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산 공위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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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전개
4. 영향



1. 개요[편집]


Sasanian Interregnum.

630년 아르다시르 3세가 시해된 뒤 632년 야즈데게르드 3세가 즉위할 때까지 2년간 12명의 샤한샤가 등극하고 폐위된 대혼란기.[1] 로마-페르시아 전쟁의 패전 후 쇠락해가는 사산 왕조를 재기불능으로 몰고간 결정적인 사건이다.


2. 배경[편집]


628년 6월 말, 호스로 2세이라클리오스가 크테시폰 목전에 이르렀는데도 전쟁을 지속하겠다며 패전한 장수와 장병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노예들을 대거 징집하여 크테시폰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려고 했다. 이에 귀족들은 더 놔두었다간 나라가 망하겠다고 판단하여 6월 23일에서 24일 밤 쿠데타를 일으켜 호스로 2세를 체포하여 요새에 가두고, 그때까지 궁궐 내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던 호스로 2세의 아들 셰로예를 구출했다. 셰로예는 마르단샤를 비롯한 이복형제들을 모조리 처형하도록 하고, 6월 28일 미르 호르미즈드를 시켜 호스로 2세를 처형했다.

그 후 카바드 2세를 칭한 그는 네스토리우스파 주교들로 구성된 사절을 이라클리오스에게 보내 평화협정을 맺기를 원한다고 알렸다. 이라클리오스는 배상금 지불, 모든 포로의 석방, 예루살렘에서 탈취한 성십자가 반환, 사산 왕조가 빼앗아간 모든 영토 양도, 수비대와 야전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카바드 2세는 즉각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이라클리오스는 만족한 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이후 카바드 2세는 그동안 전란에 시달린 백성들을 위해 3년간 세금을 면제하겠다는 칙령을 반포하는 등 민심을 수습하려 했으나, 재위 2개월여 만인 628년 9월 6일, 메소포타미아 인구의 1/4 ~ 1/2를 죽음으로 내몬 쉬라와이흐 역병(Plague of Shirawayh)에 걸려 붕어했다.

7살의 어린 아들 아르다시르 3세가 귀족들의 추대로 샤한샤에 올랐고, 유력한 대신 마아드후르 구슈나프가 섭정을 맡았다. 당시 사산 왕조는 동로마 제국과의 기나긴 전쟁을 치른 여파로 매우 피폐해졌고, 군대는 전장에서 모조리 소모되었다. 그나마 건재한 군대는 샤흐르바라즈 휘하 부대밖에 없었다. 아랍인과 튀르크인은 이 기회를 틈타 사산 왕조의 남부와 북부를 수시로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고, 629년엔 튀르크계 하자르족이 캅카스로 쳐들어왔다. 샤흐르바라즈는 직접 캅카스로 진군해 하자르족을 격파했다. 이에 민심은 샤흐르바라즈에게 쏠렸고, 님루지 가문은 그를 샤한샤로 추대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사산 왕조 역사상 최악의 혼란기가 시작되었다.


3. 전개[편집]


630년, 샤흐르바라즈이라클리오스와 협약을 체결하고 성십자가를 정식으로 넘긴 뒤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크테시폰으로 진군하여 도시를 포위했다. 그해 4월 29일 크테시폰은 함락되었고, 이제 9살이 된 아르다시르 3세, 마아드후르 구슈나프, 그리고 수많은 귀족들이 처형되었다. 이후 샤흐르바라즈는 샤한샤를 칭했고, 아들 니키타스를 후계자로 지정했다.

그러나 40일 후인 630년 6월 9일, 이스파부단 가문의 수장이었던 파루크 호르미즈드호스로 2세의 딸이자 아르다시르 3세의 고모인 푸란도흐트를 샤한샤로 추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크테시폰에서 시가전이 한창 벌어지던 중, 샤흐르바라즈는 파루크 호르미즈드가 던진 창에 맞아죽었다. 이리하여 사산 왕조 역사상 첫 번째 여제가 된 푸란도흐트는 전권을 파루크 호르미즈드에게 위임한채, 공정한 법을 시행했으며, 기반 시설을 재건하고, 세금을 줄이며, 주화를 주조함으로써 제국의 안정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전사한 샤흐르바라즈의 아들인 샤푸르 샤흐르바라즈가 아버지를 따르던 무리를 수습한 뒤 크테시폰으로 쳐들어오는 바람에 폐위되었고, 파루크 호르미즈드는 근거지로 달아났다.

