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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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jpg
이름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
(영어: Stefan Uroš III Dečanski, 세르비아어: Стефан Урош III Дечански)
출생
1276년
사망
1331년 9월 11일
직위
세르비아 국왕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세르비아 왕국의 7대 국왕.


2. 생애[편집]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은 5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그중 데찬스키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기록이 미비해서 확실하지 않다. 1275년경 세르비아 봉건 영주의 딸 엘레나의 자식으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정론이나, 일각에서는 불가리아 제2제국 차르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의 딸이며 1284년경 밀루틴과 결혼한 안나 테르테르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1292년 불가리아 비딘의 데스포티스 시슈만 1세와 밀루틴의 전쟁이 벌어졌다. 비딘이 포위되자, 시슈만은 주군인 킵차크 칸국의 노가이 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밀루틴은 노가이 칸의 개입을 두려워해 1292년 또는 1293년에 데찬스키를 노가이 칸의 인질로 보냈다. 그는 7년간 인질로 있다가 1299년 노가이 칸이 토그타 칸과의 전쟁 도중 살해된 후 조국에 돌아왔다.

밀루틴은 데찬스키에게 제타를 영지로 하사했다. 제타는 전통적으로 왕의 후계자에게 주어지는 것이었으므로, 데찬스키가 새 왕으로 예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드라구틴은 동생의 이같은 조치에 분노했다. 이보다 앞서, 드라구틴은 세르비아 왕위를 넘길 때 차기 후계자는 자신의 아들인 블라디슬라프가 맡기로 했다. 그러나 밀루틴은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을 공공연히 드러냈고, 그는 아들 블라디슬라프의 미래를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10여 년간 이어지며 세르비아를 황폐화했다. 밀루틴이 1311년 말 또는 1312년 초에 드라구틴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고위 성직자들이 나서서 평화 협상을 중재했다. 두 통치자는 전쟁 이전의 관계로 되돌아가기로 했고, 드라구틴은 데찬스키의 세르비아 왕위 승계를 인정했다. 그 대신, 드라구틴의 아들 블라디슬라프는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기로 했다. 1314년 2월, 그는 스렘스카 미트로비차에서 카로이 로베르트와 평화 협약을 맺어 헝가리와의 전쟁도 종식하였다.

1314년, 데찬스키는 아버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밀루틴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에게 꼬드김받았다는 설, 밀루틴이 어머니 안나와의 결혼을 무효화하는 바람에 졸지에 사생아로 격하되어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할까 두려웠다는 설이 제기되지만, 확실한 건 없다. 밀루틴은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해 친히 제타를 침공했다. 찬스키를 돕겠다고 약속했던 귀족들은 대거 밀루틴에게 귀순했다. 밀루틴은 아들에게 용서해줄 테니 순순히 항복하라고 권했고, 데찬스키는 이를 믿고 귀순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없던 일로 만들고 스코페로 압송한 뒤 실명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그는 시력을 잃지 않았다. 본인은 훗날 "신의 은총 덕분에 실명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했지만, 집행인들에게 뇌물을 건네서 실명당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추방되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의 호감을 얻어냈고, 이를 발판삼아 힐란다르 수도승 다닐로와 세르비아 대주교 니코데무스를 포섭했다. 두 사람은 여러 성직자들과 함께 밀루틴에게 데찬스키를 용서해달라고 간청했다. 결국 밀루틴은 데찬스키 가족이 귀국하는 걸 허용했다. 1년 후인 1321년, 밀루틴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침대에 누운 채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국왕의 상태는 곧 전국에 알려졌고, 백성들이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강도가 들끓었다.

그해 10월 29일 밀루틴은 사망하였고, 제타의 통치자 콘스탄틴은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라스로 가서 왕위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라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이 실명형을 받았지만 성 니콜라스의 은총으로 시력이 회복되었다고 선언했다. 이에 수많은 지지자들이 그에게 몰렸고, 삽시간에 수도를 장악한 뒤 1322년 1월 세르비아 대주교 니코데무스의 집전하에 대관식을 치르고 왕위에 올랐다. 콘스탄틴은 제타에서 대항했지만 데찬스키의 공세에 제타가 함락되면서 체포되었다. 그는 콘스탄틴을 판자에 묶은 뒤 철못으로 박아 죽이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스테판 드라구틴의 아들이며 스렘의 왕이었지만 부친이 사망한 뒤 밀루틴이 영지 계승을 인정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쳐들어오는 바람에 체포되어 이때까지 옥고를 치르고 있던 블라디슬라프가 탈옥했다. 그는 스렘으로 돌아간 뒤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세르비아의 왕이라고 선언하고 주화를 주조하였다. 헝가리 왕과 보스니아의 스테판 코트로마니치가 그를 지원했고, 미하일 아센 3세 역시 블라디슬라프를 지원했다. 이 내전은 1324년 봄까지 이어지다가, 오스트로비차 인근의 전투에서 데찬스키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블라디슬라프는 헝가리로 망명한 뒤 그곳에서 죽었다.

