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룡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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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북한의 법조인, 정치인.

2. 생애[편집]


1925년 11월 30일에 출생했다. 초기 이력은 극단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으며 북한에서 발표한 부고를 보면 사회안전부문 및 무력기관에서 오랫동안 종사했다는 것 정도를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통일부에서 파악한 바에 따르면 1982년 10월, 중장 계급으로 호위사령부 부사령관을 지낸 바가 있다고 한다. 이한영의 회고록에도 리룡섭이 제1호위부장으로 김일성을 밀접 수행하였다고 적고 있다. 김일성이 차를 타고 나갈 때면 김석창 행사안전국장 차 뒤에 리룡섭의 차가 나가고 그 뒤에 김일성의 차 맨 뒤에 전문섭의 차가 수행했다고 한다.

1992년 12월 10일, 조선로동당 6기 20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992년 12월 11일, 최고인민회의 9기 4차 회의에서 한상규의 뒤를 이어 중앙검찰소장에 임명되었으며 19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 5차회의에서 한상규가 가지고 있던 법안심의위원 자리도 차지하였고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보선되었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낸 것을 마지막으로 1995년 11월 18일 1시 40분에 70세를 일기로 급병으로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다년간 사회안전부문과 무력기관, 사법검찰기관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하면서 당과 수령을 견결히 보위하며 내외원쑤들의 침해로부터 혁명의 전취물을 지키고 나라의 법질서를 공고히 하는데 적극 이바지하였다. 리룡섭동지는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실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그가 사망한 이후에는 중앙검찰소 제1부소장 한치설이 한동안 검찰소장 직무를 대행하였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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