약간의 의심을 살 행동을 했다는 증거, 사실은 전무하다.

여러 고대 기록에 나오듯, 이 사람이 진짜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네로와 그 측근들의 일방적인 주장 뿐이다. 때문에 대다수의 로마사 권위자들은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를 네로에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피살된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와 같은 억울한 희생자로 보고 그 처지를 딱하게 여긴다.

타키투스 등에 따르면 예언서를 이용해 정치 공작 음모를 벌였다는 이유로 추방됐다가, 아시아 속주 개인영지에서 62년 살해됐다고 한다. 이 사람의 죽음은, 네로의 견제 대상이었던 클라우디우스 1세의 사위이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방계 황족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와 클라우디우스 1세의 딸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공주가 비극적으로 살해된 배경을 제공했으며 코르불로 역시 이때부터 네로에게 견제를 받아 끝내 베네벤툼의 음모에 연루된 누명을 뒤집어 쓰고 죽었다. 사후 네로의 명령으로 그 일가와 처가 모두 연좌제로 살해되고, 재산이 국고로 귀속됐다.


2. 생애[편집]



2.1. 부모와 가족 이야기[편집]


기사계급 출신의 신참자 원로원 의원이자 수사학자인 서기 18년 집정관 가이우스 루벨리우스 블란두스(Gaius Rubellius Blandus)와 티베리우스 황제의 손녀 율리아 리비아 사이에서 33년 태어났다. 가문은 대대로 티부르(오늘날의 티볼리) 일대의 기사계급 평민으로, 루벨리우스 블란두스 대에서야 원로원 의원을 배출한 신참자 집안이다. 하지만 이 가문은 몇 대에 걸쳐 유명한 수사학자, 철학자를 배출한 교육자 가문으로 명성을 떨쳤다.

어머니 율리아 리비아는 종종 율리아 리비아 카이사리스로 알려진 로마 황녀다. 그녀는 소 드루수스, 리빌라 부부의 장녀로, 티베리우스 황제의 손녀이며 3대 황제 칼리굴라와는 혈연상 오촌이며 사촌,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는 그녀의 외삼촌이며 오촌당숙이 된다. 따라서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외증손자가 된다. 하지만 타키투스가 기록했듯이, 율리아 리비아와 루벨리우스 블란두스의 결혼은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귀촌상혼이면서도 루벨리우스 블란두스가 50대가 될 때까지 미혼으로 있다가 권력욕을 위해 의도적으로 네로 카이사르 죽음 후 사별한 공주와 결혼한 케이스인지라 이 결혼은 처음부터 큰 논란을 일으켰다. 더욱이 아버지 루벨리우스 블란두스는 최근 연구에서 미혼 상태 내지 이른 결혼에서 사실혼으로 얻은 딸 루벨리아 바사도 있었다고 하니 매우 완고한 로마사회에서 이 귀촌상혼을 어떻게 판단할 지는 그 결말이 뻔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부모의 사랑, 결혼은 황제, 황실, 원로원, 로마 지식인 사회 모두에게 상당한 논란을 일으키고 환영받지 못했다. 하여 타키투스는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부모의 결혼과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의 잉태, 탄생을 다음과 같이 표했다.

"로마를 슬프게 한 많은 슬픔"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가 서기 33년 태어났다는 것도 후일 그가 제 명에 못 살게 된 이유가 됐다. 문서의 주인공 가이우스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는 33년 태어났는데, 이 해에 율리아 리비아와 외조모 리빌라가 세야누스와 함께 공모하여 네로 카이사르를 몰락시키고, 네로 카이사르의 동생인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이며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드루수스 카이사르까지 두 여인의 음모로 벌어진 무고임이 발각됐다. 이렇게 되자 아우구스투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그리움, 사랑이 가득한 평민들은 이 사건과 갓 태어난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의 존재에 혀를 찼다.

