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르얀니스 팔레올로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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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시르얀니스 팔레올로고스 필란트로피노스
(영어: Syrgiannes Palaiologos Philanthropenos, 그리스어: Συργιάννης Παλαιολόγος Φιλανθρωπηνός)
출생
1290년
사망
1334년
직위
트라키아 총독, 메가스 둑스, 테살로니카 총독
반란 대상
안드로니코스 2세, 안드로니코스 3세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반란자. 안드로니코스 2세안드로니코스 3세를 이간질하여 팔레올로고스 내전을 야기하였으며, 나중에는 스테판 두샨과 연합하여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가 진압당했다.


2. 생애[편집]


1290년경 쿠만족이었던 아버지와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창건자인 미하일 8세의 조카 에우제니아 팔레올로기나 사이에서 출생했다. 본래 이름은 쿠만족의 방식에 따라 지어진 '시츠칸(Sytzigan)'이었지만, 나중에 정교회 방식으로 세례를 받고 '시르얀니스(Syrgiannes)'로 개명하였고, 어머니의 가문명을 따라 성을 정했다. 여동생으로 테오도라가 있었는데, 나중에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군주가 되는 기 드 뤼시냥과 결혼했다.

1315년 세르비아 국경 근처의 마케도니아 지방의 총독으로 지내던 그는 안드로니코스 2세로부터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는데도 무시하고 세르비아와 이피로스를 동시에 공격했다. 이로 인해 직위에서 해임되자 반란을 일으켰지만 체포 후 투옥되었다. 하지만 1320년 이전에 사면되었고 트라키아 총독으로 부임했다.

1320년 안드로니코스 3세가 동생 마누일이 자신의 정부와 간통을 했다고 의심하고 붙잡아 죽여버렸다. 이 소식을 접한 아버지 미하일 9세는 마침 이 시기에 숨을 거둔 딸 안나 때문에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였다는 소식은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줬다. 결국 그는 기력이 쇠해 10월 12일 테살로니카에서 죽었다. 이에 격노한 안드로니코스 2세는 손자인 안드로니코스 3세와 의절하고 자신의 막내 아들인 콘스탄티노스를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임명했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3세는 할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21년 부활절에 수도를 탈출해 아드리아노플로 도피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만의 정부를 세우고 할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그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 함께 안드로니코스 3세를 도왔다. 두 사람은 중과세에 신음하고 있던 현지 주민들의 불만을 선동해 대규모 병력을 모집한 뒤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트라키아 속주 전역에 세금을 완전히 면제해주는 등 온갖 선심성 정책을 남발했고, 백성들은 기뻐 날뛰며 안드로니코스 3세를 받들었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2세는 반란의 물결이 제국 전역에 번질 것을 우려해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양측은 6월 6일에 제국을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예전처럼 보스포루스에서 다스렸고, 안드로니코스 3세는 아드리아노플에 자리잡았다. 다만 안드로니코스 2세는 제국의 대외 정책은 자신이 혼자서 맡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안드로니코스 3세는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취하기로 했고, 그러다보니 얼마 안가서 서로 다른 두 제국이 전혀 다른 정책, 심지어 상충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양상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가 오래 갈 수 없었고, 양측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었다.

1322년 초, 시르얀니스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젊은 안드로니코스 3세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다고 여겨 그를 시기하다가[1]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친 뒤 메가스 독스의 칭호를 받고 안드로니코스 2세를 설득하여 손자와 전쟁을 재개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양측은 또다시 충돌했지만 얼마 안가 안드로니코스 2세가 전쟁을 끝내자고 제의했다. 그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에서 반란이 너무 자주 일어나자 이러다가는 자칫 보유하고있는 영토마저 잃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1322년 7월, 두 황제는 두 번째 협정을 맺었다. 두 안드로니코스는 제국을 공동으로 다스리기로 합의했고 안드로니코스 3세는 단독 상속자로 추인받았다. 하지만 안드로니코스 2세는 선임 황제의 지위를 유지했고 손자의 정책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보유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협약이 이뤄지는 걸 원치 않았기에, 안드로니코스 2세를 죽이고 황위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음모는 발각되었고, 긴급 체포된 뒤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1328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한 뒤 할아버지를 폐위하고 단독 황제가 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시르얀니스를 석방하고 1329년 말 테살로니카 총독에 임명했다. 그는 테살로니카와 더불어 서부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를 다스렸다. 그런데 그는 현지에 부임하자마자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를 음해하는 공작을 폈다가 발각되자 아예 세르비아로 망명했다.

마침 동로마 제국을 침략할 준비를 하던 스테판 두샨은 그를 환대했고, 선봉대 지휘권을 맡겼다. 그는 1334년 봄에 카스토리아와 그 일대의 요새 여러 곳을 점령해 은혜에 보답했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스프란체스 팔레올로고스를 테살로니카 일대의 총독으로 임명해 시르얀니스를 유인한 후 생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334년 8월 23일, 그는 소수의 가신과 함께 스프란체스의 초대를 받아 진영에 들어갔다가 급습을 받고 살해되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것에 책임을 물어 스프란체스에게 견책 처분을 내렸다가, 곧 취소하고 대 스트라토페다르크의 서열로 승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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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부 기록에 따르면, 안드로니코스 3세가 시르얀니스의 아내를 유혹했고, 시르얀니스는 이 사실에 분노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