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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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기능과 유래
3. 역사와 현재
3.2. 노동운동
4. 철거현장
5. 주요 사수대 목록
6. 관련 매체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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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과 맞서는 사수대[1]

死守隊

군사정권 시절이었던 1960~80년대 운동권에서 존재한 조직. 실제로는 90년대 후반까지 존재했다. 통칭 사수대라고 불리는 형태의 조직은 학생운동에만 있었던 건 아니며 21세기에도 격렬한 시위가 벌어질 때마다 찾을 수 있다. 물론 20세기처럼 각종 무기로 무장하는 형태는 찾아보기 어렵다.


2. 기능과 유래[편집]


사수대들의 역할은 시위현장에서 경찰병력에 대한 선제적인 물리공격이 아니라 진압이 들어올 때 대오가 후퇴하는 동안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이름만 봐도 위치를 사수하는 게 목적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경찰병력이 투입되기 전에는 오히려 대오 앞에 위치하기보다는 약간 뒤쪽에서 경찰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다가 진압이 시작되면 사수대가 나서서 진압병력을 막고 나머지 대오는 도망가거나 계속해서 가두행진을 진행하는 형태였다.

본래 가두시위가 벌어지면 시위대는 행진하면서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의사를 알리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스크럼을 짜고 행진하는 것이 주 목적이 된다. 그런데 알다시피 군사정권 하에서는 시위나 집회 자체가 허용되지 않았고[2] 시위 허용/불허는 경찰서장 판단에 달려 있었다. 당연히 당시 경찰은 시위현장을 덮어놓고 때려잡기 일쑤였다.

이쯤 되자 운동권들 사이에서는 자구책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시위대가 안전하게 시위하도록 경찰의 공격적 시위를 지연할 맨 앞에서 지휘하고 본대를 보호하기 위해서 직접 몸빵을 담당하는 전문적인 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초창기에는 시위가 일어날 때마다 급조했지만 학생운동이 점차 체계화되고 전문화되는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일정한 편제와 체계를 갖춘 상설적인 준군사조직과 반쯤 비스무리한 조직으로 거듭났다. 이들은 매년 전대협/한총련 출범식 때마다 의장을 호위하는 경호원 역할도 했다.


3. 역사와 현재[편집]



3.1. 학생운동[편집]


기록에 따르면 1960년대에는 체육대학 출신들이 가담하는 일이 많았고 1970년대부터 점점 일정한 체계와 전술을 지닌 학생회장이나 이념서클 회장들 중심으로 조직이 되더니 80년대 후반쯤에는 상설하는 준군사조직급으로 정착했다. 각 대학별로 조직적인 사수대[3]가 형성된 것은 민주화가 이루어진 80년대 후반이다. 서울 지역에도 한양대, 고려대, 성균관대, 중앙대를 필두로 큰 학교일수록 잘 조직된 사수대가 있었지만, 당시 가장 유명한 사수대는 전남대 '오월대' 및 조선대 '녹두대'가 있다. 이들은 대학신문에 사수대 모집광고를 대놓고 실어 건장하고 싸움 잘 하고 뜻이 투철한 학생들을 선발했고 산 등지에서 실전 및 운동권 이론학습을 겸비해 합숙훈련을 했다.

이런 사수대는 가두투쟁에만 운용되는 것이 아니라 전대협/한총련 출범식 시에 의장을 호위하는 경호원 역할에, 대학 축제 때 취객을 단속하는 등, 평상시에는 학내 치안을 담당하기도 했다.[4] 특히 녹두대(조선대학교), 오월대(전남대학교) 같은 유명한 사수대 리더들은 경찰이 신원과 소재를 파악하고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며 항상 친위대를 10~20명씩 우르르 달고 다니거나 그들을 비호하는 시민들도 매우 많았다.