로마 사회의 분노와 허탈감은 더 커진 것은 율리아 리비아에게 누명을 쓴 피해자 중, 티베리우스 황제가 어떻게든 복귀시켜 명예회복 절차를 거치게 하려고 한 황태자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황궁 지하실에서 석방 명령과 명예회복 절차가 명령된 직후, 아사한 채 발견된 사건이었다. 이렇게 되자 노황제는 큰 충격 속에 격노한다. 카프리섬에서 종손(동생의 손자)이자 유력 후계자인 가이우스(후일의 칼리굴라)와 함께 드루수스 카이사르 석방 준비를 결정하고 명령을 내릴 준비에 들어간 상황에서, 조사 과정을 통해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어떤 이유로 아사하고 그가 어떤 증언으로 체포됐는지까지 속속들이 밝혀진 일은 티베리우스 황제, 원로원 모두가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와 그 부모를 더 증오한 원인이 됐다.[1] 따라서 티베리우스 황제와 원로원은 신랑 측의 의도와 이들의 관계가 떳떳하지 못함을 간파해, 이 결혼을 '사회적 재앙', '로마를 슬프게 하는 사건'으로 규정한 뒤 어떤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논란 많고, 모두를 적으로 돌린 사건들로 완성된 결혼이었지만, 루벨리우스 블란두스와 율리아 리비아는 서기 33년을 시작으로 여러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이들 부부의 자녀들은 손이 많지 않은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피를 이은 방계 황족이 됐는데, 정작 황제, 황실 식구, 원로원 모두에게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와 그 형제자매는 황족 내지 아우구스투스 일가 사람들로 규정된 특권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 생전부터 일찌감치 황제와 가문, 원로원에게 환영받지 못한 결혼이고, 외조모 리빌라가 기록말살형을 당한데다, 원로원 안팎에서 이들을 지지한 세력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말년 요절한 동생 대 드루수스의 혈육이며, 자신의 몇 없는 혈육들을 무척 신경쓰면서, 이들에 대한 약간의 비방도 과도하게 처벌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혈육인 율리아 리비아와 손녀의 아이들인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와 그 형제자매들을 없는 존재로 치부해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그 뒤를 이은 어머니의 사촌으로 율리아 리비아 농간에 두 형을 잃은 가이우스(칼리굴라) 황제도 비슷했다. 가이우스 황제는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에게 황족 혹은 카이사르 가문 친척들이 받는 특권, 영예를 내려주지 않았고, 이들을 없는 존재로 취급했다. 이는 그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 1세도 비슷했다. 따라서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와 형제자매들은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피를 이은 먼 친척 정도로만 인식됐을 뿐, 어떤 특권도 하사받지 못한 기사계급 신분으로 남았다.

이런 가운데 서기 43년~ 45년 사이, 어머니 율리아 리비아가 메살리나 황후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 고문들에게 간통죄, 반역죄 혐의로 기소됐다. 이 사건에 대해 과거에는 메살리나가 '거짓 기소'해 벌어진 무고한 희생라고 적혔으나, 오늘날에는 여러 정황과 근거상 충분히 예상된 일로 평가받는다. 이 기소는 율리아 리비아의 결혼 과정과 그녀가 꾸민 음모가 결정적인 이유라고 하는데, 이를 주도한 이는 칼리굴라가 중매해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결혼한 방계황족 메살리나와 대 드루수스 생전부터 아우구스투스 직계손들을 따른 원로원 인사들이었다.

율리아 리비아는 세야누스게르마니쿠스의 차남 드루수스 카이사르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워 제거할 때 합세한 악행이 있어 이를 갈고 있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더욱이 옛 티베리우스 지지세력들에게 그녀는 남편 네로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아버지 소 드루수스와 조부 티베리우스의 명예를 실추시킨 일로 큰 지지를 받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은 증거를 들이밀면서 율리아 리비아가 근친상간과 부도덕한 죄, 그리고 불륜 관계를 통해 세를 불리고 그 자녀들에게 제위를 주려는 반역죄를 기소 이유라고 밝혔을 때, 황제와 원로원은 사건을 정식 조사한다.