1322년 10월 아내 테오도라가 죽자, 타렌툼의 필리포의 딸과 재혼해 앙주 왕조와 동맹을 맺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에 의해 쫓겨난 블라디슬라프가 어머니를 통해 앙주 왕조와 혈연이 닿았기 때문에,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차선책으로 동로마 제국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의 조카인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의 딸인 마리아 팔레올로기나와 1324년 결혼했다.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는 테살로니키의 데스포티스로, 독립국을 세우려는 야망을 품었다. 1326년, 그는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데찬스키에게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라고 설득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요안니스에게 복종하면 카이사르(부황제)의 칭호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요안니스는 그 말에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하다가 스코페에서 돌연사했다.

1325년. 스톤을 다스리던 세르비아의 영주 브라니보예비치는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것이 데찬스키의 주도인지, 입지를 강화하여 장차 세르비아로부터 독립하려는 브라니보예비치의 독단 행동인지는 알 수 없다. 두브로브니크는 즉시 반격하여 브라니보예비치를 격파하고 스톤을 점령했다. 그러자 데찬스키는 1327년 하반기에 두브로브니크를 공격하여 도시 주변을 약탈했다. 두브로브니크 함대는 이에 대응하여 코토로 섬 인근 해안가에서 세르비아 상인의 배를 공격했다. 1328년 양자는 평화 협약을 체결하였고,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은 브라니보예비치로부터 빼앗은 땅을 반환하기로 했다.

이 무렵, 동로마 제국에서 제1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발발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세르비아에 도움을 요청했고, 안드로니코스 3세는 불가리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1328년 데찬스키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세르비아-동로마 국경지대에 도착했지만, 안드로니코스 3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물러났다. 대신 안드로니코스 3세에게 충성을 바치길 거부한 프로세크 시를 자기 영역에 포섭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이를 빌미삼아 세르비아를 공격하기로 하고, 불가리아에 세르비아를 함께 손봐주자고 제의했다. 안 그래도 세르비아의 성장세를 두려운 눈길로 바라보던 미하일 아센 3세는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1324년 데찬시키의 누이인 안나 네다를 내쫓고 안드로니코스 3세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세르비아는 이에 분노를 터트리며 불가리아와의 국교를 단절했다.

1328-1329년, 세르비아 유격대가 마케도니아의 동로마 관할 지역에 침입하여 오흐리드를 포위했다. 그러다 안드로니코스 3세의 군대가 도시에 접근하자 후퇴했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전쟁을 단행하기로 결심하고, 1130년 여름 마케도니아의 세르비아 영토를 침공했다. 하지만 내륙으로 멀리 진격하지 않고 국경지대를 공략하는 데 그쳤다. 황제는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의 대결을 지켜보고, 결과가 나오는 대로 행동에 나설 작정이었다. 한편 미하일 아센 3세는 1330년 7월 19일 수도 터르노보에서 출진하여 비딘으로 진격해 타타르와 왈라키아 용병들과 합세한 뒤, 남쪽으로 진군하여 세르비아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젬린 마을에 이르렀다.

