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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新羅 Silla |
德業日新 網羅四方 덕업일신 망라사방[1] 덕을 쌓는 일이 날마다 새로워 사방 천지를 아우른다 라는 뜻이다.요즘으로 치면 덕을 쌓아 온 세계로 퍼트린다는 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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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기(상상도)[2] 《삼국사기》 신라 무관 3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신라 사람들의 휘직은 띠를 푸르거나 붉거나 하는 등의 색깔로 구분하였고 모양은 반달의 형상을 취하였다." 깃발은 주로 반달곰 가죽으로 만들었다. 이외에도 신라에선 신궁 이름도 달에 비유해 월성으로 짓고, 신라를 초승달에 비유한 기록도 있어# 여러모로 달을 신라의 상징으로 여기는 기록이 많이 등장한다. 다만 위의 이미지는 텍스트를 근거로 상상해 그린 것으로 정확히 저런 모양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
■ 6세기경 신라의 강역[3] 북동단은 오늘날의 함경남도 리원군으로 마운령비가 세워진 곳이다. |
기원전 57년 6월 8일[4] 갑자년(기원전 57년) 음력 4월 병진일 또는 1월 15일.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건국을 기원전 57년으로 전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역시 동일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 서기 936년 1월 13일[5] 을미(乙未)년 기축(己丑)월 임신(壬申)일로, 음력 935년 12월 12일, 율리우스력으로는 936년 1월 8일이다. 신라의 합병 연도를 일반적으로 935년이라고 하지만, 《고려사》에 의하면 왕건이 공식적으로 신라 합병을 결정하고, 경순왕과 신라 왕족이 제후왕 신분을 완전히 잃는 날은 12월 12일인데, 이를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변환계산 시스템을 이용해 현대에 쓰이는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면 해를 넘겨 936년 1월 13일 금요일이 된다. [6] 다만, 실제 항복과 경순왕의 개성 입조는 935년 11월에 이뤄졌고 이게 936년 1월까지 미뤄진 건 경순왕이 귀부를 요청하고 왕건이 거절하기를 반복하는, 예의상 인사치레를 한 달 동안 했기 때문이다. (약 991년) |
시대 구분 |
진한 사로국 | 삼국시대 신라 | 통일신라 | 후삼국시대 신라 |
성립 이전 | 합병 이후 |
진한 | 고려 |
국호 | [7] '신라'에 해당하는 고유어 음을 한자를 빌려 나타냈기 때문에 '사로(사로국)', '신라', '사라' 등 여러 표기가 혼용되었다. 따라서 진한 12소국 시기의 사로국을 '신라국'이라고 해도 완전히 같은 말이다. → 신라[8] 503년 국호 통일. 이 밖에 일종의 별칭으로, 건국 신화의 발원지이자 신라인의 정신적 구심점인 '계림'이 곧 신라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계림대도독부 등). 계림은 심지어 신라가 고려에 합병된 뒤에도 조선시대까지 한반도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해당 문서로. |
위치 | 경주 분지 계림 일대→ 한반도 동남부[9] 골벌국과 같이 신라에 우호적인 국가가 많았다. 이후 영천의 토착신이 신라에서 행하던 대사(大祀)에서 모시는 3선(仙)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로 골벌국은 신라 사회에서 나름대로 대접을 받았다. ㆍ부속도서[10]→ 한반도 중부 · 남부 ㆍ부속도서[11] 탐라국, 우산도. 탐라국은 672년 통일신라에 자진 복속한다. → 한반도 중부ㆍ북부ㆍ부속도서[12] 676년 나당전쟁 승리(임진강선) → 694년(효소왕3) 송악성 축성(예성강선) → 748년(경덕왕7) 대곡성(오늘날 평산군) 등 축성 → 선덕왕대 패강진(황해도 일대) 개척 → 헌덕왕대 취성군(오늘날 황주군) 신라 말기 진성여왕 시대에 전국에서 호족과 도적떼가 들고 일어나 난세가 시작될 때 금용은 평양성주장군(平壤城主將軍)이었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가 평양을 통치권으로 차지했는지 아닌지는 논란이 있어서, 금용을 발해의 변방 지배자나, 신라나 발해 어디의 간섭도 받지 않던 토착세력 정도로 보기도 한다. 사실 신라도 나당전쟁 끝나고 얻은 영토에서 계속 가만 있었던 건 아니고 주민들 이주시키고 개척하면서 조금씩 북상했기 때문에, 황주에서 평양이 멀지 않으니 아마도 9세기 후반쯤 가면 평양도 통치권에 들어갈랑 말랑 했을 수도 있다고 추측은 가능한 수준. 대체로 남북국시대 지도에는 발해가 평양을 먹은 것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지만 발해 중심지는 매우 먼 상경 용천부였고, 발해가 평양을 지배했다는 근거도 딱히 없고 9세기 후반쯤 가면 발해도 끝물인 건 신라와 비슷했기에 뭐라고 확언하기 어렵다. / 요동 (670)[13] 고구려 멸망 후 신라의 장군 설오유가 고구려 유민과 합세해 요동에 주둔한 당나라를 선제공격해 몇 달간 점령했다. (석문 전투)이 사건이 본격적인 나당전쟁의 시작. → 한반도 동남부ㆍ부속도서[14] 후삼국시대(나말여초) 우산국과 탐라국은 신라에 복속이 되어있는 상태였다가 930년대 우산국의 백길과 토두는 고려에 복속요청, 탐라국은 독자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
수도 | 서라벌(금성)[15] 고구려, 백제와 비교해도 수도의 변동이 없었다. 다만 신문왕 때 달구벌(대구)로 천도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귀족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이는 고려도 마찬가지. |
행정구역 | 6부 5주 2(3)소경[16] 小京. 수도인 서라벌이 동남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거리가 먼 지역의 주요 도시에 설치한 행정구역. 요즘으로 치면 광역시쯤 된다. 558년의 국원소경(충주시) 설치 과정 기록을 보면 서라벌 인근의 부유한 백성을 옮겨서 도시를 키웠다고 한다. 삼국통일 이전에는 514년에 설치한 함안군의 아시촌소경, 충주시의 국원소경, 강릉시의 북소경 3경이 있었으며, 통일 이후에는 옛 고구려 지역이 둘, 옛 백제 지역에 둘, 옛 가야 지역에 하나씩 5소경을 뒀다. 9주 5소경 문서로. →9주 5소경 |
국조 | 닭 (추정)[17] 신라 건국 신화에 계룡이나 백마, 김알지 설화와 신라의 국호(계림, 계괴, 유괴 등)에서 닭이 많이 등장한다. |
종족 | 예맥, 진한인 |
언어 | 신라어 |
문자 | 한자 (이두[18] 설총대에 이두문이 재정립된다. 특히 향가에서는 향찰이라는 형식으로 특화되었다. , 향찰, 구결) |
종교 | 토속 신앙 → 불교(교종[19] 신라에서 원효와 의상으로 대표되는 교종불교가 발달했으나, 하대가 되면서 중국에 유학한 구법승려가 개인주의적, 사회개혁적, 민중지향적인 선종을 수입전파하고 호족들이 선종을 후원, 후삼국시대가 되면서 왕건의 고려는 선종 세력으로부터 사상적 후원을 많이 입었다. 그러나 고려도 국가 성립 이후에는 지배층은 교종과 밀교를 많이 신앙하였다. 고려 시대 불교 통합운동을 위해 노력한 의천도 교종 승려였다. 고려시대때는 의천이 불교를 개혁하고자 했으며 국청사를 중심으로 해동 천태종을 개창하고 수행 방법으로 교관겸수를 제시했다. → 선종[20] 신라 때 원효와 의상으로 대표되는 교종불교가 발달했으나 신라 하대 선종의 출현으로 신라 말의 혼란은 더더욱 가중되었는데, 신라계 중앙귀족들은 왕실의 지원을 받는 교종(5교)을 신봉했다면 삼한계 지방 호족들은 신라의 원신라계 우대정책에 반발하여 중앙에 대한 악감정으로 누구나 부처가 될수있다는 교리를 지닌 선종(9산)을 추종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부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석가모니 부처가 아닌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증득한 자를 말한다. 하지만 궁예는 선종의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교리를 악용하여 스스로 미륵불이라 자처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스스로 미륵불이라 자처하던 궁예가 타락하고 멸망하게 되자, 왕건의 고려는 초반에 선종 세력의 후원을 많이 받았음에도 정작 국가의 지원을 받는 호국불교 교종을 국가이념으로 삼아 선종을 박해하였는데, 귀족 지배층 입장에서는 전통을 중시하는 교종 쪽이 더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 고종 시기 대각국사 의천은 선종을 매우 증오하여 선종을 사문난적이라 표현하며 조선 연산군의 파불에 가까울 정도로 박해를 가한다. 하지만 아무리 위에서 박해를 해도 대중의 지지는 선종쪽이 더 높았기 때문에 선종의 씨를 말리는것은 불가능했다. 이 교종과 선종의 대립은 12세기 후로 동아시아 국가들이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고 숭유억불 방향으로 나가면서 왕실의 불교 지원이 크게 줄어들게 되고 이로 인하여 정통 교종이 몰락하면서 오히려 선종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한국사에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후 도의선사(9산중 가지산파)에 의해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종 전체로 봤을 때 제일 먼저 들어온 시기는 서기 8세기 후반에 신행대사가 단계적 깨달음을 중시하는 북종선을 들여온 것이 최초다. (도의선사는 우리가 잘 아는 돈오=즉각적 깨달음을 강조하는 남종선을 들여왔다.) 선종이 들어오던 서기 820년대, 이 시기는 한국사의 3대 반란으로 칭해질 만큼 기세가 무시무시했던 그 유명한 김헌창의 난이 일어났던 시기고 그 규모는 신라 9주 중 4주를 점령할 만큼 막강했으나 상당히 빨리 진압된다. 거기다가 일부 주에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공로로 7년간 면세, 이 단어를 강조하는 이유는 890년 이후에 일개 지방의 독립선언도 못 막는 상황과 너무 대비되기 때문이다.의 혜택을 주었을 정도다. 그 정도로 이 시기까지만 해도 신라 정부의 여력이 충분하고 권위도 있었기 때문에 민중들 입장에서도 권위에 의지하지 말라는 선종의 가르침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북종선은 말할 필요도 없이 더 주목받지 못했다. 때문에 도입되던 당시에는 선종이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신라 말기인 서기 890년대 이후, 흔히 말하는 국가 막장 테크 시기에 9산 선문이 소율희 등 몇몇 호족들의 지원을 받고 성장하면서 보편화되었다. 잘 안 알려진 사실인데 신라 정부는 선종과의 제휴를 시도했다. 이유는 선종을 통해서 떨어지는 권위를 다시 세우려고. 물론 호족의 지원이 더 커서 선종 측은 이를 거절했다. 일본에는 남송을 통해 12세기경 유입되었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편성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간단하게 말해 원효대사의 정토종(법성종)보다도 파격적인 효과를 불러온다. 그 때문인지 '무식한' 호족과 무신정권기의 무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다만 이 표현은 조금 비약이긴 하다. 교종은 본래 문벌귀족 사회와 연결되어 있었기에 무신정권으로 문벌귀족 사회가 무너지자 이들을 지원했으며 심지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때문에 최충헌 시기 지눌과 같은 승려가 무신정권의 지원을 받아 성장했다고 한다. ) |
정치 체제 | 군주제 → 전제군주제 |
국가원수[21] 역대 한국 왕조 국가들 중에서 가장 많은 독자적인 군호를 가지고 있다. | - [ 펼치기 · 접기 ]
한기간지거서간[1]차차웅[2]이사금[3]마립간[4]매금[5] 광개토대왕릉비, 중원 고구려비에는 매금(寐錦)이라는 왕호도 등장한다. 또한,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도 ‘모즉지매금왕’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코니키시[6] 가야멸망전 당시 신라 장군이 칼을 빼서 목을 치려고 하며 억지로 하카마(褌)를 벗기고 이어서 엉덩이를 야마토(日本)로 향하게 하고 "야마토(日本) 이쿠사노키미(將)는 내 엉덩이를 깨물어라!"라고 크게 부르짖게 하자(부르짖는다(叫)는 것은 울부짖으며 소리친다는 말이다) 곧 "신라 코니키시(王)는 내 엉덩이를 먹어라!"라고 소리쳤다라고 일본서기에 적혀있다. 백제에서 쓰이던 '건길지'가 이와 관련이 있다. 왕[7][8] 다만 울진 봉평리 신라비 등의 금석문을 살펴볼 때, 법흥왕까지는 왕과 마립간(매금)이 혼용된 것으로 보인다. 매금지존[9] 한자로는 寐錦之尊,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서 발췌. 모든 신라왕을 칭하는 것일 수도 있음. 태왕대왕제왕태왕황왕[10] '황왕'이라는 군주 칭호는 사서에는 나오지 않고 당시의 금석문에서 주로 확인된다. 진흥왕 순수비 등 금석문에서는 황왕 외에도 제왕(帝王), 태왕(太王) 등의 칭호도 그 당시에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황제와 왕의 복합어로 외왕내제적 성격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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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군주 | -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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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성 | 박(朴)[22] · 석(昔)[23] · 김(金)[24] |
역사 | -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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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가 |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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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시기 서라벌 상상도[26] 강(해자) 위, 숲 아래가 법궁인 경주 월성이다. 그 위쪽 일부는 북궁이다. 또한 시가지 중간중간에 지붕이 누런 집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황금을 기와 모양으로 만든 것을 올린 기와집인 금입택이다. |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의 궁궐터 월성 (사적 제16호) |
신라(新羅)는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군주제 국가이다. 약 1천 년간 56명의 군주를 거치며
한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존속하여
천년왕국이라는 별명과 함께 화려한 황금 문화로도 알려져 있어
황금의 나라라고도 불린다.