이 기소 당시,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자신의 혈육(누나 리빌라의 딸)인 율리아 리비아 만은 살려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어머니 율리아 리비아가 자신의 아들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루벨리우스 드루수스 등에게 제위를 안겨 주고 싶어했고, 이를 위해 세력을 규합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여기에 더해, 메살리나가 자신의 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위해, 가세하자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이렇게 되자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율리아 리비아에 대한 변호를 받아들이지 않고, 되려 엄격한 조사를 명한다. 이는 원로원도 비슷했다. 그들 역시 기소부터 수사 과정 내내 증거가 너무 많이 나오자, 그녀에 대한 좋은 평가 역시 감경사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되려 그들은 메살리나와 친황제파 인사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율리아 리비아와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는 어머니가 법정에서 유죄 판결 후 사형이 집행되면, 제거될 운명이 된다. 이들이 황족으로 누릴 특권을 받지 못했다고 해도, 엄연히 황제의 친족인 것은 변함없어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설상가상 그녀가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직계손으로 자타가 인정한 브리타니쿠스의 경쟁자로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등을 내세우려 했다는 증거가 인정받자, 이들 가족을 보호하겠다고 나선 이는 없게 된다. 이에 코너에 몰린 율리아 리비아는 남은 아이들을 지킬 결심인지, 아니면 비참하게 명예까지 조롱받을 것을 걱정해서였는지 몰라도, 사형 선고 직후 체념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어머니 율리아 리비아가 주변에게 워낙 잘한데다 그녀의 아버지 소 드루수스에 대한 평판이 좋았던 까닭에,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의 어머니는 이 반역죄 유죄 선고 전까지는 유덕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가문이 풍비박산 나고 어머니 명의의 개인재산이 모두 국고로 환수됐음에도,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는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이때 그의 누이인 여자 형제 루벨리아 비사도 함께 목숨을 구했는데, 이는 그녀가 율리아 리비아의 수양딸이었던 것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2]

이렇게 일찍 어머니를 잃고 낙인 찍힌 상황에서 서기 55년, 가이우스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는 혼처를 구한다. 그는 집정관, 55~56년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총독, 64~65년 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낸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의 딸 안티스티아 폴리타와 결혼했다. 이 결혼에서 부부는 많은 자녀를 얻었다. 하지만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일가와 처가는 연좌제로 66년 모두 살해되고 어린 아이들까지 제거돼 멸족됐다. 플라우투스가 네로에게 사실상 기록말살형에 처해져 자녀들의 이름은 알 수 없다.

2.2. 반란과 죽음[편집]


일찍부터 스토아 철학에 심취했기 때문에, 주변에게 네로를 평할 때도 네로를 스토아철학적으로 비난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는 자신의 외증조부 티베리우스가 연상되듯, 무미건조할 정도로 사람 자체가 재미없고, 성격도 폐쇄적이며 외톨이 같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주변에선 그를 조용하고 과묵하다고 평했다.

