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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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9년 2월 16일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답곡1리[1]
사망
1934년 11월 16일
경상북도 영양군
본관
무안 박씨
이명
박병량(朴秉亮)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박주억은 1909년 2월 16일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답곡1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7년 6월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산하 영양청년동맹의 석보지부(石保支部) 집행위원과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영양지회(英陽支會) 집행위원을 지냈다.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거족적인 항일독립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던 1930년 2월 8일, 그는 이태을(李太乙)·박수봉·이돌몽(李乭蒙) 등의 동지와 함께 영양청년동맹의 석보지부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국내정세와 독립운동의 방안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일제의 총독정치는 한민족을 억압하여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현재 광주학생운동의 양상을 볼 때 일제가 한국인 학생만을 구속하거나 퇴학처분하고 있으며 광주는 물론 전국에서 학생과 민중들이 함께 궐기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므로 석보면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펴야한다는데 뜻을 함께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동년 2월 11일 석보면 원리동의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일제의 총독정치를 반대하는 격문 8백여매를 인쇄하여 거사 당일 장터에서 2백여명의 군중에게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이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혀 1930년 4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34년 11월 1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박주억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무안 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박종길도 이 마을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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