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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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주요수훈
4. 장의위원회 구성
5.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2. 생애[편집]


1925년 11월 10일에 출생했다.

1946년 5월, 평양학원에서 공부, 1947년 2월에 평양고급중학교 교원으로 배치되었다. 이때 가르친 학생 중 한명이 나중에 통일부장관이 되는 강인덕이다. 1948년 가을에 조선로동당 평안남도위원회 선전부 강사로 배치, 이후 평안남도위원장이었던 김일의 서기로 승진했으며 1951년 3월, 평남일보사 책임주필이 되었다. 모스크바 대학 유학을 다녀온 이후 1953년 6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김일의 서기로 임명, 오랫동안 김일을 보좌하면서 대남 문제의 전문가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중앙위원회 과장을 거쳐 문화부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1960년, 4.19 전야 때 이승만이 학생들을 진압할 것이라는 노동당 내부의 주류에 맞서 이승만이 몰락할 것이라고 강경하게 주장하였고 정말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김일성은 당 연락부장 어윤갑을 질책한 후 리경석을 문화부 제1부부장에 임명했다고 한다. 장면 내각이 출범한 후에 대남 강경론을 주장한 군사부 부부장 강영탁에 맞서 대남 유화론을 주장하면서 충돌했다고 전해진다.

제1부수상 김일의 보좌관을 지낸 오기완의 증언에 따르면 1961년 2월, 연락부 일본 담당 부부장에 임명, 1965년 2월, 중앙당학교에 진학하였으며 수료 후 1969년 2월에 다시 당중앙위원회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유일사상체계를 철저히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하는데 갑산파 사건, 허봉학, 김창봉 사건 등에서 활약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이후 당중앙위원회 부장으로 승진하였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72년 11월부터 내각 참사 직함을 가지고 남북회담에 참가하여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보좌관을 맡았었다.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회의 당시 제자인 강인덕과 재회하였는데, 강인덕이 먼저 "혹시 평고에서 선생님 안하셨습니까?"라고 묻자 손을 잡더니 "이 사람아, 날세. 평고 이경석이야."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그날 연회에서 강인덕이 술을 올리려 하자 의사들 지시로 술을 마실 수 없다고 했는데 이미 병환이 깊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끝내 오랜만에 제자를 만난 기쁨에 강인덕이 따라주는 맥주를 마셨다고 한다. 최규하는 리경석이 전혀 공산당같지 않고 그냥 인텔리같은데 어떻게 당중앙위원회 위원까지 됐는지 신기하다고 평가했다.

결국 서울 방문을 코앞에 두고 1972년 12월 19일, 8시에 48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당중앙위원회와 내각은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리경석동지는 (...) 수령님의 위대한 주체사상과 그 구현인 우리 당의 정책을 높이 받들고 공화국 북반부에서의 사회주의건설과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위하여 정력적으로 투쟁하였다. 리경석동지는 자신을 우리 당의 유일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자기 생애의 마지막순간까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사회주의의 완전승리와 조선혁명의 전국적승리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것을 다바쳐왔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오기완의 증언에 따르면 동맥경화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별 하나가 떨어졌다고 매우 안타까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1990년 8월 15일,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3. 주요수훈[편집]



4. 장의위원회 구성[편집]



5. 참고문헌[편집]


  • 유영구, 남북을 오고간 사람들: 남의 조직사건과 북의 대남사업(서울: 도서출판글, 1993)
  • 조선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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