서기 55년, 칼리굴라의 첫 번째 아내 유니아 클라우딜라의 언니로, 메살리나와 중혼한 혐의로 처형된 가이우스 실리우스의 전처인 유니아 실라나가 반역죄로 기소됐다. 그녀는 일찍부터 소 아그리피나의 앙숙으로, 네로와는 서로 연인 관계 비슷한 사이였다. 헌데 이 귀부인이 어떻게 된 이유인지 몰라도, 느닷없이 소 아그리피나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싸잡아 비난했다. 이때 그녀는 "율리아 아그리피나가 네로를 견제하고자 브리타니쿠스가 아닌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를 내세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발언은 네로와 실라나 관계가 애뜻하고 연인 비슷한 관계인 것을 생각하면, 네로 측에서 소 아그리피나, 브리타니쿠스,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를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이 사건 이후, 네로와 소 아그리피나 사이의 힘 대결이 본격화되고, 이 과정에서 숨 죽이고 조용히 살아가던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는 로마 정계에 다시 이름이 오르내리게 된다. 이런 가운데 서기 60년, 혜성이 나타나며 혜성의 등장을 놓고 여러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때 돈 길거리 소문은 하필이면, "네로가 몰락하고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가 제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내용의 예언이었다. 이에 네로는 이 소문을 조사하는데, 소문을 처음 유포한 이가 체포되기는커녕 네로를 밀어낼 것이라고 이름이 오른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가 체포된다. 이후, 네로 측에서 밝히길, 실제 반란 움직임이 있다는 증거가 나왔다면서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는 가족과 함께 아시아 속주로 추방된다.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가 진짜 음모를 꾸몄는지, 아니면 네로 측의 농간으로 누명을 뒤집어 쓴건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주변에는 이 일을 함께 할 만한 세력도 전무했고, 그가 원로원 의원이 아닌 신분이라서, 네로 입장에선 꼬투리 잡을 구실도 마땅치 않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렇게 되니,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는 유죄를 받았다고 해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반역죄로 로마에서 추방됐는데, 이때 스토아 철학의 대가로 자신의 스승인 무소니우스 루푸스와 동행했다.

추방 이후, 그가 가족들과 정착한 곳은 개인 소유의 아시아 속주 일대 영지였다. 이곳은 루벨리우스의 장인이 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내며 마련한 개인 영지였다고 한다. 이때 그는 스승 무소니우스 루푸스와 동행해 스토아 철학에 심취했는데, 본래부터 재미없고 폐쇄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한 사람답게 조용하게 생활했다. 하지만 그가 로마에서 추방된 이후 보인 여러 움직임은,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가 네로가 꾸민 정치공작 음모에서 피해를 입고, 네로가 저지른 폭정과 독재에 항거한 스토아 철학자로 알려지게 됐다.

결국 서기 62년, 네로는 꺼림직한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를 죽인다.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 계기가 된 것은 플라우투스가 반란을 계획해 로마 동부 책임자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와 협상하려고 움직임을 벌인다는 첩보가 도착했을 때였다. 이때 네로는 크게 화를 내며 재조사를 명했다. 어쩌면 코르불로를 죽일 당시 그랬던 것처럼, 첩보 자체도 실체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헌데 이 조사 직후, 네로는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를 즉시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는 죽임을 당했는데, 이 명령 이후 4년 뒤인 66년 그의 장인, 아내, 자녀들까지 연좌제로 모조리 살해됐다. 이후 이 사람의 머리는 네로와 원로원에게 넘겨 졌는데, 네로는 플라우투스의 머리를 보면서 이 사람의 긴 코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며 조롱을 퍼부으면서 이 사람의 비열함을 증오했다고 한다.

3. 반란(?)[편집]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반란 미수 사건은 고대 기록과 현대 사가들의 저서들 모두에서 과연 반란이 맞느냐는 의견이 많고, 실제 평가를 보면 반란이라기보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다고 평이 많다. 즉,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처럼 반란 누명을 뒤집어 쓰고 살해된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다. 물론,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는 당대부터, 사건의 평이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와는 살짝 갈린다. 왜냐하면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는 당대부터 원로원과 반 네로파,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지지자들에게 있어, 네로, 티겔리누스에게 억울하게 죽은 순교자와 같은 고결한 귀족이자 원로원 동료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는 취향이 지극히 구식이고 지루하며 엄격했으며 외톨이 같은 삶을 살아 억울한 면이 많았다고 기술했다. 즉, 공적, 사적으로 모두 매력 없고 반란과 무관한 인물이었다고 타키투스는 지적한다.