물론 사수대뿐만 아니라 본래 이 두 학교의 학생시위 자체가 매우 조직적이고 격렬하며 횟수도 매우 빈번하기로 유명해서[5] 대응 경험이 있는 광주광역시/전라남도 지방경찰청 소속 전투경찰 부대가 아니면 진압할 엄두도 내질 못했다고 한다. 보통 최루탄지랄탄을 쏘고 진압을 시작하면 시위대가 물러서는 것이 대부분인데 광주지역 사수대들은 자리를 대오가 흩어지지 않고 있어 최루탄이 걷힌 후 진압을 하려던 서울지역 경찰들이 경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백골단 수십 명이 수백 명의 시위대를 해산시켰다는 무용담처럼 수천명의 경찰병력을 수 백명의 사수대가 뚫고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1989년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열린 평양축전 출정식 집회에서는 전투경찰이 학교를 원천봉쇄하자 기습적으로 지하철 선로를 통해서 시위대가 학교로 진입[6]하였고 행사가 끝난 뒤에 학교를 포위한 경찰들을 사수대가 막는 사이 임종석 의장 이하 지도부가 오월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탈출한 이야기는 꽤나 유명한 일화다. 일명 "환상의 진입, 영광의 탈출"이라고 해서 86세대에선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이야기. 참고로 이 집회에서 임종석 제3기 전대협 의장이 임수경의 평양 방북을 공개하여 전사회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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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이후 시위가 격화되고 사수대들도 조직화되면서 경찰들을 상대로 하는 전술과 장비가 날로 발달해 갔고 경찰들도 이에 맞서 불법으로 장비를 개조하는 경우도 많았다.[7] 1980~90년대 내내 시위대와 전투경찰의 시가전이 계속 이어지면서 양쪽 모두 무장이 점점 흉악해졌고 충돌할 때마다 피해자가 날로 늘어나면서 서로에 대한 적개심도 계속 커지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정점을 찍었던 게 1996년 연세대 사태와 1997년 한총련 출범식 사태로 피가 피를 부르는 헬게이트가 펼쳐졌다.

일반적으로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대인 1980년대의 시위가 가장 과격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정권은 아직 군부독재 세력의 후예들인데 어느 정도의 제도적 민주화로 약간의 숨통이 트인 상황에서 학생운동 세력이 전대협-한총련으로 결집해서 과거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동원력을 자랑하던 90년대 초중반에 가장 격렬했다.

이러한 현상의 정점을 찍은 것이 1996년 연세대 사태이며 학생들의 폭력적인 모습과 - 비록 경찰들의 봉쇄에 의해 극한 상황에 몰려 있었다고 하더라도 조직적인 모습에 전 국민이 큰 충격을 받았으며 상황이 날로 악화되던 학생운동권에 실질적으로 사형선고를 내리게 되었다. 이들은 연세대 사태 이후 '비(운동)권 총학생회' 흐름과 함께 그 특유의 경직성, 군사문화와 80~90년대의 시대적인 촌스러움 때문에 2000년 이후엔 거의 대부분 학생운동권 세력과 함께 와해되어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2000년 이후에는 21세기라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와 더 이상 그런 촌스럽고 폭력적인 시위를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수대는 시위를 하려면 누구든지 목숨을 걸어야 했던 비상식적인 시대인 80~90년대의 필요악이자 자구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학교 별로 역사가 오래된 동아리방이나 과방에는 캐비넷안에 시위에서 얻은 진압봉, 방패, 최루탄 등 경찰장비를 보관하던 경우도 있었다고 하며 예전 사진을 보면 학교 사수대가 경찰장비를 빼앗아 무장한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가끔 인터넷상에 전경VS사수대, 백골단VS녹두대, 오월대 혹은 누가 더 전투력이 강했느니 하는 글이 올라오곤 하는데 애초에 처음부터 경찰력과 물리력으로 대항하기 위해서 형성된 조직이 아니라 최소한으로 피해를 줄이고자 만든 조직이기 때문에 이러한 글은 무의미하다. 당시는 디지털 카메라폰카메라가 존재한 시절도 아니고 필름 카메라만 존재해씅므로 시위대가 전경을 무장해제시키는 사진이 거의 없다시피하다. 시위현장이 담긴 사진은 대부분 당시의 기자경찰 측에서 찍은 사진이다. 시위대 수가 압도적으로 많거나 하면 당연히 경찰들의 물리력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무장해제가 일어날수도 있지만 애초에 훈련과 장비질이 월등한 경찰력을 물리력으로 이기려고 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다.

