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보증기금 여자 농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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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
신용보증기금 여자 농구단
창단
1982년
해체
1998년

1. 개요
2. 역사



1. 개요[편집]


신용보증기금에서 운영했던 여자 실업 농구단.


2. 역사[편집]


남자 농구단과 여자 농구단 중 고심하다가 당시 마지막 인기의 불꽃을 피우던 여자 농구단 창단을 결정했다. 직원 중에 농구 선수 출신에 많아서 창단 과정에서 사내 반발[1]은 없었다고 한다. 정부 승인 과정을 거쳐서[2] 1982공에 창단했다.

창단 당시 화제를 불러 일으켰는데 감독이 한국 여자 농구의 전설인 박신자였기 때문이다. 은퇴 후 주한미군 문관과 결혼, 미국으로 건너간 전설이 감독으로 귀환한 것이 화제를 불러 모았다. 그리고 코치인 이옥자, 주희봉도 모두 여자여서 최초로 여성만으로 구성된 코치진을 만들었다. 다만 실제 선수들이 같은 여자라고 남자 감독보다 덜 따랐다던가, 판정에서 불이익을 받은 적이 있었다고.

성적은 창단 초기에는 하위권이었지만 이후 1990년대 들어오면서 다크호스 수준까지는 됐다. 다만, 정상을 넘볼 정도로 강력한 전력을 구축하지는 못했는데 아무래도 공기업이다보니 스카우트 책정에서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997년에서 1998년 사이, 1997년 외환 위기를 이유로 여러 기업이 구단을 해체할 당시 결과적으로 구단을 해체했다. 다만 처음부터 해체할 생각은 아니었다. 금융단 계열 농구단 중에서 가장 먼저 한국여자프로농구 가입을 의결할 정도로 농구단 운영에 대한 의욕도 있었다. 옥은희라는 괜찮은 센터를 보유한 신용보증기금 구단은 해체 드래프트에도 참여해 1순위를 확보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1순위로 당시 191cm의 장신 유망주 센터 정진경을 지명했다. 문제는 정진경이 신용보증기금 행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떠났다는 점이었다. 일설에는 정진경과 당시 갓 창단한 신세계의 비밀 계약설도 있다. 실제로 7년 뒤에 계약을 하기는 한다. 다만 그 시점에서 그런 계약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정진경은 한국여자농구연맹로부터 5년간 자격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하지만 이 일로 김이 샌 신용보증기금은 농구단 운용에 대해서 재검토를 했다. 여기에 재정경제부에서 금융권 구조조정을 고강도로 추진하면서 그에 대한 제스쳐가 필요했고 결국 농구단이 끝내 희생양이 된다. 외환 위기 와중에 해체한 농구단 중에 가장 늦은 1998년 7월 31일에 해체했다. 드래프트 불복 사건 때문에 해체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 사건이 농구단 운용의 의지를 꺾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만일 존속했다면 프로 리그는 처음부터 6구단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여러모로 좀 아쉬웠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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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업 구단은 은퇴 후, 일반 직장인이 되기 때문에 사내에서 TO가 없거나 승진 문제로 반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2] 신용보증기금은 중소기업이나 창업하는 기업에게 보증을 서는 공기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