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강 폰 트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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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前 F1 드라이버


파일:Wolfgang von Trips.jpg

이름
볼프강 폰트립스
Wolfgang von Trips
본명
볼프강 그라프 베르게 폰트립스[1]
Wolfgang Graf Berghe von Trips
출생
1928년 5월 4일
독일 라인란트
국적
독일 파일:독일 국기.svg
사망
1961년 9월 10일 (향년 33세)
이탈리아 몬차
소속
드라이버
(F1)

페라리 (1956~1961)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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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횟수
29경기
월드 챔피언
0회
그랑프리 우승
2회
포디움
6회
폴 포지션
1회
패스티스트 랩
0회
첫 경기
1956년 영국 그랑프리
첫 그랑프리 우승
1961년 네덜란드 그랑프리
마지막 그랑프리 우승
1961년 영국 그랑프리
마지막 경기
1961년 이탈리아 그랑프리


1. 개요
2. 사망
3. 기타



1. 개요[편집]


독일의 전 포뮬러 1 드라이버. 1956년에 데뷔하여 1961년까지 활동하였다. '귀족 스포츠'로서의 포뮬러 1을 대표하는 인물로, 'von'이 붙는 성씨에서 알 수 있듯이 정말로 독일 귀족이었다.

1956년 F1에 데뷔한 후 한두 경기씩 띄엄띄엄 출전하다가 1958년 마지막 6경기 중 5경기에 연달아 참여했고, 1960년부터 페라리 워크스 소속으로 풀 시즌 참가를 시작하게 된다. F1 말고도 F2와 타르가 플로리오 등의 경기에 출전하며 우승하기도 했고, 1960 F1 챔피언십 시즌에서 남들 다 리어 미드십으로 넘어가는 와중에 프론트 엔진이었던 디노 246으로 수 차례의 포인트 피니시를 기록하면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남겼으며, 1961년 페라리가 새로운 규정을 잘 해석하여 위닝 카를 내놓자 우승권에서 다투기 시작한다.

1961 챔피언십 시즌의 2라운드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첫 우승 컵을 들어올린 것을 시작으로 우승과 2위를 각각 2번 달성하였고, 팀메이트 필 힐과 챔피언 경쟁을 하였다. 7라운드 이탈리아 그랑프리를 앞두고 폰트립스는 33포인트, 힐은 29포인트로 폰트립스가 챔피언십을 리드하고 있었고, 경기 하나에 배정되는 포인트가 적었던 당시로서는 폰트립스의 우승 가능성이 매우 높게 점쳐지는 상황이었다.


2. 사망[편집]


그러나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레이스 도중 짐 클락과 충돌해 관중 무리를 전복된 채로 휩쓸면서 15명의 관중과 함께 사망하였다. 필 힐은 이 그랑프리에서 우승하여 34포인트를 만들었다. 페라리는 8라운드이자 최종전인 미국 그랑프리에 참전하지 않았고, 어쨌거나 폰트립스의 사망으로 힐이 1961년 월드 챔피언이 되었다. 관중과 연관된 사고가 적었던 F1에서 관중이 무려 15명이나 사망한 사고였고, 르망 참사의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당시에 난리가 났었다. 클락은 이 일로 인해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사고였다며 클락을 변호했지만 클락도 크게 동요했다고 한다.[2] 초창기 F1이 잃은 수많은 보석들 중 하나. 특히 챔피언을 눈앞에 두고 사망한 만큼 많이 아쉬운 드라이버이다.

3. 기타[편집]


  • 진단 받은 적은 없지만 당뇨가 있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배고프면 쓰러지는 경우도 있었다.[3] 때문에 경기 도중 혈당이 낮아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항상 경기 전에 단것을 먹었다.
  • 제2차 세계 대전 때 자기 성에 침입한(...) 미군들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따라서 유럽인이지만 미국식 영어를 구사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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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더 긴 본명은 볼프강 알렉산더 알베르트 에두아르트 막시밀리안 라이히스그라프 베르게 폰트립스(Wolfgang Alexander Albert Eduard Maximilian Reichsgraf Berghe von Trips)였다.[2] 클락은 1960 벨기에 그랑프리에서 앞에서 사고가 나 트랙 위에 널브러진 드라이버의 시체를 칠 뻔하고 간신히 피한 적도 있었는데 폰트립스와의 사고까지 겪게 되어 심적으로 좋지 않은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3] 부모님이 집 밖에서도 자식이 잘 먹고 다니길 위해 학교 근처 호텔에 매달 돈을 지불하고 아들이 배고플 때 밥을 먹을 수 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