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안 1세(바이에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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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의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
Maximilian I., Kurfürst von Bay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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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73년 4월 17일
바이에른 공국 뮌헨
사망
1651년 9월 27일 (향년 78세)
바이에른 선제후국 잉골슈타트
재위
바이에른 공국의 공작
1597년 10월 15일 ~ 1623년 2월 25일
팔츠 선제후국의 선제후
1623년 2월 23일 ~ 1648년 10월 24일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선제후
1623년 2월 25일 ~ 1651년 9월 27일
배우자
로렌의 엘리자베트 (1595년 결혼 / 1635년 사망)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아나 (1635년 결혼)
자녀
페르디난트 마리아, 막시밀리안 필리프 히로니무스
아버지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5세
어머니
로렌의 르네
형제
마리아 아나, 필리프 빌헬름, 페르디난트, 카를, 알브레히트 6세, 막달레네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막시밀리안 1세(바이에른) 서명.svg
1. 개요
2. 생애
3. 자녀



1. 개요[편집]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초대 선제후.


2. 생애[편집]


바이에른 공국 공작 빌헬름 5세와 로렌 공국 출신 레나타의 맏아들로 가톨릭에 헌신했던 부친 빌헬름 5세가 본인이 지은 미하엘 교회(Jesuitenkirche St. Michael)로 물러나면서 바이에른 공작이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잉골슈타트 대학교 동창 사이로, 팔츠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5세[1]에게 제위를 제의받은 적도 있으나 거절하고 페르디난트 2세의 편을 들어 프리드리히 5세가 가졌던 선제후 직위와 오버팔츠를 얻었다.

재산이 1천만 플로린에 달했는데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20년분의 궁정 예산과 맞먹었다고 한다.그리고 이 재산을 30년 전쟁 때 페르디난트 2세의 편에 서서 다 날리고 만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팔츠 선제후 직위는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 카를 1세 루트비히에게 되돌아갔으나 바이에른 선제후 직위와 팔츠 선제후국으로부터 빼앗은 오버팔츠는 그대로 유지했다.


3.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페르디난트 마리아
(Ferdinand Maria)
1636년 10월 31일
1679년 5월 26일
사보이아의 헨리에테 아델라이데
슬하 2남 2녀
2남
막시밀리안 필리프 히에로니무스
(Maximilian Philipp Hieronymus)
1638년 9월 30일
1705년 3월 20일
모리시네 페보리네 드 라 투르 오베르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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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헤미아 국왕으로는 베드르지흐 1세(Bedřich Falcký)로 불렸으며 막시밀리안 1세와 프리드리히 5세는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이다. 그러나 팔츠계와 바이에른계는 선제후 직위, 란츠후트 계승 전쟁으로 촉발된 영지 상속 문제, 를 두고 으르렁거려 대대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