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우스 막시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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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Valerius Maximus)
출생
미상
사망
미상
직위
학자

1. 개요
2. 생애
3. 아홉권의 기억에 남는 행동과 말(Factorum et dictorum memorabilium libri IX)



1. 개요[편집]


서기 1세기경에 활동한 로마 제국의 역사가. 로마 공화국 후기와 로마 제국 초기의 인물들의 행적을 다룬 <아홉권의 기억에 남는 행동과 말>의 저자이다.


2. 생애[편집]


기원과 전반적인 생애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이름에 주목하여 부계로 발레리우스 씨족의 피를 물려받았고 모계로 파비우스 막시무스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명문 귀족이었을 거라 추정하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그가 발레리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로서 기원전 195년 호민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타포네스의 후손이거나 이후에 발레리우스 씨족의 클리엔테스로 들러온 평민이었을 거라 추정한다. 그는 서기 14년 집정관을 역임한 뒤 아시아에 총독으로 부임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1]의 눈에 띄어 폼페이우스의 문인이 되었고, 뒤이어 티베리우스 황제의 궁정에 입회했다. 24년에서 31년 사이에 저서 <아홉권의 기억에 남는 행동과 말>을 집필했다고 하며, 그 외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3. 아홉권의 기억에 남는 행동과 말(Factorum et dictorum memorabilium libri IX)[편집]


파일:9권의 기억에 남는 행동과 말.jpg

저서 <아홉권의 기억에 남는 행동과 말>은 로마 공화국 후기와 로마 제국 초기에 활동한 로마와 그리스 등 타국의 저명한 정치가, 장군들의 일화 모음집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을 집필한 경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가장 기억할 가치가 있는 로마와 다른 나라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들의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과 명언들을 수집하기로 결심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널리 흩어져 있어서 한 번에 파악하기 어렵다. 그들의 본보기를 기꺼이 따르는 사람들이 이를 수색하느라 들이는 수고를 덜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을 지나치게 열망하지는 않았다. 누가 작은 책에 여러 해 동안의 행적을 기록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우리의 전임자들이 그렇게 행복한 방식으로 해왔던 국내외 역사의 과정을 더 큰 주의를 기울이거나 더 풍부한 웅변으로 전달할 수 있는 현명한 사람이 있을까? 그러므로 신들과 인간의 동의로 바다와 땅의 위대한 사령관으로 임명되시어 나라의 안전을 유일하게 보장해주시는 카이사르의 뜻에 따라 내 일을 시작했다.

신성한 섭리로 내가 이야기할 미덕은 가장 호의적으로 소중히 여기며 악은 가장 가혹하게 처벌된다. 고대 웅변가들이 전능한 제우스로부터 시작했다면, 가장 뛰어난 시인들이 항상 그들을 돕기 위해 특정한 신을 불렀다면, 나의 작은 일은 카이사르의 보살핌을 받으며 시작한다. 우리 의견으로만 숭배되는 다른 신들에 비해, 카이사르는 카이사르의 아버지와 카이사르의 조부의 별과 동등하게 빛나고 찬란한 광채가 우리 종교의 의식에 적지 않게 더해 주었다고 본다. 다른 것들은 신을 위해 받고, 카이사르는 그렇게 만든다. 신에 대한 숭배로 시작하는 것이 나의 의도이기 때문에 그 본질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제 1권은 신들을 잘 섬기지 않았다가 징벌을 받은 사례 등 로마 다신교와 관련된 일화들이 서술되며, 그리스, 동방 등 타 종교에 관한 이야기도 실렸다. 제 2권은 결혼, 행정관, 군대, 군사 규율, 외국의 관습 등 사회 규범에 대해 다뤘다. 이후 제 3권부터 제 7권까지는 조상의 미덕을 준수한 로마인과 그렇지 못한 로마인들의 일화를 쭉 나열했고, 제9권에서는 재판에서 벌어진 일화들을 소개한 뒤 예술과 영광에 대한 열망, 삶에 대한 갈망과 특이한 죽음 등 여러 일화를 밝혔다. 또한 각 파트 마다 부록 형식으로 그리스, 동방 등 외국의 사례를 소개했다.

이 이야기들의 주요 출처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 폼페이우스 트로구스의 저서였는데, 특히 키케로와 리비우스에게 크게 의존했다. 역사적 인물들의 일화들을 대폭 담아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수사학적으로 과장하거나 왜곡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으며, 심지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해 신빙성이 지극히 떨어진다고 평가한다. 일례로, 기원전 100년 12월 집정관 선거에 당선된 가이우스 멤미우스를 살해한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 원로원에 호응한 귀족들이 포로 로마노에 집결했을 때, 당시 고령이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가 거의 걸을 수 없는 몸상태임에도 무장한 채 집합 장소에 나타났다.

막시무스는 이 이야기를 대폭 부풀리고 왜곡했다. 이에 따르면, 스카우루스는 마리우스에게 직접 찾아가서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토벌해 공화국을 수호할 것을 요청했으며, 마리우스가 이를 받아들이자 노예에게 갑옷을 가져오라고 요구했다. 그는 갑옷을 입고 거의 쓰러질 뻔했지만 손에 창을 들고 원로원 입구 앞에 서서 반군과 맞섰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던진 돌에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고, 동료들은 이에 분노해 사투르니누스 일당을 처단했다고 한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그 다음 대목에서 죽었다던 스카우루스가 5년 후 전임 호민관 가이우스 노르바누스의 재판에 참여한 사실을 거리낌없이 기술했다. 그 외에도 단순한 뜬소문을 그대로 싣거나 모순되는 이야기를 검증 없이 다루기도 하는 등 여러 문제가 있기에, 역사서로서 가치는 지극히 떨어진다.

그럼에도 학계에서는 이 저서를 참고할 만한 고대 사료로 취급한다. 비록 내용이 매우 부정확하고 모순적이지만, 종종 현존하지 않는 역사가들의 사료를 인용했고, 헬레니즘 예술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등 유익한 정보도 여럿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질서와 체계가 잘 유지되고 '조상의 미덕'이 잘 준수되었던 전성기 공화정을 그리워하면서도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첨해야 하는 심경이 군데군데 드러나기에, 당대 로마 지식인들의 속사정을 어느정도 살펴볼 수 있다.

막시무스의 저서는 중세에 큰 인기를 끌어 수많은 필사본이 유럽 각지에서 집필되었다. 현재 600개의 사본이 남아있는데, 대부분의 사료는 중세 후기에 작성되었지만 30개는 12세기 이전에 작성되었다. 이 중 3개의 가장 오래된 필사본은 원본과 가장 근접하다는 평을 받는다. 램브란트 등 많은 화가는 남편이 사망한 뒤 그의 뼛가루를 포도주에 타서 마셨다는 아르테미시아 2세 등 이 책에 담긴 여러 일화를 모티브로 삼은 여러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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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르마니쿠스와 절친한 친구로, 문학에 깊은 관심을 품고 많은 문인들과 교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