삼국시대의 세
나라 중
동남쪽에서 시작
[27] 신라의 시초는 고조선 유민들이 세운 사로국이다.
했으며 《
삼국사기》의 서술에 따르면 고대 한반도에 존재한
삼국 중 가장 빨리 건국됐다.
삼국통일전쟁 끝에
백제 전역과
고구려 중남부
[28]를 병합한 이후
삼국통일 의식을 바탕으로 한반도 대부분 지역을 지배했다.
676년 이후의
남북국시대의 신라는
통일신라라고 불린다.
나당전쟁에서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고 통일을 이룬 뒤로는 강력한 군사력과 해군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강국이자 부국으로 거듭나
남해와 동중국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했으며, 불교의 급속한 발전에 힘입어 당대 아시아에서
중국과 더불어 가장 화려한 불교 문화를 꽃피운 바 있다. 옛날 신라의 경제적 풍요로움과 문화적 번성함은 멀리
서역까지 알려져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 사이에서도
이상향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다가 9세기 말에 이르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나머지 다시
후삼국으로 분열되었으며 종국에는
왕건을 필두로 한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고려에 의해 병합되었다. 신라정통론(新羅正統論)적 입장에서는 신라의
삼한일통 사상을 이후
고려 왕조가 계승한 것이 훗날
한민족 의식으로 발달하였다고 보아 삼한일통 사상을 한민족의 의식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29] 고려 왕조는 국가 공인 관찬사서인 《삼국사기》나 그에 준하는 《삼국유사》에서 신라가 과거 통일을 했었음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신라의 삼국통일은 불완전, 고려의 후삼국 통일을 진정한 통일로 봤기 때문에 신라의 통일을 정통으로 봤다면 삼국사기 이후에 등장했어야 할 신라사를 따로 저술하진 않았다. 중국사의 관찬사서인 24서와 비교해보면 중국 삼국시대 및 이후에 대한 관찬사서는 삼국지에서 진서로 이어지는 구조인데, 여기서 조위만을 정통으로 보아 본기로 넣고 촉한과 동오는 세가로 넣었으며, 통일 왕조로서의 서진사를 따로 저술하였다. 이에 비해 고려는 삼국 모두를 정통으로 보아 본기로 저술, 직후 고려 왕조로 이어지게 서술하여 고려야말로 중국의 서진 왕조처럼 그 모두를 완전히 싹 다 통합한 진정한 정통 왕조라는 입장이었다.
[30] 다만 한민족의 정체성은 고구려부흥운동의 한 갈래였던 고려의 후삼국 통일로 전환점을 맞이하면서 신라가 아닌 고구려쪽에 가깝게 단일화되었다.
신라 국호 |
한국어 | 신라(新羅) 나라 이름의 의미는 '덕업일신 망라사방: 德業日新 網羅四方’에서 두 글자를 취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말 뜻은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
四年, 冬十月, 群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 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群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 ( 지증왕) 4년 10월에 군신(群臣)이 말하기를, "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創業) 이래로 나라 이름이 일정치 아니하여 사라(斯羅), 사로(斯盧), 신라(新羅)라 하였으나, 신(臣)들은 생각건대 '신'(新)은 덕(德業) 이 날마다 새로와져서, '라'(羅) [31] 어두에서는 두음 법칙에 따라 '나'이지만 둘째 음절 이하부터는 '라'로 발음. 는 동·서·남·북의 것들을 널리 받아들여 모두 포함한다는 의미이므로, 그것으로 국호(國號)를 삼는 것이 좋을 듯하오며, 또 생각건대 자고로 국가를 가진 이가 다 제왕(帝王)이라 칭하였는데 우리 시조가 건국한 지 지금 제22대에 이르도록 단지 방언(邦言)으로 칭하여 존호(尊號)를 정하지 아니하였으니 지금 군신(群臣)은 한뜻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올리옵니다"고 하니, 왕이 거기에 좇았다.
다만 '신라'라는 명칭 자체는 지증왕 때 뜻풀이하여 확정하기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고구려와 함께 '신라'가 전진 시기인 377년과 381년에 등장해 《자치통감》 등에 기록되어 있고, 당대 사료인 광개토대왕릉비에도 신라가 이미 등장하고 있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백잔과 신라는 과거에 속민이었기에 조공을 해왔다.
광개토왕릉비, AD 414 건립
따라서 지증왕 시절의 의미 풀이는 원래 존재하던 고유어를 한자로 표기하려는 과정에서 음도 의미도 적절한 한자를 찾아서 유교적인 해석을 끼워 맞춘 것이며, 이전부터 사용되던 '신라'라는 이름을 유일한 공식 명칭으로 규정한 것으로 추정되며, 지증왕 대에 국호를 통일하기 이전까지는 사로국, 사라 등 다른 표기를 혼용했다.
신라 이전에 불렸던 이름들은 시라(尸羅), 사라(斯羅), 사로(斯盧), 시림(始林), 유계(有鷄), 계괴(鷄怪), 계림, 서야벌(徐耶伐), 서라벌(徐羅伐), 유잠국(有蠶國) 등으로 불렸다. ㅅㄹ 계열의 고유어 국명을 음차한 것으로 보이는 표기가 주를 이루며, 누에치기와 관련된 이름 또한 일부 존재한다. 일본에서 발견된 〈민정문서〉에서도 유달리 뽕나무 재배 수량이 많아 신라가 전통적으로 누에치기와 관련이 컸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닭에 관한 이름도 많은데 실제로 신라 건국설화에는 계룡이 등장한다. 불교계 일부에서는 신라가 계(戒)를 나타내는 시라(Sila)에서, 서라벌을 부처님 당시 코살라국의 수도였던 슈라바스티(Sravasti)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료가 부족한 고대사의 특성상 어느것이 맞다 아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신라에 불교가 전래, 공인되는 눌지왕, 법흥왕대 한참 이전부터 신라와 통하는 사로, 사라 등의 이름이 쓰이기도 했고, 이병도나 환빠들이 자주 넘겨짚는 성운의 유사성을 가지고 하는 주장은 딱히 근거랄 게 없으며 억지스러운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근거라고 내미는 것이 도올 김용옥의 생각이다. 계림(鷄林)은 좁은 의미로는 경주시에 있는 작은 숲 이름이자, 넓게는 신라국 전체를 이르는 이름인데 사서에서는 제3대 탈해 이사금부터 계림을 정식 나라 이름으로 쓰다가 제15대 기림 이사금이 다시 신라로 되돌렸다고 되어있고, 이후 공식적으로 신라라는 국명이 정해진 뒤에도 계림은 신라라는 나라의 일종의 별칭으로 불렸는데,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별칭으로도 쓰였다.[32] 신라의 또 다른 이름으로 걸의식국(乞衣食國)이 있다는 정보도 인터넷 상에서 많이 떠도는데 이는 중국의 기담집 《유양잡조(酉陽雜俎)》 〈방이 설화〉의 한 구절을 띄어쓰기가 없는 한문을 제대로 끊어 해석하지 않고 오역한 것이다. '(방이가) 옷과 음식을 빌어먹고 살았는데(乞衣食), 나라 사람들(國人) 중에 남는 땅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에서 걸의식과 바로 뒤에 나오는 국인의 국을 '걸의식국'이란 한 단어로 오역한 것이다. |
중국어 | 신뤄(Xīnluó). 사로국은 쓰루(Sīlú). 현대 관화 기준이다.[33] 신라 초기의 한나라에서 사용한 상고한어로는 s.tsʰi(n)rˤaj, 신라 후기의 당나라에서 사용한 중고한어로는 sinla로 발음했다. 한글로 비슷하게 표기하자면 각각 "ㅆ-씬라이" 및 "신-라" 정도. 공교롭게도 중고한어 발음은 자음동화가 없는 점만 빼면 현대 한국어 발음과 거의 일치한다. |
일본어 | 시라기(しらぎ) 혹은 신라(しんら)
초기부터 일본과 거리가 가깝고 서로 많이 얽혔던 관계라 백제를 쿠다라로 읽는 것과 같이 신라를 읽는 법이 따로 존재한다. 시라기는 《일본서기》의 훈을 따른 것이다. 때론 しんら, 즉 한국어 독음과 유사한 '신라'로 읽기도 하는데 이건 한자 新羅를 현대 일본어식으로 음독한 것이다. 다만 한국어에서 신라를 읽을 때는 자음동화 현상으로 실제로는 저절로 '실라'라고 읽게 되지만, 일본어로 しんら를 읽을 때는 실라가 아닌 '신'라 그대로 읽는다. 신라에 대해서는 新羅라 적고, "シラギ(< シラキ)"(시라기/시라키)로 읽는데, 이건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신라의 본래 이름인 斯羅를 그대로 일본식으로 읽은 シラ에 キ(城의 뜻)를 더한 것이다. 일본 동양학의 토대를 놓은 학자인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는 キ(고대 일본어 독음 *kuy)를 백제어 '기(己)'의 차용어로 추정했다. 마쿠라고토바에서는 "栲衾新羅(タクフスマシラキ)"(타쿠후스마시라키)라고도 하는데, 이는 특산물인 종이의 원료 "닥(タク(타쿠))"과 "シラ"에서 연상되는 백색의 이미지가 이불(フスマ(후스마))과 연상되어 이루어진 명칭이다. |
아랍어 |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아랍어] 정관사 ال(al)+سيلى(silla)의 합성일 경우, 아랍어의 음운변화에 따라 앗실라로 읽는게 맞다. 아랍어로 중국을 지칭하는 الصين (앗씬)같이 정관사+단어로 구성된 국명이 많은데, 신라도 이와 같은 가능성이 높다. |
페르시아어 | 베실라(Beshilla), 바실라(Bashilla)
통일 신라 시기에는 아랍과 페르시아 사람들이 신라를 찾은 이후 아랍 문헌에선 신라의 국호가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 페르시아 문헌에선 '베실라(Beshilla)' 등으로 표기됐다. 2010년 말 한국에 그 정체가 알려진, 신라에 관한 내용이 풍부한 페르시아의 대서사시 《쿠쉬나메》( کوش نامه, Kush Nama)에선 신라의 국호가 '신라(Shilla)' 또는 '바실라'라고 나타난다. |
라틴어 | SELLA[34] |
인도 | 구구탁예설라(矩矩托禮說羅) |
고대 튀르크어 | 𐰱𐰇𐰞𐰍𐰠 쵤글(čölgl)[35] 퀼 테긴 비, 빌게 카간 비. 한국을 뜻하는 몽골어 '솔롱고스'나 만주어 '솔고/솔호'와 연관이 있으리라 보는 의견도 있다. |
신라는 한반도에 존재한 나라들 중 독자적인 연호를 걸고 내린 기간이 가장 명확하게 확인된다.
