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

덤프버전 :

파일: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jpg
이름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
(영어: Stefan Uroš II Milutin, 세르비아어: Стефан Урош II Милутин)
출생
1253년
사망
1321년 10월 29일
직위
세르비아 국왕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세르비아 왕국의 6대 국왕.


2. 생애[편집]


1253년 스테판 우로시 1세와 앙주의 엘레나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으로 스테판 드라구틴을 두었고, 남동생 스테판(어릴 때 요절), 여동생으로 1명(이름은 알려지지 않음)이 있었다. 1268년 부친이 동로마 제국과 연합하여 헝가리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그와 안드로니코스 2세의 손녀 안나 팔레올로기나를 결혼시키려 하였다. 스테판 우로시 1세는 사절단에게 "드라구틴은 병약해서 오래 살지 못할 테니, 밀루틴이 왕위에 오를 것이다"라는 언질을 줬다. 그러나 공주 일행은 세르비아 수도 라스로 향하던 중 강도에게 습격당해 재물을 잃었고, 라스 궁정에 도착한 뒤 세르비아 왕족들이 다 뜯겨진 드레스를 바느질해서 계속 입는 등 매우 검소하게 사는 것에 실망한 데다, 드라구틴이 여전히 궁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 보고 우로시에게 우롱당했다고 여겼다. 결국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고, 공주는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밀루틴은 세르비아 귀족의 딸로 추정되는 엘레나와 결혼했다.

1276년 스테판 드라구틴이 헝가리의 지원에 힘입어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귀족들의 압력을 받아 어머니 엘레나에게 막대한 영지를 할당할 수밖에 없었다. 밀루틴은 첫 아내 엘레네와 이혼하고 테살리아의 데스포티스 요안니스 두카스 앙겔로스의 딸 엘레나와 재혼했으며, 어머니의 궁정에 살았다. 이리하여 세르비아 궁정은 2개로 나뉜 꼴이 되었고, 그동안 스테판 우로시 1세의 중앙집권정책에 억눌러 있던 지방 귀족들은 이 틈을 타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 후 주변 국가와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려 애쓰며 매사를 소극적으로 처신하고, 심지어 동로마 제국이 세르비아로 쳐들어와 리플리얀 일대를 파괴했는데도 보복할 엄두도 못 내는 드라구틴에 대한 귀족들의 불만이 고조되던 1282년, 드라구틴은 낙마하여 다리가 부러졌다.

대주교 다니엘 2세의 전기 <성 스테판 드라구틴의 생애>에 따르면, 그는 데제프에서 평의회를 소집한 뒤, 건강상의 이유로 동생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는 드라구틴이 치료 결과를 기다리지도 않고 즉각 양위를 선포했다는데 의문을 제기하며, 데제프 평의회는 세르비아 귀족들의 주도로 소집되었고, 동로마 제국에게 수모를 당한 데 불만이 있던 그들은 왕의 중상을 핑계로 양위를 단행했다고 추정한다. 이후 드라구틴은 세르비아 북부 일대를 영지로 받았다. 또한 밀루틴은 자신이 죽으면 드라구틴의 아들 블라디슬라프를 차기 국왕으로 선출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밀루틴은 왕위에 오른 직후 시칠리아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 불가리아 제2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연합하여 반 동로마 제국 동맹의 일원이 되었다. 그들은 세르비아와 이피로스가 마케도니아를 공격할 때, 시칠리아, 베네치아, 불가리아는 육지와 바다에서 동시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기로 합의했다. 밀루틴은 합의에 따라 형 드라구틴과 함께 마케도니아로 쳐들어갔다. 그는 스코페, 오브제 폴레, 즐레토보, 피야네크를 점령했고, 드라구틴은 마케도니아를 통과하여 에게 해 연안에 도달했고, 여러 도시와 요새를 점령했다. 그런데 1282년 3월 30일, 시칠리아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시칠리아 국왕 카롤로 1세는 나폴리로 달아났고, 동로마 제국과 손을 잡은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를 확보하였다. 시칠리아 왕국군은 공세를 중단하고 돌아갔고, 베네치아와 불가리아 공세 역시 흐지부지되었다.

