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보이슬라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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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스테판 보이슬라브
(영어: Stefan Vojislav, 그리스어: Στέφανος Βοϊσθλάβος, 세르비아 키릴어: Стефан Војислав)
출생
미상
사망
1043년
직위
두클랴 대공
반란 대상
미하일 4세, 콘스탄티노스 9세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의 반란자. 미하일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으나, 탈옥 후 재차 반란을 일으켜 동로마 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쟁취했다. 세르비아의 초대 왕가인 네마니치 왕조의 시조이다.

2. 생애[편집]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두클랴 대공 요반 블라디미르(재위 990 ~ 1016)의 사촌이었다고 한다. 그는 사촌이 사망한 후 두클랴의 새로운 대공이 되었고, 라구사의 스트라테고스인 카타칼론 클라조메니테스와 자주 교류했다. 한번은 카타칼론이 보이슬라브가 자신의 아들 카타칼론의 대부가 되어주길 원해 보이슬라브 일행을 모셔오기도 했다. 보이슬라브는 훗날 자신이 납치당한 거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초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듯 동로마 관리들과 긴밀한 관계를 이어갔지만, 그는 내심 두클랴를 언젠가 독립시키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파일:스테판 보이슬라브 재위기의 두클랴.jpg

1025년 명군 바실리오스 2세가 사망한 뒤, 동로마 제국은 정국 혼란으로 점점 쇠약해졌고, 과도한 세금에 분노한 불가리아에서 폭동이 빗발치면서 산골짜기에 위치한 두클랴에 대한 통제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보이슬라브는 이 기회를 틈타 추종자들을 끌여들였고, 1034년 로마노스 3세 황제가 급사하여 제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1035년 또는 1036년 진압군에게 붙들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졌고, 두클랴는 스트라테고스 테오필로스 에로티코스의 관할에 들어갔다. 1037년 말 또는 1038년 초, 보이슬라브는 탈옥에 성공하여 두클랴로 돌아갔다. 이후 반군을 극비리에 끌어모았고, 동로마 제국에 우호적이던 자후믈례와 트라부니야 공국에 대한 유격전을 전개했다. 1040년경, 그의 영역은 북쪽의 스톤에서 남쪽의 스카다르까지 해안지대에 펼쳐졌고, 트레비네, 코토르, 바르에 독자적인 통치기관이 세워졌다.

1039년 동로마 제국의 남이탈리아 속주에서 테살로니키로 운송되던 10켄테나르의 (7,200 노미스마타)이 배에 실려 운송되던 중 폭풍우를 만나 해안가에 난파되었다. 그는 재빨리 그것을 회수하여 자기 것으로 삼았다. 미하일 4세는 이 소식에 격노하여 게오르기오스 프로바타스 장군에게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동로마군은 협곡에 섣불리 들어갔다가 보이슬라브의 군대에게 섬멸되었다. 그 후 불가리아인들이 1040년 페테르 데얀을 차르로 선포하고 제국에 맞섰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은 이들을 진압하느라 두클랴에 대한 별다른 공세를 벌이지 못했다.

1042년, 라쉬카의 공작 주판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막대한 금과 은을 받고, 두클랴의 보이슬라브를 타도하라는 의뢰를 수락했다. 주판은 1043년 군대를 일으켜 두클랴를 침공했지만, 코나블리의 클로불크 언덕에서 매복을 당해 참패했다. 보이슬라브는 공세를 이어가 자후믈례와 트라부니야 공국의 대부분을 공략했다. 이에 콘스탄티노스 9세는 다라키움과 주변 테마에 기반을 둔 동로마군을 파견하여 두클랴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1042년 10월 바르 전투에서, 미하일 아나스타시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참패했다. 이렇듯 동로마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하던 보이슬라브는 1043년경 사망했다. 사후 성모 마리아 교회에 묻혔다. 그의 아들 미하일로 보이슬라블례비치는 1077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부터 두클랴 왕위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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