자세한 내용은
신라/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처음에는 3개 성을 가진 사람들이 교대로 국가를 통치했다. 박씨&석씨&김씨 이렇게 3개 성을 가진 사람들이 교대로 국가를 통치했지만, 최후에는 김씨가 독점을 하게 되었다.
현대 민주주의&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백성들의 투표를 통해서 뽑힌 것은 당연히 아니고, 지들끼리 알아서 걍 한 것이다. 그래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처음에는 변방에서 시작한 나라답게 굉장히 열악했다. 하지만 신라는 복수의 칼날을 노리며 국력 증대에 온 힘을 썼고 마침내 강한 인내심을 발휘한 결과 한강 유역을 차지하게 됨으로써 중국과 다이렉트로 교역을 하게 됨으로써 성장해 나갔고 결국 삼국통일을 하게 된다. 까고 말하자면 신라의 경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현대 한반도의 지명들은 신라
경덕왕 대에 행정을 개혁하면서 지은 한자식 명칭
[36] 조선의 수도인 ‘한양’이나(이 경우는 정식명칭은 한성이었다) 고려의 수도인 ‘송악/개성시’, 그리고 동래, 대구광역시, 전주시 등 여러 지역 중심도시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을 토대로 한다. 다만 경덕왕의 한자식 지명은 신라 당대에는 행정개혁을 통한 왕권강화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진골귀족들의 반발로 제대로 쓰이지 못했고 후의 고려 왕조에 들어서 경덕왕이 만든 한자식 지명을 참조하여 새로 작성한 한자식 지명을 완전히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다. 당연히 이 또한 고려 중앙정부를 중심으로 한 행정개혁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7] 즉 중앙에서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지명을 통일함으로서 호족들에게 질서를 강요하고 행정을 통일하는 작업의 일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게, 경덕왕의 지명 개혁을 마치 이전에는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작업인 것처럼 착각해 신라중심주의적인 입장에서는 한반도의 지명은 경덕왕이 완전히 새로 창조한 것이며 후대에도 계승했으니 신라문화만이 남았다!라 여기고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경덕왕은 삼국의 전통을 소멸시킨 사대주의자(이에 따르면 기존 신라의 전통 또한 말살된 것이 된다)에 불과하다!라 여기기도 하는데 일단 이런 한자식 지명은 삼국시대에도 한자문화가 완숙해지며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38] 고마나리(固麻那利)→웅진, 벌나→평양, 국내, 요동, 한성(황해도 재령군), 국원 등의 수많은 한자식 명칭.
경덕왕 또한 무작위로 새로 창조하여 작명을 한 게 아니라 이전 삼국시대 지명의 뜻과 전통을 계승하여 한자화한 것이다. 삼국시대에도 이미 중국 문화 도입을 통한 중앙집권화는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고, 권력과 기존 전통을 유지하려 했던 기성 귀족들의 반발 또한 시시각각 터졌다는 건 기록으로도 많이 남아있다. 게다가 이런 개혁 및 교류로 인해 후기 삼국의 문화는 이미 무덤양식까지 같아질 정도로 서로 유사한 형태로 수렴 중이었고 따라서 경덕왕의 개혁은 완전히 새로운 신라중심주의적인 혹은 기존 전통을 깡그리 소멸시킨 독자적인 작업이 아닌 삼국시대부터 이미 진행되어 오던 중앙집권적 개혁의 전통을 계승한 것에 해당하며 종합적으로 보면 고려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이 일련의 작업이 완성된 형태를 띠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13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통일 신라 이전 시대의 행정 구역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데, 아직 신라의 영토가
경상도 일대에 머물러 있던 514년(
지증왕대)에 지금의
함안군에 아시촌소경을 설치하고,
진흥왕 대 557년에는
충주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한 기록이 있는 등
주,
소경식의 행정구역 체계는 삼국 통일 이전에도 비슷하게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
▲ 1세기경의 추정 위치. (11)이 신라의 모체인 사로국. |
통일신라의
행정구역은
9주 5소경으로 대표된다.
9주 5소경 문서로.
신라/사회 문서로.
신라/문화 문서로.
신라어 문서로.
현대 한국어는
고대 한국어의 동남지역 방언인
신라어를 기반으로 발달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한 이후
고구려어와
백제어는 거의 소멸되어
신라어로 통합되었으며
고려의 영토는
통일신라 시기의 영토와 거의 동일했기 때문에 사실상 현대에 이르는
한국어는
신라어에 기반을 두었다고 보는 가설이다. 다만 현대에는 신라와 고려의 향가에서 나타나는 차이
[39] 고려시대에 기록된 서동요는 대격표지로 乙(을, ur)을 사용하는데 비해 이전 신라에서 기록된 향가에서는 肹(힐, gur)을 사용하고 있다. 다만 이는 언어의 변화에 따른 차이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등의 역사적인 기록 및
유화부인 숭배, 5층 석탑 건립 등 이전 삼국시대 문화를 계승해온 흔적이 드러나는 후삼국 호족 문화의 삼국문화로부터의 연속성, 현대 한국어의 방언연속체가 소백산맥을 경계로 하는 점 등에 근거해 고대 한국어의
동남방언보단 중부지역 방언
[40] 황해 방언, 경기 방언. 충청 방언은 모두 방언연속체에 해당한다.
이 후의
표준어로 발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론 또한 제기되고 있다. 또한, 삼국어 자체가 예맥계의 언어이기에, 애초부터 삼국어 자체가 방언연속체였을 경우, 한반도 중부지역 방언이라는 것은 결국 고구려 유민들의 전통의 거주지인 개성 및 평양시 주변부 언어이기 때문에, 현대 한국어가 고구려어계 직계 또는, 고구려어와 통일신라어의 융합의 결과물이라는 반론 또한 강하게 존재한다.
백제 와는 상쟁하면서
나제동맹을 맺기도 했다. 《
삼국사기》에 의하면 많은 전투가 있었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은 적도 있었다. 때론 국가의 이득을 위해 혈연이 맺어지기도 했다
[41] 장수왕 즉위 이후 최전성기를 맞은 고구려라는 공통의 적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맺은 120년간의 나제동맹 기간에 있었다. 해당 문서로.
. 하지만 국가의 이익에 따라 나제 동맹도 결렬된다.(
관산성 전투) 이후에는 백제 멸망 시기까지 양국 관계는 회복되지 못했고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멸망하고 백제 영역과 인구는 고스란히 신라에 귀속된다.
고구려와의 관계도 국가의 이득에 따라 동맹하거나 싸웠다.
광개토대왕 시절,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에 의하면 왜의 공격에 5만의 군사로 신라를 구원하였고(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住救新羅) 신라가 조공하였다고 한다(寐錦家僕句請朝貢)
장수왕 대에 고구려가 남진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이후
진흥왕이 반격에 나서 고구려의 남쪽 영토를 대거 빼앗기도 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 고구려군에게 잦은 공격을 받기도 하는 등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하였다. 삼국시대 말기까지도
무열왕은 고구려로 가서
연개소문을 찾아가 동맹을 맺으려고 했다. 백제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기는 하지만
나당전쟁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했다.
[42] 고구려 유민들 입장에서는 신라보다 당에 대한 적대감이 훨씬 더 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라와 손을 잡은 것이다. 물론 신라에 대한 반감도 상당히 컸을 것은 분명하다.
이후 고구려인의 일부
[43] 주로 황해도, 강원도 지역민들과 여러 사유로 남하한 고구려인들
는 신라인에 포함되었다.
[44] 다만 백제인은 거의 대부분이 신라인이 된 반면 고구려인은 일부만이 신라인이 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발해와는 초반에
고왕이 신라 대아찬 벼슬을 받으면서 외교관계를 형성했고
[45] 단 대조영이 신라 벼슬을 받았다는 기록은 신라인인 최치원이 발해를 비하하는 글에만 나오는 내용이고 다른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아 교차검증이 안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당나라에 의해 한때 상호 대립하기도 했지만
선왕 시기 남경 남해부를 통해 신라도가 연결된 이후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발해가 거란에 압박받을 때에는 신라와의 동맹을 추구하기도 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고, 두 나라는 사이좋게
9년의 시차를 두고 멸망했다.
가야와는 초기부터 경쟁하는 관계였으나,
금관국을 멸망시킨 후
구형왕 가문을 진골로 편입시켰다. 이후 중심을 잃은 가야의 소국들은 신라에 각개격파당하면서 흡수된다.
중국과의 관계는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로
조공이라는 교류를 하였으나 초기에는 한반도 동남부라는 지리적 위치상 한반도 서해의 중국과 직접 교역은 불가능해 많은 교류는 어려웠던 걸로 보인다. 그러다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서해안에 영토가 닿게 되면서 항구 도시 당항성을 통해 직접 교류가 가능해졌고, 고구려와 백제에게 남북으로 협공당하게 되자
수나라,
당나라와의 교류가 수월해졌다. 한때
나당전쟁으로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지만, 이후 회복되었고,
통일신라시대에도 신라의 인재들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고
신라방,
신라원 등이 생기면서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숙위 학생단이라는 유학생단을 만들어 10년 정도의 기간씩 교대로 유학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한때 그 숫자가 105명에 이르기도 했으며 일부는
빈공과라는 당나라의 과거 시험에 응시해 당나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귀국해 신라에서 관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 당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에서 5대 10국 시대가 개막하며, 한반도에서는 태봉과 후백제가 신라에서 갈라져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어 한강 유역과 서해안을 상실한 이후에도 신라는 후당 등 중국의 5대 10국 국가들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멸망 직전에도 중국과 교류했다.
일본과 거리가 가장 가까운
영남 지역에 위치한 신라였지만 왜국과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왜국은 신라보다는 백제, 가야와의 친밀한 관계를 삼국시대 거의 내내 유지했으며, 때로는 백제-가야-왜가 힘을 합쳐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고, 심지어 신라와 백제가 손 잡은
나제동맹 때도 왜는 '친구의 친구'라 할 수 있는 신라를 공격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초기부터 많은 침략을 받았다. 《
삼국사기》 기록에서만도
박혁거세 시대부터 수십 번 쳐들어오고, 신라도 말기의
신라구를 제외하면 직접 왜를 침략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없지만, 《
일본서기》에는 527년
규슈 북부의 유력자
이와이(磐井)에게 왜군의 신라 침공을 저지하도록 포섭한 일이나, 신라 원정군을 꾸리던 일본 왕자에 대한
암살을 사주했다는 설,
유례 이사금 시기에 신라가 왜국의
오사카까지 침공했다는 일본측 기록 등 기타 일본측 사서에서 신라가 일본을 침공했다는 기록들도 많이 나오는 등 신라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더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로.) 《일본서기》에 의하면 왜는 백제를 하나의 번국으로 보았고
[46] 일본서기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과장되고 왜곡된 내용이 많다.
(반면에 백제는 왜를 자신들의 번국으로 보았다.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칠지도 명문)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도 신라를 공격하고, 후속 공격을 준비하기도 했으나(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문서로.) 백제가 완전히 멸망한 이후에는 신라와도 교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통일신라 때도 신라와 일본은 아주 사이가 나쁜 시기와 그나마 괜찮던 시기가 있었는데, 양국 모두 자존심이 무척 강해서 대체로 서로 상대방이 오만하며 무례하다고 비난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신라와 일본의 사이가 단순히 좋지 않았다는 편견과 달리, 이전 백제 때 만큼은 아니지만 이후 시대인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비해서는 양국간 교류량은 훨씬 많은 편이었다.
특히 일본의 우방이던 백제가 사라진
통일신라로 들어서는 상황이 변하게 된다.