샤푸르 샤흐르바라즈는 샤한샤를 칭했지만, 얼마 후 파르시그 가문의 피루즈 호스로에 의해 폐위되었다. 피루즈 호스로는 호스로 2세의 또 다른 딸인 아자르미도흐트를 샤한샤로 추대했다. 파루크 호르미즈드는 파르스의 이스타크르와 메디아의 나하반드에서 샤한샤를 자칭하며 그녀에 대항하면서도,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고 파르시그 가문과 화해하기 위해 아자르미도르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받아들이길 꺼렸고, 바흐람 추빈의 손자 시야바흐쉬와 손을 잡고 파루크 호르미즈드를 살해했다. 이후 그녀는 샤푸르 샤흐르바라즈에게 청혼했고, 샤푸르도 호의를 표했다.

그러나 631년 호라산 북동부에 주둔하고 있었던 파루크 호르미즈드의 아들 로스탐 파로흐자드가 크테시폰으로 쳐들어가 입성했다. 아자르미도흐트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체포된 뒤 실명형에 처해진 후 곧 살해되었다. 이후 로스탐은 푸란도흐트를 샤한샤에 복위시켰다. 푸란도흐트는 재위에 오른 뒤 로스탐을 국가의 지도자이자 군사령관이라고 선언하며 전권을 그에게 맡겼다. 아랍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로스탐에게 10년간 통치권을 맡기되, 그가 남자 후손을 갖지 못한다면 자신에게 통치권을 돌려줘야 한다는 협약을 맺었다고 한다. 또한 동로마 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여호수아 2세를 비롯한 페르시아 교회 장로들이 포함된 사절단을 이라클리오스 황제에게 보냈다. 이라클리오스는 이들을 환대해줬고, 양국이 앞으로도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쓰겠다고 했다.

그러나 632년, 로스탐의 섭정에 불만을 품은 파르시그 가문이 푸란도흐트의 복위 후 해임되었던 바흐만 야두야를 앞세워 정변을 일으켰다. 푸란도흐트는 체포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루즈 호스로에 의해 교살되었다. 이후 로스탐과 피루즈 호스로는 각각 사병을 이끌고 크테시폰을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결전을 벌였다.

이렇듯 수도 크테시폰이 샤한샤의 거듭된 교체와 내란으로 혼란에 휩싸인 사이, 지방에서도 야심가들이 들고 일어났다. 제국의 동방에서는 호스로 3세가 들고 일어나 3개월간 샤한샤를 칭하다가 파루크 호르미즈드에게 처단되었으며, 페로즈 2세는 그의 어머니가 사산 가문 출신인 점을 들어 샤한샤를 칭했다가 얼마 안가 배신한 추종자들에게 살해되었다. 한편 니시비스 등 이란 중부 등지에서는 호르미즈드 6세가 630년부터 632년까지 할거하며 동전을 독자적으로 주조했다.

이런 혼란상을 보다못한 귀족들은 로스탐과 피루즈에게 이러다간 나라가 망하겠다며 모두가 만족할 만한 이를 샤한샤로 추대하자고 요청했다. 두 사람은 교전을 중단한 뒤 협의 끝에 교살당한 푸란도흐트의 조카였던 야즈데게르드 3세를 옹립하기로 했다. 하지만 혼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수도 크테시폰에서는 호스로 4세가 힘의 공백을 틈타 샤한샤를 자칭했다가 야즈데게르드 3세를 옹립한 귀족들에게 곧 토벌되었고, 이란의 서부와 중부 일부 지역에서는 파루카자드 호스로 5세를 추종하는 무리가 야즈데게르드 3세에게 복종하길 거부하고 639년까지 독자적으로 동전을 주조했다.


4. 영향[편집]


628년 호스로 2세가 시해된 뒤 632년 야즈데게르드 3세가 즉위할 때까지 샤한샤가 잇달아 교체되면서, 중앙 정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제국을 구성하는 각 지방의 통치자들은 노골적으로 정부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마준과 예멘의 총독들은 공위 시대에 이미 독립을 주장했고, 다른 지역 역시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포만 하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독립국이나 다름없었다. 아랍족과 하자르족 등 외세는 이 틈을 타 제국을 수시로 침략하여 많은 재물과 영토를 뜯어갔다. 결국 사산 왕조는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고, 이슬람의 폭풍에 삼켜졌다(이슬람 제국의 페르시아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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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시기의 샤햔샤들은 재위 기간이 겹치는 경우가 많은데 제국 곳곳에서 각자 샤한샤를 참칭한 이들이라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