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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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전기의 문신. 는 차소(次韶). 는 삼괴당(三槐堂). 본관은 고령(高靈).


2. 생애[편집]


신종호(申從濩)는 1456년(세조 2)에 태어났으며, 영의정을 지낸 보한재 신숙주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신주(申澍)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한명회(韓明澮)의 딸이다.

1474년(성종 5) 약관으로 진사시(進士試)에 장원을 하고, 1480년(성종 11) 문과에 다시 장원, 1486년(성종 17)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이렇게 세 번을 연이어 장원을 한 일은 과시(科試) 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성종이 경연까지 베풀었고 세상에서는 삼괴당(三槐堂) 선생이라고 칭하였다.

1481년(성종 12) 천추사(千秋使) 홍귀달(洪貴達)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 그 때 명나라 역관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수료병(水潦病)에 걸려서 돌아오지 못하고 고생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명나라 예부(禮部)에 건의하여 그들을 치료하게 한 뒤, 모두 귀환시켰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뒤 홍문관 수찬(修撰), 부교리(副校理)를 역임하였다.

1485년(성종 16) 명나라에서 승려 원숙(元肅)을 보내 대장경(大藏經)의 뜻풀이를 청하자, 신종호가 강운(强韻)으로 배율장편(排律長篇)을 만들어 바치니 성종이 그 공로로 1급을 특별히 올려 주었고 그 문장은 명나라 조야를 놀라게 했다.

1487년(성종 18)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으로 제수되었고, 여지승람(輿地勝覺)을 정정하여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으로 다시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듬해 그 공으로 왕으로부터 녹피(鹿皮)를 하사받았으며, 왕명으로 요동(遼東)에 가서 한어(漢語)를 습득하고 돌아왔다. 홍문관 직제학에 오르고 11월에는 당시 세도가 임사홍(任士洪)을 4흉의 하나로 탄핵했다.

1489년(성종 20) 동부승지, 예조참의, 좌승지를 거쳐 이듬해 우승지, 도승지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491년(성종 22) 대사헌으로 있을 때 북쪽 오랑캐가 자주 침범하여 이를 토벌하자는 어전회의 중에 신종호는 5가지 어려운 조목을 들어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영의정을 모욕한 죄로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예조참판으로 다시 등용되어 1494년(성종 25)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마침 경기도에 심한 가뭄과 기근(饑饉)이 있어 백성들이 굶주림으로 고생하여 경창미(京倉米)를 모두 풀고 충청도 곡식을 가져다 구휼(救恤)하였다.

이듬해 중앙으로 들어와 예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있으면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6년(연산 2) 병환을 무릅쓰고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호조참판으로 제수되어 돌아오던 중 개성에서 병을 얻어 3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삼괴당집(三槐堂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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