나당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선 후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일본 역시 백제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며 다음에는 나당연합군이 일본에 쳐들어올 것을 염려해 얼마 전까지 싸웠던 신라와 전격 화친하기에 이른다. 신라는 왜전(倭典)이라는 일본 외교사신 접객을 담당하는 관청을 따로 두어 체계적으로 대일관계를 관리했다. 훗날의
조선 통신사 파견이 조선 후기 200여 년간 고작 9회에 불과했지만, 한일 양국의 사료를 종합해보면 신라 때는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670년부터 779년까지 1세기 동안 일본으로 사신단이 39차례나 파견됐고, 동시기 일본 사신단도 신라를 25차례나 방문했다. 사신단의 규모에 있어서도 성덕왕 2년(703년)에 204명의 사신단을 파견했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횟수까지 감안했을 때 1회에 300~500명을 파견한 조선 통신사에 크게 밀리지 않는다. 8세기 중후반으로 가면서 일본의 자존 의식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자국을 상국으로 모실 것을 신라에 요구하는 형식적 외교 관례에 집착했고, 이러면 신라도 무례하다고 사신을 쫓아내고 개무시하면서 차츰 정부간 교류가 줄어들게 되는데 그래도
장보고로 대표되는 사무역이나 민간 교류는 9세기에도 꽤 많았다.
다만 활발한 교역량과는 별개로 왕실과 백성들은 서로에게 그리 좋은 감정을 갖지는 않았던 걸로 보인다.통일신라시대에는
중동 지역과도 교류가 있어서,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기록에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 '베실라'(Beshilla) 등의 이름으로 중동과 유럽 지역에 소개되었다. 위 지도는
'<알 이드리시의 세계지도>'인데,
아랍인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시칠리아 왕국 노르만 왕조의
루지에로 2세의 지원하에 제작했다.
한국이 포함된 최초의 세계지도로, 참고로 원본은 남쪽이 위로 가게 만들어서 신라가 좌측 끝에 있다. 다만 신라가
섬나라로 묘사된 오류가 있는데, 멀리서 한국에 오는 사람들은 바다를 항해해
동중국해에서 올라와 한국에 상륙했기 때문에 한국의 북쪽으로 가 볼 일이 없어 섬나라로 오해한 것이다. 수백 년 뒤 조선을 표시한 유럽 세계지도에서도 조선을 섬나라로 잘못 그린 지도가 상당히 많다. 예를 들면
1636년작인 테세이라의 <일본전도>에서도 한반도가 섬나라로 잘못 그려져 있다.
중동인들의 기록에서는 대체로 신라가
이상향마냥 살기 좋은 곳으로 기록했고,
이라크 지역 사람들 몇십명이 신라에 정착해 있었다고 기록했다. 일본
도다이지 쇼소인에 소장 중인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의 기록에 따르면 752년에는 아랍 상인단이 신라 사신단을 따라서
일본까지 갔다오기도 했다. 일부
중동인들은 신라에 정착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47]경주시에서 특이한 유리구슬들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경주 황남동 상감 유리구슬, 식리총 상감 유리구슬, 경주 노서리 상감 유리구슬이 그것이다. 영국 런던 고고학연구소의 제임스 랭턴 박사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지역의 고대 펠랑기 구슬과 동일한 제작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적어도 4세기 이전부터 신라인들이 인도네시아 자바 섬 주민들과 직접 교류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그 외에 당나라의 의정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신라 승려 2명이 인도에 가기 위해 배를 타고 실리불서국(室利佛逝國)을 거쳐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인도네시아에 있었던 스리비자야 왕국을 말하는 것으로, 인도로 오가는 구법순례의 중간 거점으로 인도네시아와 교류가 있었던 근거가 되고 있다.한국에서 베트남에 대해 기록한 최초 사례는 신라의 문인 최치원의 882년 저작 <보안남록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이다. 《계원필경》의 일부이며, 당시 베트남 역사에 대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신라 승려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여행기를 남겼는데 이는 지금도 남아있으며, 기록이 부족한 당시 인도-중앙아시아의 정세를 기록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여행기를 남긴 혜초가 가장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많은 신라 승려들이 인도를 오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당나라의 의정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아리야발마 법사, 혜업 법사, 현태 법사, 현각 법사, 혜륜 선사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두 사람까지 일곱 명의 신라 승려가 인도에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중 현태법사는 중앙아시아 루트를 선택한 혜초와 달리 650년에서 656년 사이에 티베트와 히말라야 산맥, 네팔을 거쳐서 육로로 인도에 갔고, 반면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승려는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를 지나 해로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신라인의 인도 구법순례는 비록 기록이 부족해 완전한 복원은 어렵지만, 이렇게 여러 경로가 개척될 정도로 일회성이 아닌 꾸준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시기엔 이란의 전신인 사산조 페르시아와 무역으로 교류가 있었으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서도 혜초가 파사국(波斯國)도 갔다 왔음이 언급되는데 파사국은 페르시아를 음차한 것이다.
반대로 훗날 이란계가 관료층으로 자리잡은 중동, 이슬람의 세계지도나 지리서에선 신라가 언급되며 신라에 정착한 이란인들도 있었다. 또한 중세 이란의 서사시 샤나메에서는 판타지가 가미된 픽션이지만 신라가 '바실라'라는 이름으로 언급되고 극중의 무대가 되기도하며 주인공인 파리둔은 페르시아-신라 혼혈이기도 하는 등 상당히 우호적으로 묘사되어있다.
원성왕릉의 호인석과 처용역시 당시 이주한 이란인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후삼국시대의 경우,
태봉은 신라와는 거의 불구대천의 원수와 같았다.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칭하며, 우호적인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고 적개심을 드러냈다.
[48] 어떤 국내 모 포털 사이트의 네티즌은 후백제의 견훤이 아니라 태봉의 궁예가 왕건의 쿠데타로 몰락하지 않고 신라를 침략했으면 신라 침공 후 경순왕만 세워놓고 괴뢰국화하는 선에서 그친 견훤과 달리 무력으로 멸망시킨 다음 태봉 영토로 강제 병합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백제는 태봉에 비하면 신라 눈치를 보는 시늉은 했지만
[49] 892년에 사실상 왕이 되었지만 신라 서면 도통 지휘 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 전주 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 개국 공식 읍 이천호라는 형식상 신라의 신하로 깔고 들어가는 칭호를 자처했다. 백제 왕 칭호는 8년 뒤엔 900년부터다.
역시 후백제의 창업자인 견훤이 신라에 반기를 들고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그렇게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후백제도 신라를 침략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약탈하기까지 했다. 반면 태봉국을 쿠데타로 무너트리고 즉위한
왕건의
고려는 궁예와는 상반되는 친신라 정책을 펼쳤으며, 동시기에 존재한 후백제보다는 고려 쪽에 신라가 의탁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중국과 조공을 하였는데
5대 10국 중
후당과 주로 조공을 하였다.
신라는 초기에 6부(部)의 장정을 징발하여 편성한 6부병(六部兵) 제도로 운용되었다. 기록을 봐도 무슨 일이 있으면 총사령관인 국왕이라도 6부병 부하 지휘관들의 의견을 무시하지 못했는데 이는 신라왕이 다른 부 수장들의 대표였지 그들 모두의 위에 초월적으로 서는 위상은 아니었던 게 이유다. 하지만 나물 마립간 때부터 슬슬 신라왕이 다른 부 수장들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찍어눌러서 씹어버리고 독자적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승리를 거두는 사례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나물 ~ 소지 마립간 때까지 신라 임금들이 걸핏하면 딴지를 걸어대는 진골들에게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기 위해 오늘날 경북 서남부, 충북 남부 추풍령 일대를 왕실 직할령으로 키우면서 그 일대에서 진골들과는 무관한 정예 부대를 육성한 게 이유다. 이후로 지증왕 때부터 등장하는 습보계 왕가는 눌지계 왕실에게서 승계한 추풍령에 더해 고구려에게서 수복한 '고구려 고지'인 경북 북동부 조령 일대을 또 하나의 직할지 비슷한 영역으로 확보하고, 이를 통해 옛 6부병 체제의 유산을 청산해낸다.
국력이 급속도로 팽창하는 시점인
진흥왕 때부터 늘어난 영토의 방위 목적 등으로 군사 편제가 큰 변화를 겪게 되며, 초기 6부 체제는 6정의 6개 군단 편제로 바뀌게 된다. 나중에 이 지방군 체제는 더 증편되어 진평왕 때에는 10정(停)으로 바뀐다. 지방 체제의 군단 편제 외에도 중앙군도 개편에 맞추어서 서당(誓幢: 583년), 낭당(郞幢: 625년)이란 부대로 개편되었고 왕궁 수비대인 시위부(侍衛府: 624년)도 창설되게 된다.
관련 정보 이러한 개편은 결국 신라가 그간 수천 단위로 동원되던 수준의 원정 능력에서 10,000 단위 이상의 동원 능력을 보이는 계기가 되며 삼국 전쟁 말기 고구려 원정, 그리고 이후
달벌대전 때에는 10만 단위의 대군을 동원하기도 한다.
또한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봐도 참으로 특이한 편제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은 진흥왕 이래로 서라벌 방어 부대 편제와 서라벌 왕궁 방어 체제를 완전 분리한 것이었다. 서라벌 방어 정예 부대는 당연히 서라벌 거주 왕경인들을 위주로 편성되었는데,
기이하게도 서라벌 왕궁 근위대는 지휘관이든 병사든 서라벌인들은 아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 근위대는 앞서 신라 왕실이 진골들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개척한 추풍령과 조령 등에서 자원 입대를 받았으며, 왕궁 근위대장 자리는 아예 진골은 임명되지 못하게 하여 왕궁 내 무력 집단에 서라벌 거주 진골이나 6두품 등이 진입하는 건 철저하게 틀어막았다. 이는 이미 진흥왕 때부터 진골 집단이 골품제의 한계를 벗어나 광범위한 개혁을 추구하는 왕실에게 양날의 검이 될 수 있었던 것을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
[50] 세계사적으로 볼 때는 비슷한 사례가 없는 건 아니다. 고대 원수정 로마의 최측근 왕궁 경비대원은 전원 게르만인이었고, 동로마도 최측근 경비대원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정치역학과 무관한 노르만인 바랑기였다. 하지만 신라 왕실이 뿌리가 같고 평소에는 왕실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였던 진골을 왕궁 경비에서 제외한 것이 특이해보인다는 것이다. 신라 왕실이 전성기 때부터 진골의 위험성을 인지한 것이다.
군복무 기간은 삼국사기에 실린
가실 열전에 의하면 3년인 듯 하지만, 워낙 전쟁이 많았던
난세인 삼국시대다보니 한없이 연장되는 일이 많았던 듯 하다. 가실은 6년이 지나서야 결혼을 약속했던 설씨녀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 일본과 워낙 전쟁이 자주 일어나다보니 군복무도 혹독했는지 6년만에 나타난 가실은 너무 초췌해져 처음엔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51] 당장 삼년산성을 비롯해,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을 막기 위해 수많은 산성을 쌓았는데 가실 같이 병역의 의무를 짊어진 장정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나당전쟁을 마지막으로
통일신라부터는 한반도에서 큰 전쟁이 수백년간 거의 없는 평화기가 찾아오게 된다.
신라는 삼국통일 후 전국을 옛 고구려 지역 3주, 옛 백제 지역 3주, 원래 신라였던 지역 3주인
9주 5소경으로 편제하고 국왕 직속으로 수도에 출신별로 아홉 개 서당(誓幢) 부대, 그리고 지방 각 주에 하나씩 정(停) 부대를, 단 전방지역인
한주만 2개 부대씩 해서 9서당 10정 체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각 주마다 만보당 2개 부대를 각각 배치해 지방을 방어하였다. 이들은 현대의
부대마크처럼, 부대별로 옷깃(衿) 색깔을 다르게 해서 구분했다.
부대명칭 | 출신지 | 창설 시기 |
녹금서당(綠衿誓幢) | 신라 | 583(서당) |
자금서당(紫衿誓幢) | 625(낭당) |
비금서당(緋衿誓幢) | 672(장창당) |
백금서당(白衿誓幢) | 백제 |
청금서당(靑衿誓幢) |
황금서당(黃衿誓幢) | 고구려 |
벽금서당(碧衿誓幢) | 보덕국(고구려계) |
적금서당(赤衿誓幢) |
흑금서당(黑衿誓幢) | 말갈(예맥계 위말갈) |
신라군은 보병 위주의 군대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백제와 마찬가지로 말을 목축화하는데 어려운 지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백제와 유사하게 보병 중심이었으나, 이후
나당전쟁 때 당나라의 유목민 출신 기병대를 상대하기 위해, 말 그대로
장창을 주 무기로 하는 장창당(長槍幢) 부대를 따로 구성해 운용하기도 했다.