미하일 8세는 용병을 대거 고용하여 세르비아를 응징하고자 했으나, 도중에 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안드로니코스 2세는 원정을 취소했지만, 타타르 용병대를 세르비아로 파견하여 약탈을 자행하게 하였다. 약탈 부대는 프리즈렌까지 침투하며 약탈을 자행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 밀루틴은 드라구틴과 함께 보복 공세에 착수해, 1283년 흐리스토폴레 인근의 스투루마 일대의 세르지 일대를 관통하여 에게 해 연안으로 진입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동로마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요새에 틀어박혔고, 그들은 포로와 재물을 실컷 받아낸 뒤 마케도니아 중부로 후퇴하여 겨울을 보냈다.

그 후 드라구틴은 영지로 돌아갔고, 밀루틴은 1284년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지속했다. 그는 데바로, 키체포, 포레시를 점령하여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 북부를 공략하였으며, 뒤이어 동로마 제국의 요충지인 스트루미카, 프릴레프, 오흐리드, 크로야를 공략했다. 한편, 그는 테살리아와의 결혼 동맹을 파기하고 엘레나를 돌려보낸 뒤, 테살리아로 쳐들어가 주변 일대를 약탈하였다. 이후 헝가리 왕 스테판 5세의 딸 엘리자베타와 결혼했다가 얼마 안가 이혼했고, 1284년 불가리아 차르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의 딸 안나와 결혼해, 불가리아와 손을 잡았다.

한편, 불가리아의 브라니체보를 공동으로 통치하던 보야르 다르만과 쿠델린은 마흐바 일대를 주기적으로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헝가리는 이들을 상대로 여러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를 거듭하기만 했다. 드라구틴은 마흐바를 받아낸 뒤 두 보야르를 상대로 대규모 원정을 일으켰다. 브라니체보를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일으킨 원정이었지만, 오히려 패배하고 말았다. 세르비아군이 브라니체보에서 철수한 뒤, 다르만과 쿠델린은 타타르 용병대를 고용하여 드라구틴의 영역으로 쳐들어가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드라구틴은 밀루틴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밀루틴은 이에 응해 드라구틴과 함께 브라니체보로 쳐들어갔다. 1290년 브라니체보가 함락되었고, 드라구틴은 이 지역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1292년, 불가리아 비딘의 데스포티스 시슈만 1세는 브라니체보를 되찾겠다는 명목으로 세르비아로 쳐들어가 페슈를 습격했다. 밀루틴과 드라구틴은 즉각 반격에 나서 비딘을 포위했다. 시슈만 1세는 다뉴브 강으로 달아난 뒤 후원자인 킵차크 칸국의 노가이 칸에게 의지했다. 밀루틴은 노가이 칸의 개입을 두려워해 빼앗아간 불가리아 영역을 모두 돌려주고 아들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를 인질로 보냈다. 1299년 노가이 칸이 토그타 칸과의 전쟁 도중 살해되자,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는 아버지에게 돌아왔다. 밀루틴은 아들에게 제타를 영지로 하사했다. 제타는 전통적으로 왕의 후계자에게 주어지는 것이었으므로, 데찬스키가 새 왕으로 예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드라구틴은 동생의 이같은 조치에 분노했다. 이보다 앞서, 드라구틴은 세르비아 왕위를 넘길 때 차기 후계자는 자신의 아들인 블라디슬라프가 맡기로 했다. 그러나 밀루틴은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드러냈고, 그는 아들 블라디슬라프의 미래를 위해 반란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밀루틴은 드라구틴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자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안드로니코스 2세 황제의 딸인 시모니다를 다섯번째 왕비로 맞이했다.[1] 그러나 이 조치는 오히려 그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세르비아 귀족들은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지속하여 마케도니아 일대를 정복하고 싶었기에, 드라구틴을 지지하기로 하였다.

1301년, 밀루틴은 두브로브니크 상인들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은 이에 대응하여 믈제트를 점령하고, 보야나 강 하구의 해상을 봉쇄하고 코토르 항구를 습격했다. 양자는 1302년 9월 14일 베네치아 공화국의 중재하에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식했다. 1302년 밀루틴이 루드릭의 은광을 점유한 뒤, 밀루틴과 드라구틴 형제는 휴전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1303년 협약은 파기되었고, 전쟁은 10여 년간 지속되면서 세르비아 전역을 혼란에 빠뜨렸다. 두 사람의 내전이 이렇듯 장기화된 이유는 상대방을 압도할 만한 세력을 갖추지 못 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 귀족들은 대부분 드라구틴을 지지했지만, 때마침 헝가리에서 보헤미아의 바츨라프 3세를 지지하는 세력과 카로이 로베르트를 지지하는 앙주 세력과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여기에 가담하는 바람에 동생과 싸우는 동시에 헝가리에도 병력을 보내야 했다. 한편 밀루틴은 귀족들에게 버림받았지만 은광을 통제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용병을 고용하여 전쟁을 이어갔다.