데찬스키는 도브리치코 폴제(현재 세르비아 야블라니차주의 레스코바츠시 인근)에 주둔하여 적군의 움직임을 관측했다. 그는 곧 동로마 제국군이 국경 지대에서 얼쩡거릴 뿐이고, 불가리아군이 남쪽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그는 불가리아군부터 상대하기로 하고, 전군을 이끌고 카메네카 강 서안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불가리아군과 조우했을 때, 세르비아군의 선봉 만이 간신히 현장에 도착한 상태였다. 이에 스테판 우로슈 3세는 시간을 끌기 위해 협상을 제의한 끝에 잠깐 동안 휴전을 맺기로 했다. 불가리아군은 적을 얕잡아보고 있었기에 스테판이 시간을 질질 끄는 걸 방치했다. 또한 장병들은 보급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농촌 약탈에 매진할 뿐 군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아서, 군대의 기강이 형편없어졌다. 이리하여 7월 28일 새벽까지 시간을 끄는 데 성공한 스테판은 전 병력이 집결하자 벨버즈드 마을 근방에 진을 치고 있는 불가리아군을 새벽에 기습하기로 했다.(벨버즈드 전투)

7월 28일 새벽, 데찬스키는 휴전 약속만 믿고 방심하고 있던 불가리아군 진영으로 몰래 접근했다. 이윽고 적진이 눈앞에 이르자, 아들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이끄는 중기병 2,000명이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불가리아군은 여러 곳에 흩어져서 기습에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르비아군의 갑작스런 기습을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은 불가리아 제국군 깃발을 탈취하는 등 종횡무진하였고, 불가리아군은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중기병대에게 살육당했다. 외지에 있던 불가리아군은 본진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모였으나, 워낙 다급한 상황인 터라 전열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이때 데찬스키가 이끄는 본대가 그들을 덮쳤고, 불가리아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사방으로 도주했다.

미하일 아센 3세는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세르비아군에 맞서려 했지만, 병사들이 말을 듣지 않자 자기도 도주하다가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낙마하였고, 세르비아군에게 체포된 뒤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7월 31일 낙마로 인한 중상이 악화되면서 사망했다.[1] 세르비아군은 여세를 몰아 불가리아 잔여 병력이 모인 코냐브스카 산을 향해 진격했지만, 미하일 아센 3세의 동생인 베나르가 병사들을 성공적으로 수습하여 진입로를 차단했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불가리아 보야르들이 라도미르 마을 근처에서 스테판 우로슈 3세와 만나 평화를 요구했다. 그들은 데찬스키의 조카인 이반 스테판이 차기 불가리아 차르로 즉위하게 하겠다고 밝혔고, 니시를 세르비아에 할양하겠다고 약속했다. 데찬스키는 이 조건을 받아들여 불가리아군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걸 막지 않았다. 이후 보야르들은 약속대로 이반 스테판을 새 차르로 옹립했다.

데찬스키가 세르비아의 영토 일부를 탈취하지도 않고 전쟁을 이대로 끝내기로 하자, 이번 기회에 막대한 수익을 챙기려 했던 귀족들은 격분했고, 아들 스테판 두샨 역시 반발했다. 데찬스키는 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게 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불가리아가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했지만, 그가 점령한 도시에는 수비대가 남았다. 두샨은 이 도시들을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다. 그 후 데찬스키는 두샨을 제타의 지배자로 임명하면서, 사실상 왕위 계승자로 선언했다. 그러나 두샨은 내심 부친이 마리아 팔레올로기나에게서 낳은 어린 아들 시메온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두려워했다. 여기에 귀족들도 반란을 일으키라고 꼬드기면서 부자의 갈등은 갈수록 깊어졌다.

아들의 낌새가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데찬스키는 1330년 가을 제타에 군대를 보내 스카다르를 약탈했다. 이후 부자는 보야나 강을 두고 대치했다가, 극적으로 화해하여 이전의 관계로 돌아오기로 했다. 그러나 3개월 뒤 스테판 우로시 3세가 소환령을 내리자, 스테판 우로슈 4세 두샨은 부친이 자기를 불러다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판단하고, 자기가 선수를 치기로 결심해 소규모 기병대를 이끌고 부친이 머물고 있던 네로디믈례를 습격했다. 스테판 우로시 3세는 가까스로 도피했으나, 추격대가 따라붙으면서 페트리치에서 사로잡힌 뒤 투옥되었다. 이리하여 1331년 9월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새 국왕으로 즉위했다. 데찬스키는 그해 9월 11일 사망했다. 아들의 명령으로 목이 졸려 죽었다는 설과 병사했다는 설이 병립하지만, 어느 쪽이 사실과 가까운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데찬스키 수도원의 뒷마당에 묻혔기에, 사후에 '데찬스키'라는 별명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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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기록에는 스테판 두샨이 포로로 잡힌 미하일 아센 3세를 끌어내 손수 쳐 죽였다고 하고, 또다른 기록에는 낙마한 직후 세르비아군의 창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