실제로도 이 사람은 또래 귀족들에게 지지받지 못했고, 개인적 매력과 혈통적 후광으로 세를 모으는 것과 무관했다. 그는 동료들에게 큰 존경을 받아 사람을 모을 만한 위인도 아니었던데다, 방계 황족 중 위험인물이라는 평도 무색했다. 설령 장인이 고위직을 지냈고 재력이 대단해 반란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해도,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는 개인적 매력이 형편없고 태생부터 미운털이 박혀, 네로에게는 정적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먼저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는 힘 있는 원로원 의원도 아니었고, 황족과 원로원 의원을 구분짓는 상징인 특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주장은 당대부터 헛소리에 불과했다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그는 네로 시대 이전부터 이 사람의 평과 부모의 결혼 및 그의 탄생 모두 아우구스투스 일가와 그들의 친구, 친인척 그리고 지지하는 평민들에게 있어서는 안 될 흠이자 만악과 같은 상징이었다. 이는 그가 로마사회에서 애초부터 존재 자체가 눈엣가시로 찍혀 반드시 제거될 대상이 된 이유가 됐다.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는 출생부터 주홍글씨가 박혀 있었다. 따라서 그는 로마인 중 지위가 있거나, 출세를 꿈꾼 이들에게 태생부터 그 누구에게도 친해지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는 그 부모의 행적이 결정적이었다.

친부는 평생동안 독신으로 살겠다고 하다가, 네로 카이사르가 반역죄로 추방돼 31년 자살하기 전부터 법적으로 유부녀인 율리아 리비아 카이사리스와 불륜 후 결혼했다. 따라서 이 사실을 안 티베리우스 황제는 그를 자신의 손녀사위로 인정하지 않고,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무시했다. 여기에서 플라우투스 루벨리우스 일가의 비극이 시작되는데, 원로원 역시 티베리우스와 관계가 최악임에도 이를 조롱하고 냉대하면서 티베리우스의 행동에 동조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손녀의 결혼 소식에 티베리우스는 무관심하면서 없는 사람 취급을 했고, 원로원은 이를 보면서 황제의 기분이 최악임을 알고 어떤 표현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로마 사회 역시 비슷했는데, 아우구스투스의 직계인 대 드루수스 일가를 딱하게 여긴 평민들 역시 이 결혼을 떳떳하지 못하다고 평하면서, 네로 카이사르 몰락 전부터 불륜한 중년 남성과 20대 유부녀의 일탈이라고 조롱했다. 따라서 이들 부부의 자녀 중 이 당시 살아남은 루벨리우스가 33년 태어났다고 해도, 그는 부모의 이런 행적만으로 이미 부도덕함과 음험함의 결과물로 찍힌 상태였다.

설상가상 가이우스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는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노예들에게 조롱받고 음식을 공급받지 못해 출소 직전 아사한 상태로 발견된 뒤, 원로원과 티베리우스 모두 그 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시점인 서기 33년 태어나 모두의 증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티베리우스는 손녀가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아버지와 불륜을 하고, 결혼 후 황족 대우를 맺고자 함을 간파해 이를 경멸한 터라 그 증오심이 대단했다. 이렇게 되니 티베리우스 측근들은 노황제와 불행하게 세상을 떠난 소 드루수스,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더럽힌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가족을 보호해줄 생각이 없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의 직계인 대 드루수스 일가와 원로원도 비슷했다. 살아남은 게르마니쿠스 자녀들과 이들의 숙부로 대 드루수스, 소 안토니아의 막내인 클라우디우스는 이 결혼으로 친혈육인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제 명도 못 살고 희생됨과, 로마 원로원 안팎에 있는 지지세력이 큰 피해를 입은 점 등으로, 루벨리우스 일가를 좋아하지 않았다. 원로원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자신들에게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죽음 원인을 전가한 티베리우스를 미워했던 만큼이나, 원로원은 루벨리우스 풀라우투스를 감쌀 생각이 없었다. 되려 이들은 이후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의 외조모 리빌라를 기록말살형하면서, 살아있던 리빌라의 두 자녀에게 "세야누스와 공모한 반역자의 혈육"이라는 낙인까지 찍었다. 이렇게 되니 온건한 인사들과 티베리우스 측근들, 마크로를 위시한 프라이토리아니 역시 루벨리우스 본인과 부모 모두를 그저 티베리우스 피만 물려받은 인사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즉, 루벨리우스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네로, 원로원 모두에게 존재 자체가 눈엣가시였다.

