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타사르 후브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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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thasar Hubmaier

1480년생, 종교개혁가.

1512년 잉골슈타트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으며, 1515년에는 같은 대학에서 부총장이 된다. 또한, 1516년에는 카톨릭 사제가 된다.
1522년에는 에라스무스, 1523년에는 츠빙글리를 만나면서 종교개혁적인 변화를 겪게 되는데, 종교개혁적인 입장은 동일하지만 츠빙글리와는 성서적으로 충분하게 따르지 않는다면서 츠빙글리의 적극적인 대립자로서 세상에 나타나게 된다. 츠빙글리는 국가의 의견에 어느정도 동조해야된다는 입장이었지만, 발타사르 후브마이어는 무조건적으로 성경에 입각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1525년 유아셰례를 부정하였다는 죄목에 따라 감옥에 수감된다. 1525년 1월 17일에는 의회에서 모든 유아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세례받을 것을 명령했고, 발타사르 후브마이어와 펠릭스 만츠 등 의회의 종교적 명령의 거부의 표현으로서 재침례파끼리 서로 모여서 서로 세례를 나눴다.

루터교회와 성공회 등은 국교회적 성격, 장로교회는 계층적(위계적) 성격이 강했는데 그에 비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반국가적인 특성과 반위계적 성격을 주장했기 때문에 당시 시대상을 기준으로서는 극단적인 종교개혁으로 치부되었다.

폭력과 법 그리고 국가가 아닌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 평화주의자가 되기를 자처하는 이유는 산상수훈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도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많은 재침례파는 퀘이커와 같이 영적 체험을 중심으로 하는 형태로 변질되었지만, 발타사르 후브마이어는 보수적인 의미로서 성경을 따랐기 때문에 소수파로서만 남게되었다. 그러나 재침례파와 침례교의 토대를 두는 많은 발상이 발타사르 후브마이어로부터 시작되었다.

재침례파로 불리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침례파라고 불렀으며, 멸칭의 의미로서 재침례파라고 불렸다.

그는 1524년부터 1527년까지 여러 서적을 펴냈는데, 공통적으로 모든 서적마다 "Truth is immortal"이라는 문구를 삽입하였다.

감옥을 출소한 이후에도 유아세례, 성만찬, 연옥에 대한 부정은 지속되었는데 이에 따라 1527년에 체포 1528년에 화형으로 삶을 마감했다.

여러 종교개혁자 중에서도 그는 재침례파라는 신교 중에서도 비주류를 택하였기 때문에 여러 모면을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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