기병의 전체적 비중은 적었지만 소수의 정예 기마병을 육성했고,
경주시와 인근
가야 지역인
함안군에서 상태가 좋은 마갑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탑승자와 말 전체를 갑옷으로 감싸는
중장기병을 운용했음이 유물로 밝혀졌다. 갑옷은 고구려의 영향 전에는
판갑(板甲)을 주력으로 운용했다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구원 이후 고구려의 영향으로
찰갑(札甲) 운용이 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구진천의
천보노라는 우수한
쇠뇌, 그리고 거점 수비에 쇠뇌를 사용하는 노사(弩士)를 몇천명씩 배치해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후 조선시대부터는 쇠뇌보다는
국궁을
[54] 주력으로 사용했던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화랑 / 낭도 제도를 운용한 것도 특징. 대체적으로 고급 장교 - 하급 장교 / 부사관 급 인사를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보는 편이다.
신라의
군기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신라 사람들의 휘직은 띠를 푸르거나 붉거나 하는 등의 색깔로 구분하였고 모양은 반달의 형상을 취하였다. 계(罽) 또한 옷에 다는 것인데 그 길이의 길고 짦음에 대한 제도는 분명하지 않다.”
해당 링크.
이러한 신라의 군제는 통일기에 격변을 거쳤고, 통일한 이후 경덕왕에 의해 한차례 더욱 정밀한 군제 개편을 거치게 된다. 경덕왕의 군제 개편으로 구서당은 완전 해체되었고
[55] 다만 이는 구서당을 통해 흡수했던 고구려, 백제, 말갈인들을 더욱 차별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시기가 되면 적어도 서라벌에 살았던 이들은 왕경인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아서인지 조상이 고구려인이든 백제인이든 말갈인이든 완전히 신라인으로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구서당 부대를 유지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서라벌 방어 부대는 육기정 부대로 제개편되어 서라벌로 향하는 여섯 경로를 방어하도록 구체적인 임무를 받았으며, 일본이 침공해올 가능성에 대비해 부산으로부터 경주 방어선을 구축했다. 위에서 상술한 정예 쇠뇌부대들도 물론 그 방면에 배치되었다. 또한 발해나 여진을 대비해 동북방 국경 부대도 대폭 확충되었고 전면적인 요새 정비 사업도 행해졌다. 태봉과 고려가 생각보다 여진족이 북쪽으로부터 내리누르는 압력에 고생한 편인데, 경덕왕의 이런 군제 개편에 아주 덕을 많이 보았음은 물론이다. 자세한 부분은
경덕왕 문서로.
이후
김헌창의 난을 거치면서 신라의 지방군 동원 체제가 생각보다 취약하고, 옛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게 확인되자 이번에는
헌덕왕 때부터 종심 방어선 체제 구축이 시작되어
헌강왕 때 끝을 본다.
통일신라의 중후기에 행해진 신라 임금들의 주도면밀한 군제 개편 작업 및 축성 작업 등은
후삼국시대 때도 후삼국의 쟁패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경덕왕,
헌강왕 문서로.
신라
수군의 활약상은
우산국 정벌,
기벌포 전투 등 다방면에서 전하지만 수군의 편제에 대해서는 육군에 비해서도 기록이 훨씬 부족하다. 삼국사기의 본기와 직관지를 참조하면, 신라 초기에는 오늘날의
국방부에 해당하는 병부(兵部)가 선박에 관한 일을 맡았는데
문무왕 18년(678) 선박 업무를 전담하는 선부(船府)를 설치했다.
660년 백제 침공 당시 기록을 토대로
당항성에 소속된 신라
황해 함대가 100척에 6,500여명 규모일 것으로 이상훈 교수는 추산했다. 이들은 병선(兵船), 대선(大舩), 거함(巨艦)으로 표현되고 있어 당시 동아시아 기준으로도 규모가 큰 전투함으로 볼 수 있으며,
[56] 이 100척을 당 수군에 대한 보급선으로 보는 설도 있지만, 삼국사기에서 비전투함은 조선(漕船, 수송선) 등으로 불러 전투함과 구분해 기록했기 때문에 이상훈 교수는 전투함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보았다.
황산벌 전투에 참여한 신라 육군과 별개로 당나라 수군과 오늘날의 경기도 앞바다에서 합류해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해
금강 하구에서 백제 수비군을 물리친 후 백제 수도
사비성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신라에서도 시기별로 수군의 규모나 편제가 달랐을테고, 신라 국토 구조를 보면 신라 수군의 주력은
남해와
동해에 배치돼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 황해 함대 기록만으로 신라 수군을 완전히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신라/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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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전(列傳) ]
11·12권 「후비전(后妃傳)」 | 조안종 · 소문수 · 장애친 · 장궐 · 사마무영 · 호도안 · 원제규 · 노혜남 · 왕헌원 · 은숙의 · 하영완 · 심용희 · 왕정풍 · 진묘등 · 강간규 · 진법용 · 사범경 · 진도정 · 유지용 · 배혜소 · 왕보명 · 하정영 · 왕소명 · 유혜단 · 저영거 · 왕순화 · 장상유 · 치휘 · 왕영빈 · 정영광 · 완영영 · 서소패 · 장요아 · 심묘용 · 왕황후 · 유경언 · 심무화 · 장여화 | 13·14권 「송종실급제왕전(宋宗室及諸王傳)」 | 유도린 · 유도규 · 유의경 · 유준고 · 유의진 · 유의강 · 유의공 · 유의선 · 유의계 · 유소 · 유준(濬) · 유삭 · 유굉 · 유탄 · 유위 · 유창 · 유혼 · 유휴인 · 유휴우 · 유휴무 · 유휴업 · 유휴천 · 유이부 · 유휴범 · 유휴약 · 유자상 · 유자훈 · 유자방 · 유자욱 · 유자란 · 유자인 · 유자진 · 유자원 · 유자우 · 유자맹 · 유자운 · 유자사(劉子師) · 유자소 · 유자사(劉子嗣) · 유찬 · 유우 · 유홰 · 유숭 · 유희 | 15권 「유목지등전(劉穆之等傳)」 | 16권 「왕진악등전(王鎮惡等傳)」 | 유목지 · 서선지 · 부량 · 단도제 | 왕진악 · 주령석 · 모수지 · 부홍지 · 주수지 · 왕현모 | 17권 「유경선등전(劉敬宣等傳)」 | 유경선 · 유회숙 · 유수 · 손처 · 괴은 · 상정 · 유종 · 우구진 · 맹회옥 · 호번 · 유강조 | 18권 「조륜지등전(趙倫之等傳)」 | 19권 「사회등전(謝晦等傳))」 | 조륜지 · 소사화 · 장도 | 사회 · 사유 · 사방명 · 사령운 | 20권 「사홍미전(謝弘微傳)」 | 21권 「왕홍전(王弘傳)」 | 22권 「왕담수전(王曇首傳)」 | 사홍미 | 왕홍 | 왕담수 ,왕훈, | 23권 「왕탄등전(王誕等傳)」 | 24권 「왕유지등전(王裕之等傳)」 | 25권 「왕의등전(王懿等傳)」 | 왕탄 · 왕화 · 왕혜 · 왕욱 | 왕유지 · 왕진지 · 왕소지 · 왕열지 · 왕준지 | 왕의 · 도언지 · 원호지 · 장흥세 | 26권 「원담전(袁湛傳)」 | 27권 「공정등전(孔靖等傳)」 | 28권 「저유지전(褚裕之傳)」 | 원담 | 공정 · 공림지 · 은경인 | 저유지 | 29권 「채곽전(蔡廓傳)」 | 30권 「하상지전(何尙之傳)」 | 31권 「장유전(張裕傳)」 | 채곽 | 하상지 | 장유 ,장승, | 32권 「장소전(張邵傳)」 | 33권 「범태등전(范泰等傳)」 | 34권 「안연지등전(顔延之等傳)」 | 장소 | 범태 · 순백자 · 서광 · 정선지 · 배송지 · 하승천 | 안연지 · 심회문 · 주랑 | 35권 「유담등전(劉湛等傳)」 | 36권 「양흔등전(羊欣等傳)」 | 37권 「심경지등전(沈慶之等傳)」 | 유담 · 유열 · 고침 · 고기지 | 양흔 · 양현보 · 심연지 · 강이 · 강병지 | 심경지 · 종각 | 38권 「유원경전(柳元景傳)」 | 39권 「은효조등전(殷孝祖等傳)」 | 40권 「노상등전(魯爽等傳)」 | 유원경 | 은효조 · 유면 | 노상 · 설안도 · 등완 · 종월 · 오희 · 황회 | | 41권 「제종실전(齊宗室傳)」 | 소도도 · 소도생 · 소요광 · 소요흔 · 소면 · 소경선 · 소적부 · · 소탄 · 소탄지 | 42·43권 「제고제제자전(齊高帝諸子傳)」 | 소억 · 소영 · 소황 · 소엽 · 소고 · 소장 · 소삭 · 소감 · 소봉 · 소예 · 소갱 · 소구 · 소현 | 44권 「제무제제자·제문혜제자·명제제자전(齊高帝諸子·文惠諸子·明帝諸子傳)」 | 소장무 · 소자량 · 소자경(卿) · 소자향 · 소자경(敬) · 소자무 · 소자륭 · 소자진 · 소자명 · 소자한 · 소자륜 · 소자정 · 소자악 · 소자문 소자준 · 소자림 · 소자건 · 소자하 · 소소수 · 소소찬 · 소보의 · 소보현 · 소보원 · 소보인 · 소보유 · 소보숭 · 소보정 | 45권 「왕경칙등전(王敬則等傳」 | 46권 「이안인등전(李安人等傳)」 | 왕경칙 · 진현달 · 장경아 · 최혜경 | 이안인 · 대승정 · 환강 · 초도 · 조무 · 여안국 · 주산도 · 주반룡 · 왕광지 | 47권 「순백옥등전(荀伯玉等傳)」 | 48권 「육징등전(陸澄等傳)」 | 순백옥 · 최조사 · 설연 · 우종 · 호해지 · 우완지 · 유휴 · 강석 | 육징 · 육혜효 · 육궐 | 49권 「유고지등전(庾杲之等傳)」 | 50권 「유환등전(劉瓛等傳)」 | 유고지 · 왕심 · 공규 · 유회진 | 유환 · 명승소 · 유이 · 유규 | | 51·52권 「양종실전(梁宗室傳)」 | 소경 ,소매 소발 소앙 소욱, · 소의 · 