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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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일구.jpg
성명
박일구(朴一求)
생몰
1898년 11월 16일 ~ 1942년 1월 8일
출생지
전라남도 장성군 진동면 산동리
사망지
전라남도 장성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박일구는 1898년 11월 16일 전라남도 장성군 진동면 산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초 김강, 김철(金鐵)·최병준·최한영(崔漢泳) 등이 주동한 광주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참여해 독립선언서·태극기·격문·애국가·독립운동가 등을 밤낮으로 인쇄하는 한편 각 학교 학생과 읍민에게 시위 취지를 알렸다. 이윽고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 아래의 작은 장터에는 기독교인과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須彼亞女學校)·농업학교 학생 및 일반 주민이 모여들어 독립만세 시위군중은 1천여명을 넘었다.

이때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준 다음,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안을 행진하였다. 점점 시위군중이 늘어나고 시위대열이 시장에서 읍내로 빠져나가 만세시위를 계속하였으나, 일본헌병·경찰은 시위대열의 기세에 눌려 감히 시위를 제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저녁, 시위군중과 함께 읍내를 돌아 경찰서 앞에 이르자 많은 경찰과 기마헌병이 출동하여 김철 등의 주동자를 연행하여 갔다.

이에 그는 분노한 군중과 함께 경찰서 마당으로 돌진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외쳐대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재향군인과 소방서원까지 투입하여 총칼로 시위를 제지하니 시위대열이 무너졌다. 이때 체포된 그는 1919년 9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장성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2년 1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박일구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