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메멘토 모리)

그날 집에서 몰래 가져온 왕관을
그 아이에게 씌운 나는,
기사 흉내를 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겁 많고 얌전한 그 아이와
더 같이 있고 싶었으니까.

안심하고 밖으로 나올 수 있길 바라며
나눈 약속.

'프리실라는 내가 지켜줄게.'

마을을 개척한 마녀의 자손.
나와 프리실라의 집안은
그런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를 두려워하여
맘 편히 지낼 수 없는 마을에서.
그나마 놀아주는 건 자라와 스쿨 언니뿐.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행복했었다.

스쿨 언니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자라가 군대에 가고 나서 조금 지났을 무렵.
나는 프리실라를 데리고 처음으로 번화가에 나왔
다.
두 사람이 떠나고부터
줄곧 힘이 없었던 프리실라가
조금이라도 기운 차리길 바랐으니까.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을
프리실라는 걱정했지만...
괜찮아. 내가 지켜줄게.

서로 떨어지지 않도록 손을 잡고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처음 보는 것들로 가득한 시끌벅적한 거리.
오랜만에 보는 프리실라의 웃는 얼굴

그것이 우리들의 즐거웠던 마지막 추억

그날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느닷없이 나타난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였다.

'마녀님, 우리의 마녀님!'

그렇게 저마다 외치는 남자들의 눈은
프리실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하는 자들이지 모른 채,
나는 다가오는 녀석들을 향해 검을 뽑았다.

프리실라는 내가 지켜야 해...!

하지만 적은 많았고 나는 힘이 없었다.

남자들 중 하나가 상처를 입고 무릎을 꿇은 나에
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고 다가온다.
그때였다.

그리실라의 비명과 함께
갑자기 폭염이 주위를 감쌌다.

불똥과 타는 냄새.
목덜미에 들이댄 차가운 칼날
몽롱한 의식 속에서 프리실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갈게요. 그러니까 린은...
그 아이는 살려주세요.'

말도 안 돼. 싫어... 그런!

그 폭염은 프리실라의 힘이었다.
프리실라는 나를 지키기 위해 마녀가 되었고,
내 목숨을 살리는 대신 놈들에게 붙잡힌 거야.

프리실라... 프리실라...!

마을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왕관이
씌워져 떠나가는 모습에
나는 몇 번이고 계속 이름을 외쳤다.

프리실라와 남자 몇몇이 탄 마차가
보이지 않게 되자 누군가가 말했다.

'마녀님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신다.
넌 필요 없다.'

아아... 이 녀석들은 처음부터
약속 같은 건 지킬 생각이 없었구나.

그 아이를 지키지 못하고 여기서 죽는다...?
웃기지 마... 웃기지 말라고...!

문득 정신 차려 보니 그 분노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분한 감정이
나의 힘이 되어 있었다.
남자들 중 하나가 나의 변화를 눈치챘지만,
이미 늦었어
너희들을 절대로 용서치 않아.
모두 내가 쓰러뜨려 주겠어...!

마을에 돌아온 나는
집에 몰래 들어가 그 왕관을 훔쳐냈다.

이곳을 개척한 마녀가 쓰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훌륭한 왕관.
나에게 있어서는 그날 나눴던 약속의 증표.

동시에 그 녀석들이 프리실라에게 씌운 것과 똑같
은 마녀의 증표

함께 숨겨져 있던 낡은 양피지에는
프리실라를 데려간 놈들에 대해서도 적혀 있었다.

귀족들이 만든 마녀를 숭배하는 비밀결사...
마을을 개척한 마녀는 비밀결사를 배신한 사람들
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당도했었다고.

그 뒤로 계속, 그 녀석들은 찾고 있었구나.
배신자들의 마을을, 그리고 숭배해야 할 마녀를.

내가 마녀가 되는 게 조금 더 빨랐다면
프리실라를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아니야,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봤자 소용없어.
그러니까 지금부터 구하러 가는 거야.

마을로 돌아오는 일은 두 번 다시 없겠지.
어차피 이곳에 있어도 나나 프리실라는
마녀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니까.

기다려줘, 프리실라...!
그날의 약속은 지킬 테니까.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