소부 · 소창 · 소융 · 소굉 ,소정인 소정의 소정덕 소정립, 소수 · 소위 · 소회 · 소담 | 53권 「양무제자전(梁武帝諸子傳)」 | 소통 · 소종 · 소적 · 소속 · 소윤 · 소기 | 54권 「양간문제자·원제제자전(梁簡文帝諸子·元帝諸子傳)」 | 소대기 · 소대심 · 소대관 · 소대림 · 소대련 · 소대춘 · 소대성 · 소대봉 · 소대아 · 소대장 · 소대균 · 소대위 · 소대훈 · 소대구 · 소대흔 · 소대지 · 소대원 · 소방등 · 소방제 · 소방구 · 소방략 | 55권 「왕무등전(王茂等傳)」 | 왕무 · 조경종 · 조의종 · 석천문 · 하후상 · 길사첨 · 채도공 · 양공칙 · 등원기 · 장혜소 · 장징 · 풍도근 · 강현 · 창의지 | 56권 「장홍책등전(張弘策等傳)」 | 57권 「심약등전(沈約等傳)」 | 58권 「위예등전(韋叡等傳)」 | 장홍책 · 유역 · 정소숙 · 여승진 · 악애 | 심약 · 범운 | 위예 · 배수 | 59권 「강엄등전(江淹等傳)」 | 60권 「범수등전(范岫等傳)」 | 61권 「진백지등전(陳伯之等傳)」 | 강엄 · 임방 · 왕승유 | 범수 · 부소 · 공휴원 · 강혁 · 서면 · 허무 · 은균 | 진백지 · 진경지 · 난흠 | 62권 「하창등전(賀瑒等傳)」 | 63권 「왕신념등전(王神念等傳)」 | 64권 「강자일등전( 江子一等傳)」 | 하창 · 사마경 · 주이 · 고협 · 서리 · 포천 | 왕신념 · 양간 · 양아인 | 강자일 · 호승우 · 서문성 · 음자춘 · 두즉 · 왕림 · 장표 | | 65권 「진종실제왕전(陳宗室諸王傳)」 | 진의 · 진상 · 진혜기 · 진창 · 진담랑 · 진백무 · 진백산 · 진백고 · 진백공 · 진백인 · 진백의 · 진백례 · 진백지 · 진백모 진숙릉 · 진숙영 · 진숙견 · 진숙명 · 진숙경 · 진숙헌 · 진숙제 · 진숙문 · 진숙달 · 진숙탄 · 진숙표 · 진숙웅 · 진숙중 · 진숙엄 · 진숙신 · 진숙우 · 진숙평 · 진숙오 · 진숙흥 · 진숙선 · 진숙목 · 진숙검 · 진숙징 · 진숙소 · 진숙광 · 진숙순 · 진숙모 · 진숙현 · 진숙륭 · 진숙영 진심 · 진장 · 진윤 · 진억 · 진언 · 진경 · 진건 · 진념 · 진지 · 진전 · 진번 | 66권 「두승명등전(杜僧明等傳)」 | 두승명 · 주문육 · 후진 · 후안도 · 구양위 · 황법구 · 순우량 · 장소달 · 오명철 | 67권 「호영등전(胡穎等傳)」 | 호영 · 서도 · 두릉 · 주철무(1) · 정령세 · 심각 · 육자륭 · 전도집 · 낙문아 · 손창 · 서세보 · 주부 · 순랑 · 주경 · 노실달 · 소마하 · 임충 · 번의 | 68권 「조지례등전(趙知禮等傳)」 | 조지례 · 채경력 · 종원요 · 한자고 · 화교 · 유사지 · 사기 · 모희 · 심군리 · 육산재 | 69권 「심형등전(沈炯等傳)」 | 심형 · 우려 · 부재 · 고야왕 · 요찰 | | 70권 「순리전(循吏傳)」 | 길한 · 두기 · 신념 · 두혜도 · 완장지 · 견법숭 · 부염 · 우원 · 왕홍궤 · 심우 · 범술증 · 손겸 · 하원 · 곽조심 | 71권 「유림전(儒林傳)」 | 복만용 · 하동지 · 엄식지 · 사마경 · 변화 · 최령은 · 공첨 · 노광 · 심준(峻) · 공자구 · 황간 · 심수 · 척곤 · 정작 · 전완 · 장기 · 고월 · 척곤 · 왕원규 | 72권 「문학전(文學傳)」 | 구영국 · 단초 · 변빈 · 구거원 · 왕지심 · 최위조 · 조충지 · 가희경 · 원준 · 유소(昭) · 종영 · 주흥사 · 오균 · 유협 · 하사징 · 임효공 · 안협 · 기소유 · 두지위 · 안황 · 잠지경 · 하지원 · 서백양 · 장정견 · 완탁 | 73·74권 「효의전(孝義傳)」 | 공영 · 유유(瑜) · 가은 · 곽세통 · 엄세기 · 오규 · 반종 · 장진지 · 구걸 · 사각수 · 왕팽 · 장공 · 서경 · 손법종 · 범숙손 · 복천여 · 허소선 · 여제인 · 손극 · 하자평 · 최회순 · 왕허지 · 오경지 · 소예명 · 소교처양 · 공손승원 · 오흔지 · 한계백 · 구관선 · 손담 · 화보 · 해숙겸 · 한영민 · 유풍 · 봉연백 · 오달지 · 왕문수 · 악이지 · 손법종 · 유도민 · 등담공 · 도계직 · 심숭소 · 순장 · 길분 · 견염 · 조발호 · 한회명 · 저수 · 장경인 · 도자장 · 성경준 · 이경서 · 사린 · 은불해 · 사마고 · 장소 | 75·76권 「은일전(隐逸傳)」 | 도잠 · 종소문 · 심도건 · 공순지 · 주속지 · 대옹 · 적법사 · 뇌차종 · 곽희림 · 유응지 · 공기 · 주백년 · 관강지 · 어부 · 저백옥 · 고환 · 두경산 · 장영서 · 오포 · 서백진 · 심인사 · 완효서 · 등욱 · 도홍경 · 제갈거 · 유혜비 · 범원엽 · 유선 · 장효수 · 유승선 | 77권 「은행전(恩倖傳)」 | 대법흥 · 서원 · 완전부 · 기승진 · 유계종 · 여법량 · 여문현 · 여법진 · 주석진 · 육험 · 사마신 · 시문경 · 심객경 · 공범 | 78·79권 「이맥전(夷貊傳)」 | 임읍 · 부남 · 중천축국 · 사자국 · 고구려 · 백제국 · 신라 · 왜 · 부상국· 하남왕국 · 탕창 등지 · 무흥국 · 형옹주·예주만 · 고창 · 쿠처 · 우전국 · 파사국 ·연연 | 80권 「적신전(賊臣傳)」 | 후경 ,왕위, · 웅담랑 · 주적 · 유이 · 진보응 | (1) 본명이 주철호(周鐵虎)로 당태조로 추존된 이호(李虎)를 피휘하여 무(武)로 개칭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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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舊唐書) |
- [ 본기(本紀) ]
||<tablewidth=100%><tablebgcolor=#a48252><width=33%><-2> 1권 「고조기(高祖紀)」 ||<width=33%><-2> 2·3권 「태종기(太宗紀)」 ||<width=33%><-2> 4·5권 「고종기(高宗紀)」 || ||<rowbgcolor=#fff,#191919><-2> 이연(李淵) ||<-2> 이세민 ||<-2> 이치 || ||<-2> 6권 「측천황후기(則天皇后紀)」 ||<-2> 7권 「 중종·예종기(中宗睿宗紀)」 ||<-2> 8·9권 「현종기(玄宗紀)」 || ||<rowbgcolor=#fff,#191919><-2> 무조 ||<-2> 이현(李顯) · 이단 ||<-2> 이융기 || ||<-2> 10권 「숙종기(肅宗紀)」 ||<-2> 11권 「대종기(代宗紀)」 ||<-2> 12·13권 「덕종기(德宗紀)」 || ||<rowbgcolor=#fff,#191919><-2> 이형(李亨) ||<-2> 이예(李豫) ||<-2> 이괄 || ||<-2> 14·15권 「순종·헌종기(順宗憲宗紀)」 ||<-2> 16권 「목종기(穆宗紀)」 ||<-2> 17권 「경종·문종기(敬宗文宗紀)」 || ||<rowbgcolor=#fff,#191919><-2> 이송 · 이순(李純) ||<-2> 이항 ||<-2> 이심(李湛) · 이앙 || ||<-2> 18권 「무종·선종기(武宗宣宗紀)」 ||<-2> 19권 「의종·희종기(懿宗僖宗紀)」 ||<-2> 20권 「소종·애종기(昭宗哀宗紀)」 || ||<rowbgcolor=#fff,#191919><-2> 이염(李瀍) · 이침(李忱) ||<-2> 이최 · 이현(李儇) ||<-2> 이엽 · 이축 || ||<-6><width=1000> 51·52권 「후비전(后妃傳)」 || ||<-6><bgcolor=#fff,#191919> 태목황후 · 문덕황후 · 서혜 · 왕폐후 · 소양제 · 화사황후 · 위황후 · 상관소용 · 숙명황후 · 소성황후 · 왕폐후 · 정순황후 · 양귀비 원헌황후 · 장황후 · 장경황후 · 예진황후 · 정의황후 · 소덕황후 · 장헌황후 · 의안황후 · 효명황후 · 공희황후 · 정헌황후 · 적선황후 ||
※ 21권 ~ 50권은 志에 해당. 구당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53권 「이밀전(李密傳)」 | 54권 「왕세충등전(王世充等傳)」 | 이밀 ,선웅신, | 왕세충 · 두건덕 | 55권 「설거등전(薛舉等傳)」 | 설거 ,설인고,· 이궤 · 유무주 ,원군장, · 고개도 · 유흑달 ,서원랑, | 56권 「소선등전(蕭銑等傳)」 | 소선 · 두복위 · 보공석 ,감릉 왕웅탄, · 심법흥 · 이자통 ,주찬 임사홍 장선안, · 나예 · 양사도 ,유계진 이자화, | 57권 「배적등전(裴寂等傳)」 | 배적 · 유문정 ,이맹상 진행사 유세룡 조문각 장평고 이사행 이고천 허세서 유사립 전구농 번흥 공손무달 방경운 장장경 이안원, | 58권 「당검등전(唐儉等傳)」 | 59권 「굴돌통등전(屈突通等傳)」 | 당검 · 장손순덕 · 유홍기 · 은개산 · 유정회 · 시소 · 무사확 | 굴돌통 · 임괴 · 구화 · 허소 · 이습지 · 강모 | 60권 「종실전(宗室傳)」 | 이효기 · 이신통 · 이신부 · 이숙량 · 이침(李琛) · 이효공 · 이원(李瑗) · 이도현 · 이도종 · 이박예 | 61권 「온대아등전(溫大雅等傳)」 | 62권 「이강등전(李綱等傳)」 | 63권 「봉륜등전(封倫等傳)」 | 온대아 · 진숙달 · 두위 | 이강(李綱) · 정선과 · 양공인 · 황보무일 · 이대량 | 봉륜 · 소우 ,소예 소균 소관 소업, · 배구 · 우문사급 | 64권 「고조22자전(高祖二十二子傳)」 | 이건성 · 이현패 · 이원길 · 이지운 · 이원경(李元景) · 이원창 · 이원형 · 이원방 · 이원례 · 이원가 · 이원칙 · 이원의 · 이원궤 · 이봉(李鳳) · 이원경(李元慶) · 이원유 · 이원명 · 이령기 · 이원상 · 이원효 · 이원영 | 65권 「고사렴등전(高士廉等傳)」 | 66권 「방현령등전(房玄齡等傳)」 | 67권 「이정등전(李靖等傳)」 | 고사렴 · 장손무기 | 방현령 · 두여회 | 이정(李靖) · 이세적 | 68권 「울지경덕등전(尉遲敬德等傳)」 | 69권 「후군집등전(侯君集等傳)」 | 70권 「왕규등전(王珪等傳)」 | 울지경덕 · 진경 · 정지절 · 단지현 · 장공근 | 후군집 · 장량 · 설만철 | 왕규 · 대주 · 잠문본 · 두정륜 | 71권 「위징전(魏徵傳)」 | 72권 「우세남등전(虞世南等傳)」 | 73권 「설수등전(薛收等傳)」 | 위징 | 우세남 · 이백약 · 저량 | 설수 · 요사렴 · 안사고 · 영호덕분 · 공영달 | 74권 「유계등전(劉洎等傳)」 | 75권 「소세장등전(蘇世長等傳)」 | 유계 · 마주 · 최인사 | 소세장 · 위운기 · 손복가 · 장현소 | 76권 「태종제자전(太宗諸子傳)」 | 이승건 · 이관(李寬) · 이각(李恪) · 이태 · 이우(李祐) · 이음 · 이운(李惲) · 이정(李貞) · 이신(李愼) · 이효(李囂) · 이간(李簡) · 이복 · 이명 | 77권 「위정등전(韋挺等傳)」 | 78권 「우지녕등전(于志寧等傳)」 | 위정 · 양찬 · 유덕위 · 염입덕 ,염입본, · 유형 · 최의현 | 우지녕 · 고계보 · 장행성 | 79권 「조효손등전(祖孝孫等傳)」 | 80권 「저수량등전(褚遂良等傳)」 | 조효손 · 부인균 · 부혁 · 이순풍 · 여재 | 저수량 · 한원 · 내제 · 상관의 | 81권 「최돈례등전(崔敦禮等傳)」 | 최돈례 · 노승경 · 유상도 · 이경현 · 이의염 ,손처약, ,악언위, ,조인본, | 82권 「허경종등전(許敬宗等傳)」 | 83권 「곽효각등전(郭孝恪等傳)」 | 허경종 · 이의부 | 곽효각 · 장검 · 소정방 · 설인귀 · 정무정 ,정명진, ,장사귀, ,조도흥, | 84권 「유인궤등전(劉仁軌等傳)」 | 85권 「당림등전(唐臨等傳)」 | 유인궤 · 학처준 · 배행검 | 당림 · 장문관 · 서유공 | 86권 「고종·중종제자전(高宗中宗諸子傳)」 | 이충(李忠) · 이효(李孝) · 이상금 · 이소절 · 이홍 · 이현(李賢) · 이중윤 · 이중복 · 이중준 · 이중무 | 87권 「배염등전(裴炎等傳)」 | 88권 「위사겸등전(韋思謙等傳)」 | 배염 · 유의지 · 위현동 · 이소덕 | 위사겸 · 육원방 · 소괴 | 89권 「적인걸등전(狄仁傑等傳)」 | 90권 「왕급선등전(王及善等傳)」 | 적인걸 · 왕방경 · 요숙 | 왕급선 · 두경검 · 주경칙 · 양재사 · 이회원 · 두로흠망 | 91권 「환언범등전(桓彥範等傳)」 | 92권 「위원충등전(魏元忠等傳)」 | 환언범 · 경휘 · 최현위 · 장간지 · 원서기 | 위원충 · 위안석 · 소지충 ,종초객 기처눌, | 93권 「누사덕등전(婁師德等傳)」 | 94권 「소미도등전(蘇味道等傳)」 | 누사덕 · 왕효걸 · 당휴경 · 장인원 · 설눌 · 왕준 | 소미도 · 이교 · 최융 · 노장용 · 서언백 | 95권 「예종제자전(睿宗諸子傳)」 | 이헌 · 이총 · 이범 · 이업 · 이융제 | 96권 「요숭등전(姚崇等傳)」 | 97권 「유유구등전(劉幽求等傳)」 | 요숭 · 송경 | 유유구 · 종소경 · 곽원진 · 장열 | 98권 「위지고등전(魏知古等傳)」 | 99권 「최일용등전(崔日用等傳)」 | 위지고 · 노회신 · 원건요 · 이원굉 · 두섬 · 한휴 · 배요경 | 최일용 · 장가정 · 소숭 · 장구령 · 이적지 · 엄정지 | 100권 「윤사정등전(尹思貞等傳)」 | 윤사정 · 이걸 · 해완 · 필구 · 소향 · 정유충 · 왕지음 · 노종원 · 이조은 · 배최 · 왕구 | 101권 「이예등전(李乂等傳)」 | 102권 「마회소등전(馬懷素等傳)」 | 이예(李乂) · 설등 · 위주 · 한사복 · 장정규 · 왕구례 · 신체부 | 마회소 · 저무량 · 유자현 · 서견 · 원행충 · 오경 · 위술 | 103권 「곽건관등전(郭虔瓘等傳)」 | 104권 「고선지등전(高仙芝等傳)」 | 곽건관 · 곽지운 · 왕군착 · 장수규 · 우선객 · 왕충사 | 고선지 · 봉상청 · 가서한 | 105권 「우문융등전(宇文融等傳)」 | 106권 「이임보등전(李林甫等傳)」 | 우문융 · 위견 · 양신긍 · 왕홍 | 이임보 · 양국충 · 장위 · 왕거 · 왕모중 | 107권 「현종제자전(玄宗諸子傳)」 | 이종(李琮) · 이영(李瑛) · 이염(李琰) · 이요 · 이완 · 이거(李琚) · 이일(李一) · 이수(李璲) · 이교 · 이민 · 이린(李璘) · 이모 · 이분 · 이기(李琦) · 이환(李環) · 이황 · 이빈 · 이규(李珪) · 이공(李珙) · 이진(李瑱) · 이선(李璿) · 이경(李璥) | 108권 「위견소등전(韋見素等傳)」 | 109권 「풍앙등전(馮盎等傳)」 | 위견소 · 최원 · 최환 · 두홍점 | 풍앙 · 아사나사이 · 글필하력 · 흑치상지 · 이다조 · 이사업 · 백효덕 | 110권 「이광필등전(李光弼等傳)」 | 111권 「최광원등전(崔光遠等傳)」 | 이광필 · 왕사례 · 등경산 · 신운경 | 최광원 · 방관 · 장호 · 고적 · 창최 | 112권 「이고등전(李暠等傳)」 | 113권 「묘진경등전(苗晉卿等傳)」 | 이고(李暠) · 이린(李麟) · 이국정 · 이환(李峘) · 이거(李巨) | 묘진경 · 배면 · 배준경 | 114권 「노경등전(魯炅等傳)」 | 115권 「최기등전(崔器等傳)」 | 노경 · 배융 · 내진 · 주지광 | 최기 · 조국진 · 최관 · 경괄 · 위원보 · 위소유 · 위백옥 · 이승 | 116권 「숙종·대종제자전(肅宗代宗諸子傳)」 | 이계(李係) · 이담(李倓) · 이필(李佖) · 이근(李僅) · 이간(李僴) · 이정(李侹) · 이영(李榮) · 이광 · 이수(李倕) · 이사 · 이소(李佋) · 이동(李侗) · 이희 · 이막 · 이하(李遐) · 이술 · 이유(李逾) · 이연(李連) · 이형(李迥) · 이구(李遘) · 이내 · 이신(李迅) · 이선(李選) · 이소(李溯) · 이조 · 이섬 · 이운(李運) · 이우(李遇) · 이휼 · 이통 · 이규(李逵) · 이일(李逸) | 117권 「엄무등전(嚴武等傳)」 | 118권 「원재등전(元載等傳)」 | 엄무 · 곽영예 · 최녕 · 엄진 · 엄여 | 원재 ,왕앙, ,이소량, · 왕진 · 양염 · 여간 · 유준 | 119권 「양관등전(楊綰等傳)」 | 120권 「곽자의전(郭子儀傳)」 | 121권 「복고회은등전(僕固懷恩等傳)」 | 양관 · 최우보 · 상곤 | 곽자의 | 복고회은 · 양숭의 · 이회광 | 122권 「장헌성등전(張獻誠等傳)」 | 장헌성 · 노사공 · 곡환 · 진한형 · 양조성 · 번택 · 이숙명 · 배주 | 123권 「유안등전(劉晏等傳)」 | 124권 「설숭등전(薛嵩等傳)」 | 125권 「장일등전(張鎰等傳)」 | 유안 · 제오기 · 반굉 · 이손 | 설숭 · 영호창 · 전신공 · 후희일 · 이정기 | 장일 · 유종일 · 소복 · 유혼 | 126권 「이계등전(李揆等傳)」 | 127권 「요령언등전(姚令言等傳)」 | 이계(李揆) · 이함(李涵) · 진소유 · 노악 · 배서 | 요령언 · 장광성 · 원휴 · 교림 · 장섭 · 장진 · 홍경륜 · 팽언 | 128권 「단수실등전(段秀實等傳)」 | 129권 「한황등전(韓滉等傳)」 | 130권 「왕여등전(王璵等傳)」 | 단수실 · 안진경 | 한황 · 장연상 | 왕여 · 이필 · 최조 · 관파 | 131권 「이면등전(李勉等傳)」 | 132권 「이포옥등전(李抱玉等傳)」 | 이면 · 이고(李皋) | 이포옥 · 이포진 · 왕건휴 · 노종사 · 이봉(李芃) · 이징(李澄) | 133권 「이성등전(李晟等傳)」 | 134권 「마수등전(馬燧等傳)」 | 이성 | 마수 · 혼감 | 135권 「노기등전(盧杞等傳)」 | 노기 · 백지정 · 배연령 · 위거모 · 이제운 · 이실 · 위집의 · 왕숙문 · 정이 · 황보변 | 136권 「두참등전(竇參等傳)」 | 두참 · 제영 · 유자 · 노매 · 최손 · 제항 | 137권 「서호등전(徐浩等傳)」 | 서호 · 조연 · 유태진 · 이서 · 소설 · 우소 · 최원한 · 우공이 · 여위 · 정운규 · 이익 · 이하(李賀) | 138권 「단수실등전(段秀實等傳)」 | 139권 「육지전(陸贄傳)」 | 140권 「위고등전(韋臯等傳)」 | 조경 · 위륜 · 가탐 · 강공보 | 육지 | 위고 · 장건봉 · 노군 | 141권 「전승사등전(田承嗣等傳)」 | 142권 「이보신등전(李寶臣等傳)」 | 143권 「이회선등전(李懷仙等傳)」 | 전승사 · 전홍정 · 장효충 | 이보신 · 왕무준 · 왕정주 | 이회선 · 주도 · 유평 · 정일화 · 이전약 | 14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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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설마위전(王薛馬韋傳)」 | 99권 「이이대유최전(二李戴劉崔傳)」 | 위징 | 왕규 · 설수 · 마주 · 위정 | 이강(李綱) · 이대량 · 대주 · 유계 · 최인사 | 100권 「진양봉배우문정권염장강장전(陳楊封裴宇文鄭權閻蔣姜張傳)」 | 진숙달 · 양공인 ,양사도(楊師道), · 봉륜 · 배구 · 우문사급 · 정선과 · 권만기 · 염입덕 · 장엄 · 위홍기 · 강사도 · 장지건 | 101권 「소우전(蕭瑀傳)」 | 102권 「잠우이저요영호전(岑虞李褚姚令狐傳)」 | 소우 | 잠문본 · 우세남 · 이백약 · 저량 · 요사렴 · 영호덕분 | 103권 「소위손장전(蘇韋孫張傳)」 | 104권 「우고장전(于高張傳)」 | 소세장 · 위운기 · 손복가 · 장현소 | 우지녕 · 고풍 · 장행성 | 105권 「장손저한내이상관전(長孫褚韓來李上官傳)」 | 장손무기 · 저수량 · 한원 · 내제 · 이의염 · 상관의 | 106권 「두이최고곽조최양노이유이유손형전(杜二崔高郭趙崔楊盧二劉李劉孫邢傳)」 | 두정륜 · 최지온 · 고지주 · 곽정일 · 조홍지 · 최돈례 · 양홍례 · 노승경 · 유상도 · 이경현 · 유덕위 · 손처약 · 형문위 | 107권 「부여진전(傅呂陳傳)」 | 108권 「유배루전(劉裴婁傳)」 | 부혁 · 여재 · 진자앙 | 유인궤 · 배행검 · 누사덕 | 109권 「최양두종축왕전(崔楊竇宗祝王傳)」 | 최의현 · 양재사 · 두회정 · 종초객 · 축흠명 ,곽산운, · 왕여(王璵) | 110권 「제이번장전(諸夷蕃將傳)」 | 사대내 · 풍앙 · 아사나사이 · 아사나충 · 집실사력 · 글필하력 · 흑치상지 · 이근행 · 천남생 · 이다조 · 논궁인 · 손유정 · 울지승 · 상가고 · 배분 | 111권 「곽이장삼왕소설정당전(郭二張三王蘇薛程唐傳)」 | 곽효각 · 장검 · 왕방익 · 소열 · 설인귀 · 정무정 ,정명진,· 왕효걸 · 당선 · 장인원 · 왕준 | 112권 「왕한소설왕류풍장전(王韓蘇薛王柳馮蔣傳)」 | 113권 「당장서전(唐張徐傳)」 | 왕의방 · 한사언 · 소안항 · 설등 · 왕구례 · 유택 · 풍원상 · 장흠서 | 당림 · 장문관 · 서유공 | 114권 「최서소두로전(崔徐蘇豆盧傳)」 | 115권 「적학주전(狄郝硃傳)」 | 최융 · 서언백 · 소미도 · 두로흠망 | 적인걸 · 학처준 · 주경칙 | 116권 「이왕위육이이두전(二王韋陸二李杜傳)」 | 117권 「배유위이길전(裴劉魏李吉傳)」 | 왕침 · 위사겸 · 육원방 · 왕급선 · 이일지 · 두경전 · 이회원 | 배염 · 유의지 · 위현동 · 이소덕 · 길욱 | 118권 「장위한송신이이배전(張韋韓宋辛二李裴傳)」 | 119권 「무이가백전(武李賈白傳)」 | 장정규 · 위주 · 한사복 · 송무광 · 신체부 · 이발 · 배린 · 이중민 · 이감 | 무평일 · 이예(李乂) · 가증 · 백거이 | 120권 「오왕전(五王傳)」 | 환언범 ,이복업 습수 설계창, · 양원염 · 경휘 · 최현위 · 장간지 · 원서기 | 121권 「유종최이왕전(劉鐘崔二王傳)」 | 122권 「위위곽전(魏韋郭傳)」 | 유유구 · 종소경 · 최일용 · 왕거 · 왕모중 | 위원충 · 위안석 · 곽진 | 123권 「이소로위조화전(李蕭盧韋趙和傳)」 | 124권 「요송전(姚宋傳)」 | 이교 · 소지충 · 노장용 · 위거원 · 조언소 · 화봉요 | 요숭 · 송경 | 125권 「소장전(蘇張傳)」 | 126권 「위로이두장한전(魏盧李杜張韓傳)」 | 소괴 · 장열 | 위지고 · 노회신 · 이원굉 · 두섬 · 장구령 · 한휴 | 127권 「장원배전(張源裴傳)」 | 장가정 · 원건요 · 배요경 | 128권 「소윤필이정왕허반예석제전(蘇尹畢李鄭王許潘倪席齊傳)」 | 소향 · 윤사정 · 필구 · 이걸 · 정유충 · 왕지음 · 허경선 · 반호례 · 예약수 · 석예 · 제한 | 129권 「배최노이왕엄전(裴崔盧李王嚴傳)」 | 130권 「배양송양최이해전(裴陽宋楊崔李解傳)」 | 배수진 · 배면 · 노종원 · 이조은 · 왕구 · 엄정지 · 왕충사 | 배최 · 양교 · 송경례 · 양창 · 최은보 · 이상은(李尙隱) · 해완 | 131권 「종실재상전(宗室宰相傳)」 | 132권 「유오위장류침전(劉吳韋蔣柳沈傳)」 | 이적지 · 이현(李峴) · 이면 · 이이간 · 이정(李程) · 이석 · 이회 | 유자현 · 오긍 · 위술 · 장예 · 유방 · 심기제 | 133권 「이곽양왕장우전(二郭兩王張牛傳)」 | 134권 「우문위양왕전(宇文韋楊王傳)」 | 곽건관 · 곽지운 · 왕군착 · 장수규 · 왕충사 · 우선객 | 우문융 · 위견 · 양신긍 · 왕홍 | 135권 「가서고봉전(哥舒高封傳)」 | 136권 「이광필전(李光弼傳)」 | 137권 「곽자의전(郭子儀傳)」 | 가서한 · 고선지 · 봉상청 | 이광필 | 곽자의 | 138권 「이이마로전(二李馬路傳)」 | 139권 「방장이전(房張李傳)」 | 140권 「최묘이배려전(崔苗李裴呂傳)」 | 이사업 · 마린 · 이포옥 · 노사공 | 방관 · 장호 · 이필 | 최원 · 묘진경 · 배면 · 배준경 · 여인 | 141권 「최등위위이한노고전(崔鄧魏衛李韓盧高傳)」 | 최광원 · 등경산 · 최관 · 위소유 · 위백옥 · 이징(李澄) · 한전의 · 노종사 · 고하우 | 142권 「이양최류위로전(李楊崔柳韋路傳)」 | 이린(李麟) · 양관 · 최우보 · 유혼 · 위처후 · 노수 | 143권 「고원이위설최대왕서치신전(高元李韋薛崔戴王徐郗辛傳)」 | 고적 · 원결 · 이승 · 위륜 · 설각 · 최한형 · 대숙륜 · 왕굉 · 서신 · 치사미 · 신비 | 144권 「내전후최엄전(來田侯崔嚴傳)」 | 145권 「원반여양엄두전(元王黎楊嚴竇傳)」 | 146권 「이이전(二李傳)」 | 내진 · 전신공 · 후희일 · 최녕 · 엄여 | 원재 · 왕진 · 여간 · 양염 · 엄정 · 두참 | 이서균 · 이용(李鄘) | 147권 「삼왕노신풍삼이곡이로전(三王魯辛馮三李曲二盧傳)」 | 왕사례 · 노경 · 왕난득 · 신운경 · 풍하청 · 이봉(李芃) · 이숙명 · 곡환 · 왕건휴 · 노군 · 이원소 · 노사매 | 148권 「영호장강이유전왕우사전(令狐張康李劉田王牛史傳)」 | 영호창 · 장효충 · 강일지 · 이유(李洧) · 유옹 · 전홍정 · 왕승원 · 우원익 · 사효장 | 149권 「유제오반왕이전(劉第五班王李傳)」 | 150권 「이상조최제로전(李常趙崔齊盧傳)」 | 151권 「관동원조두전(關董袁趙竇傳)」 | 유안 · 제오기 · 반굉 · 왕소 · 이손(李巽) | 이계 · 상곤 · 조경 · 최조 · 제앙 · 노매 | 관파 · 동진 · 원자 · 조종유 · 두역직 | 152권 「장강무이송전(張姜武李宋傳)」 | 153권 「단안전(段顏傳)」 | 154권 「이성전(李晟傳)」 | 장일 · 강공보 · 무원형 · 이강(李絳) · 송신석 | 단수실 · 안진경 | 이성 | 155권 「마혼전(馬渾傳)」 | 마수 · 혼감 | 156권 「양대양이이한두형전(楊戴陽二李韓杜邢傳)」 | 양조성 · 대휴안 · 양혜원 · 이원량 · 이관(李觀) · 한유괴 · 두희전 · 형군아 | 157권 「육지전(陸贄傳)」 | 158권 「위장엄한전(韋張嚴韓傳)」 | 육지 | 위고 · 장건봉 · 엄진 · 한홍 | 159권 「포이소설왕오정육로유최전(鮑李蕭薛樊王吳鄭陸盧柳崔傳)」 | 포방 · 이자량 · 소흔 · 설파 · 번택 · 왕위 · 오주 · 정권 · 육긍 · 노탄 · 유성 · 최융 · 장정보 | 160권 「서여맹유양반최위전(徐呂孟劉楊潘崔韋傳)」 | 161권 「장조이정서왕풍유전(張趙李鄭徐王馮庾傳)」 | 서호 · 여위 · 맹간 · 유백추 · 양풍 · 반맹양 · 최원략 · 위수 | 장천 · 조연 · 이서 · 정운달 · 서대 · 왕중서 · 풍항 · 유경휴 | 162권 「요독고고위단여허설이전(姚獨孤顧韋段呂許薛李傳)」 | 요남중 · 독고급 · 고소련 · 위하경 · 단평중 · 여원응 · 허맹용 · 설존성 · 이손 | 163권 「공목최유양마전(孟簡等傳)」 | 공소부 · 목녕 · 최빈 · 유공작 · 양어릉 · 마총 | 164권 「귀해삼최노이설위호정이왕은전(歸奚三崔盧二薛衛胡丁二王殷傳)」 | 귀숭경 · 해척 · 최연 · 노경량 · 설빈 · 위차공 · 설융 · 호증 · 정공저 · 최홍례 · 최현량 · 왕질 · 은유 · 왕언위 | 165권 「삼정고권최전(三鄭高權崔傳)」 | 166권 「가두영호전(賈杜令狐傳)」 | 정여경 · 정순유 · 고영 · 정인 · 권덕여 · 최군 | 가탐 · 두우 · 영호초 | 167권 「백배최위이이황보왕전(白裴崔韋二李皇甫王傳)」 | 백지정 · 배연령 · 최손 · 위거모 · 이제운 · 이실 · 황보박 · 왕파 | 168권 「위왕육유류정전(韋王陸劉柳程傳)」 | 169권 「두배이위전(杜裴李韋傳)」 | 위집의 · 왕숙문 · 육질 · 유우석 · 유종원 · 정이 | 두황상 · 배기 · 이번 · 위관지 | 170권 「이고이주이유범이왕맹조이임장전(二高伊朱二劉范二王孟趙李任張傳)」 | 고숭문 · 이신(伊愼) · 주충량 · 유창예 · 범희조 · 왕악 · 맹원양 · 왕서요 · 유창 · 조창 · 이경략 · 임적간 · 장만복 · 고고 · 학비 | 171권 「이오왕양조고유석전(李烏王楊曹高劉石傳)」 | 172권 「우왕이두범전(于王二杜范傳)」 | 이광진 · 오중윤 · 왕패 · 양원경 · 조화 · 고우 · 유면 · 석웅 | 우적 · 왕지흥 · 두겸 · 두아 · 범정전 | 173권 「배도전(裵度傳)」 | 174권 「이이원우양전(二李元牛楊傳)」 | 배도 | 이봉길 · 원진 · 우승유 · 이종민 · 양사복 | 175권 「두유이장양웅백전(竇劉二張楊熊柏傳)」 | 176권 「한유전(韓愈傳)」 | 두군 · 유서초 · 장우신 · 양우경 · 장숙 · 웅망 · 백기 | 한유 | 177권 「전최이위이고풍삼이노봉정경전(錢崔二韋二高馮三李盧封鄭敬傳)」 | 전휘 · 최함 · 위표미 · 고익 · 풍숙 · 이우중 · 이고(李翺) · 노간사 · 고원유 · 봉오 · 정훈 · 경회 · 위박 · 이경양 | 178권 「유분전(劉賁傳)」 | 유분 | 179권 「이정이왕가서전(李鄭二王賈舒傳)」 | 이훈(李訓) · 정주 · 왕애 · 가속 · 서원여 · 왕파 · 곽행여 · 한약 · 나립언 · 이효본 · 고사옹 · 이정소 | 180권 「이덕유전(李德裕傳)」 | 181권 「진삼이조유전(陳三李曹劉傳)」 | 이덕유 | 진이행 · 이신(李紳) · 이양이 · 조확 · 유첨 · 이울 | 182권 「이이최소이정이노위주이배유조왕전(二李崔蕭二鄭二盧韋周二裴劉趙王傳)」 | 이고언 · 이각 · 최공 · 소업 · 정숙 · 노균 · 노간방 · 위종 · 주지 · 배휴 · 유전 · 조은 · 배탄 · 정연창 · 왕부 · 노광계 | 183권 「필최유육정주한전(畢崔劉陸鄭朱韓傳)」 | 필함 · 최언소 · 유업 · 육의 · 정계 · 주박 · 한악 | 184권 「마양노로전(馬楊路盧傳)」 | 185권 「정이왕위장전(鄭二王韋張傳)」 | 마식 · 앵수 · 노암 · 노휴 | 정전 · 왕탁 · 왕휘 · 위소도 · 장준 | 186권 「주왕등진유조이양고전(周王鄧陳劉趙二楊顧傳)」 | 주보 · 왕처존 · 등처눌 · 진유 · 유거용 · 조덕인 · 양수량 · 양성 · 고언랑 | 187권 「이왕제갈이맹전(二王諸葛李孟傳)」 | 188권 「양시주손전(楊時朱孫傳)」 | 왕중영 · 제갈상 · 이한지 · 왕경무 · 맹방립 | 양행밀 · 시부 · 주선 · 손유 | 189권 「고조전주전(高趙田朱傳)」 | 190권 「삼유성두종장왕전(三劉成杜鐘莊王傳)」 | 고인후 · 조주 · 전군 · 주연수 | 유건봉 · 성예 · 두홍 · 종전 · 유한굉 · 장웅 · 왕조 · 유지겸 | 191·192·193권 「충의전(忠義傳)」 | 하후단 · 유감 · 상달 · 경군홍 · 여자장 · 왕행민 · 나사신 · 장도원 · 이육덕 · 고예 · 안금장 · 왕동교 · 오보안 · 이징(李憕) · 노혁 · 장개연 · 최무피 · 안고경 · 가순 · 장순 · 허원 · 남제운 · 뇌만춘 · 요은 · 정천리 · 방견 · 장흥 · 채정옥 · 부령기 · 유내 · 맹화 · 장비 · 주증 · 장명진 · 석연분 · 오서 · 고목 · 가직언 · 신당 · 황갈 | 194권 「탁행전(卓行傳)」 | 원덕수 · 권고 · 견제 · 양성 · 사공도 | 195권 「효우전(孝友傳)」 | 이지본 · 장지관 · 유군량 · 왕소현 · 임경신 · 지숙재 · 정원사 · 무홍도 · 정잠요 · 원양 · 배경이 · 양문정 · 심계전 · 허백회 · 진집원 · 장수 · 서원경 · 여상안 · 양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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