기나긴 내전으로 세르비아 전역이 황폐해졌고, 외세는 이 때를 틈타 침략했다. 1304년경 보스니아 공작 파블레 1세 주비치는 훔 지역으로 쳐들어가 오노고스트까지 침투했다. 그는 아들 믈라덴 2세 주비치를 훔 일대 전체의 통치자로 추대했다. 하지만 이어진 전투에서 밀루틴의 군대는 믈라덴 2세를 포로로 잡았고, 파블레 1세는 아들을 석방하는 대가로 더 이상 쳐들어오지 말라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1307~1309년에는 카탈루냐 용병들이 야토스 산과 주변 지역을 약탈하였다.

1308년 카로이 로베르트가 최종적으로 헝가리 왕위에 올랐다. 드라구틴은 로베르트에게 아들 블라디슬라프를 후계자로 삼아달라고 요구했지만 거부당하자, 이번에는 그를 실각시킬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로베르트는 이 음모를 간파하고 정적들을 모조리 숙청하였고, 이로 인해 헝가리와 적대관계가 되어버렸다. 밀루틴이 1311년 말 또는 1312년 초에 드라구틴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고위 성직자들이 나서서 평화 협상을 중재했다. 두 통치자는 전쟁 이전의 관계로 되돌아가기로 했고, 드라구틴은 데찬스키의 세르비아 왕위 승계를 인정했다. 그 대신, 드라구틴의 아들 블라디슬라프는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기로 했다. 1314년 2월, 그는 스렘스카 미트로비차에서 카로이 로베르트와 평화 협약을 맺어 헝가리와의 전쟁도 종식하였다.

1314년, 제타의 통치자였던 아들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가 밀루틴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밀루틴이 격노하여 제타를 침공하자, 데찬스키를 돕겠다고 약속했던 귀족들은 대거 밀루틴에게 귀순했다. 밀루틴은 아들에게 용서해줄 테니 순순히 항복하라고 권했고, 데찬스키는 이를 믿고 귀순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없던 일로 만들고 스코페로 압송한 뒤 실명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집행인들은 뇌물을 받고 눈을 건드리지 않았고, 데찬스키는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추방되었다. 아들의 반란을 진압한 뒤, 그는 어머니의 무덤에 참배하러 온 형 드라구틴과 만나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대화를 나누었고, 서로에 대한 오랜 앙금을 풀었다. 1316년 3월 12일 드라구틴이 사망하였고, 아들 블라디슬라프가 뒤를 이어 스렘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밀루틴이 형이 사망한 직후 협약을 파기하였고, 1319년 블라디슬라프를 몰아내고 스렘 일대를 회복했다. 다만 베오그라드와 마츠바 등지는 헝가리에게 넘어갔다.

밀루틴은 데찬스키를 쫓아낸 뒤 데찬스키의 이복동생인 콘스탄틴에게 제타를 맡겼다. 하지만 데찬스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의 호감을 얻어냈고, 이를 발판삼아 힐란다르 수도승 다닐로와 세르비아 대주교 니코데무스를 포섭했다. 두 사람은 여러 성직자들과 함께 밀루틴에게 데찬스키를 용서해달라고 간청했다. 결국 밀루틴은 데찬스키 가족이 귀국하는 걸 허용했다. 1년 후인 1321년, 밀루틴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침대에 누운 채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국왕의 상태는 곧 전국에 알려졌고, 백성들이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강도가 들끓었다.

그해 10월 29일 밀루틴은 사망하였고, 제타의 통치자 콘스탄틴은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라스로 가서 왕위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가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라스에서 반란을 일으켜 삽시간에 수도를 장악하고, 1322년 1월 세르비아 대주교 니코데무스의 집전하에 대관식을 치르고 왕위에 올랐다. 콘스탄틴은 제타에서 대항했지만 데찬스키의 공세에 제타가 함락되면서 살해당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5 02:57:47에 나무위키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밀루틴은 8살 시모니다를 강간해 다치기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