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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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비사, 대변설, 조대기,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 삼성밀기, 안함로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도증기, 지리성모, 하사량훈, 문태산왕거인설업 등 삼인기록 수찬기소……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사로운 곳에 간직해서는 안 된다.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자원한 서책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이를 관청과 민간 및 사찰에 널리 알리도록 하라.

『세조실록』 3년 5월 26일


수양산성: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만 856척이고 높이가 18척이다. 세간에 전하길 "옛날에 안함(安咸)ㆍ원로(元老)ㆍ동중(童仲) 세 사람이 터를 보아 쌓았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 해주목

안함(安含), 원로(元老), 동중(董仲) 세 명의 성인을 다룬 기록이라는 것 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오늘날 노원과 동중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안함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등에서 단편적으로 신라승려로 언급되며, 비교적 상세한 전기가 해동고승전에 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안함은 601년부터 625년까지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신라의 승려였는데[1], 축지법을 쓰거나 예언서를 남기고[2] 입적한 다음에는 서방정토로 날아가는 등 각종 기이한 신통력을 부렸다고 한다. 따라서 입적한 뒤에는 아도화상이나 자장율사와 나란히 흥륜사에 모셔져 신라 10대 성인의 한 사람으로 받들어졌다.

이를 기초로 노원과 동중의 정체도 얼마간 짐작해볼 수 있다. 안함은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오면서 서역에서 온 비마라진제[3] · 농가타 · 불타승가와 함께 중국인 승려 두 사람을 데리고 와서 불경을 번역했다고 하는데, 바로 이 두 사람이 노원과 동중일 가능성이 크다. 즉 이들이 안함과 함께 활동하면서 각종 신이한 행적을 남겼고, 그로 말미암아 셋이 하나의 세트로 취급되면서 삼성기라는 책으로 기록이 남았던 것이다.

위와 같은 사실을 종합해보면, 실제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책보다는 홍길동전 같은 전형적인 영웅서사시에 가까웠던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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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함의 귀국 시점에 대해서는 576년(신라본기), 605년(해동고승전), 625년(의상전) 설이 있다. 576년 설은 진평왕 37년(615)을 진흥왕 37년(576)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605년 설은 입당 시점에서 고작 4년 뒤라는 것을 고려할 때 문제가 있어 보인다. 625년 설을 주장하는 최치원의 의상전은 비교적 당대의 기록이기도 하거니와, 재위년수가 아닌 연호로 건복 42년이라 하고 있어 착오가 있었을 가능성이 적다. 따라서 신라본기의 진평왕 37년은 다시 47년으로 보정할 수 있다. 진평왕을 진흥왕으로 오인하면서, 진흥왕은 37년까지만 재위했기 때문에 47년이라 되어 있는 것을 37년으로 바꾸었던 듯하다.[2] 이 예언서에는 선덕여왕의 죽음, 사천왕사의 창건, 김인문의 귀국, 신라의 삼국통일 등이 예언되어 있었다고 한다.[3] 삼국사기에서는 비마라(毗摩羅)로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