이런 이유로 루벨리우스에 대한 사소한 소문이 돌았을 때, 황제와 원로원 일부 인사들은 과민반응했고, 네로가 그에게 죄를 덮어 씌울 때 로마 민심은 큰 저항이 없었다. 즉, 네로의 잔혹한 행동이 네로 몰락 이후 그 잔혹성을 부각시켰다고 해도, 루벨리우스 처형과 그 일족 제거는 당시 로마 원로원과 황실 내에서는 어느 정도 참작의 여지가 있던 비극에 불과했다.

실제로도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는 어머니가 반란에 연루될 당시, 온화한 클라우디우스가 사형판결을 면해주지 않았다면 형제자매와 함께 목숨이 달아날 상황이었다. 어쩌면 칼리굴라 생전, 이 사건이 터졌다면 일찍 제거됐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의 외삼촌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사례와 비슷했을 것이다.

따라서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죽음은 브리타니쿠스, 소 아그리피나,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파우스투스 술라 펠릭스, 클라우디아 안토니아로 이어진 아우구스투스 직계의 연이은 죽음과 달리 파장이 미미했고 그 평 역시 "예정된 운명"정도의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로마 귀족 사회 전반과 네로 시대로 놓고 보면, 서기 62년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의 죽음은 네로의 대대적인 아우구스투스 일가 숙청 신호탄이 됐다. 이 사건 전, 네로는 자신의 어머니, 처남, 첫 아내를 연이어 죽인 행보로, 민중들의 대규모 시위, 원로원과 프라이토리아니 내부의 끝없는 의심을 벗기 위해 나름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는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외에는 아우구스투스 직계 황족들은 절멸시킨 부분에 정치적 부담까지 느끼고 있었다. 하여 네로는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를 추방할 때, 나름 예의주시했는데 그가 루벨리우스와 그 일가를 쉽게 추방시키고 제거할 때의 상황은 네로, 티겔리누스가 폭주로 연결됐다. 그래서 네로는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를 별 저항 없이 제거한 직후, 어릴 적부터 극도로 미워했던 자신의 사촌형이자 손윗동서인 방계황족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클라우디아 안토니아의 두번째 남편)를 누명을 씌워 죽이고 이후에는 클라우디아 안토니아까지 제거해 아우구스투스의 후손들을 모조리 제거해버린다.

이는 루벨리우스 가문의 운명도 비슷했다. 연좌제가 보편적이지 않은 로마에서,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의 남은 가족들은 처가까지 연좌제로 모두 죽임을 당했다. 물론 이는 4년 뒤인 서기 66년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거리낌이 없어진 네로는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의 아내, 아이들, 장인 일가 모두를 반역자로 유죄를 선고해 어린 아이까지 모조리 연좌제로 죽인다. 이때 원로원은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일가의 전멸을 파우스투스 술라, 피소,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죽음과 달리 손가락질하지 않고 방조하는데, 그들은 네로의 루벨리우스 일가 연좌제 명령에 동조하는 자세까지 취했다.

어쨌든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 사건은 네로의 잔혹성이 심화되고, 여러 사건의 직간접적인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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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티베리우스 황제는 세야누스를 몰락시키기 직전, 만일을 위해 드루수스 카이사르 석방을 명했고 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되자 그를 카프리 섬으로 데려 오려고 했다.이는 원로원도 비슷해, 원로원에서는 티베리우스에게서 "드루수스가 오랫동안 수감돼, 건강 상태가 염려되어 생사가 걱정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풀어줬을 때 드루수스가 아사한 것을 안 뒤 큰 충격에 빠졌다. 더욱이 이때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3년여간 작성한 수감일기가 발견돼, 공개되면서 원로원과 노황제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게 되어 이 사건의 재조사까지 벌어진다.[2]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의 남자형제 루벨리우스 드루수스는 일찍 요절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