3.2. 노동운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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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운동권에서는 사라졌지만 현재도 격한 시위가 벌어지는 현장[8]에서는 파이프로 무장한 사수대가 보이기도 하는데 생존권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시위의 격렬함이 상상 이상이다. 겪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2000년대 이후 학생운동권의 시위는 촛불집회나 별로 다를 바가 없이 얌전한 편이다.

특히 쌍용자동차 사태 당시 쇠파이프와 하이바로 무장한 사수대가 경찰과 대치하고 경찰특공대가 투입되는 등 80~90년대의 시위 현장을 방불케하는 진압사태가 일어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수대의 역할이 반전되어 사측이 꾸린 결사대가 바로 구사대다.

4. 철거현장[편집]


2000년대 이후에도 재개발 지역의 강제철거 현장은 시리아를 방불케 하는 전쟁터다. 죽느냐 사느냐의 극한 상황에 몰린 철거민, 도시빈민들이 망루를 쌓고 사수대를 만들어서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경우가 많으며 경찰의 강제진압 상황에서 사상자가 속출하곤 한다. 단지 제도권 언론이 보도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묻히는 경우가 많으며 그나마 알려진 게 용산 참사다.

5. 주요 사수대 목록[편집]


각 대학의 사수대들은 기본적으로 전대협~한총련의 단위 조직(각 지역 총련)으로 연합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서총련(서울)에는 서북총련, 서남총련, 동총련, 북부총련 등으로 구성되어 1994년 당시 각 서울 지역총련들은 최대 천 명 단위의 사수대 구성을 가지고 있었고 광주의 전남대 오월대와 조선대 녹두대는 각각 천 명 수준의 구성을 가진 걸로 알려져 있었다. (1994년 서울대 5차 범민족대회 당시 참가 인원) 각 사수대는 말하자면 상비 병력과 예비 병력으로 되어 있었고 상비 병력은 실제 준군사조직에 가까운 훈련을 했다. (구보, 무술, 최루탄 적응 등)

1997년까지 편제는 진달래(농대,인문대), 비호(공대), 불꽃, 죽창(동아리) 등 4개 중대였고 1중대당 100~200명씩 500백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1988년 4.19 집회 때 처음 각목 등으로 무장하며 사수대의 모습을 한 오월대 조직이 만들어졌다.

1997년까지 편제는 자주, 민주, 통일 3개 중대로 구성되었다.





















6. 관련 매체[편집]


  • 소설 <오월대> - 한유진, 이서하 저. 도서출판 힘.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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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사진은 연세대 사태 당시의 것이다.[2] 1962년 집시법 제정 후 공공건물 근처만 규제했으나 1980년 12월 개정 후 규제대상을 '도로 및 옥외장소'로 확대하며 규제 기준에 '~할 우려가 있는' 같은 추상적 표현을 썼다.[3] 당시에는 '전조' 혹은 '소크(SOC)'라고 불리기도 했다.[4] 전대협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로, 군사독재 시절 조선대 축제 때 광주지역 조폭들이 조직원의 개인적 시비를 구실로 야구방망이일본도 등으로 무장하고 학교에 진입하여 천막을 뒤엎는 등 난동을 부리자 당시 전국 최강의 사수대로 유명했던 녹두대가 출동하여 특유의 전술 및 조직력과 전투력으로 폭력배들을 개패듯이 두들겨패고 진압하여 무장해제시키고 옷까지 벗겨서 보낸 일이 있었다.[5] 학생운동권이 대부분 사라진 2000년 이후에도 두 학교의 학생운동은 활발하기로는 전국에서도 손꼽힌다.[6]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는 수도권 지하철 2호선 한양대역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당시 시위대 수천명이 지하철 선로 지상구간에 무단으로 진입해서 선로를 따라서 뛰었다. 지하철이 운행 중인데 선로를 무단으로 점거한 것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대형 인명사고가 날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다. 이 때문에 이후에는 학생운동권도 지하철 선로를 무단으로 점거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7] 바닥을 갈아서 날카롭게 만든 방패로 찍는다던가, 진압봉을 개조해서 타격력을 높힌다던가 하는 식.[8] 특히 노동자 시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