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주 (r2020030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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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숙주1.png
시호
문충공(文忠公)[1]
군호
고령군(高靈君)
이름
신숙주(申淑舟)

범옹(泛翁)

보한재(保閑齋), 희현당(希賢堂)
출생지
전라도 나주군 금안리 오룡동
생몰연도
음력
태종 17년 6월 20일 ~ 성종 6년 6월 21일
양력
1417년 8월 2일 ~ 1475년 7월 23일
1. 소개
2. 촉망받는 신진 관료
3. 정난공신
3.1. 배신의 아이콘
4. 명재상의 일면
5. 인물됨과 일화
6. 대중 매체에서
7. 가족과 후손
8. 영정
9. 그 외
10. 관련 문서


1. 소개


조선 세종 ~ 성종 때의 정치가, 학자, 외교관. 본관은 고령. 자는 범옹(泛翁)이고 아호는 보한재(保閑齋), 희현당(希賢堂)이다.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지만, 훗날 세조의 편에서 계유정난과 단종 퇴위를 적극적으로 도왔고, 때문에 사육신과 이후 사림파 집권 이후 성토의 대상이 됐고, 숙주나물 등 인신 공격의 대상까지 됐다. 그러나 당대에 보기 드문 여러 언어에 능통한 다언어 구사자이었으며, 국조보감, 동국통감의 편찬 참여, 농업 작물기술을 적은 농산축목서를 저술했으며 여진족을 물리쳤고, 일본에 가서는 일본의 지도를 그려오는 성과를 올린 인물이기도 하다.

2. 촉망받는 신진 관료


1417년 6월에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태종의 과거 동기이자 두문동 72현인 신덕린이고 아버지는 신장으로, 7세 때 아버지를 따라 한양에 올라왔다. 20세의 나이에 과거 시험에 급제하여 훗날 45세라는 엄청나게 젊은 나이에 영의정까지 지냈다. 통상적으로 조선의 관료는 1품 승진에 3년이 걸렸다. 과거 합격도 합격이고 순전히 날짜만 채워서 종9품에서 정1품까지 오르는데 걸리는 시간은 많으면 51년이다.[2]
책을 읽으려고 집현전 숙직을 도맡아서 했다는 일화가 있을만큼 지독한 독서광이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하루는 집현전 학자가 늦게까지 책을 읽다 잠들었길래 세종이 자신의 옷을 덮어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신숙주라고 한다.[3] 이에 흡족해진 세종은 이후 훈민정음 창제에도 신숙주를 투입한다.[4] 세종은 신숙주를 높이 평가해서 아들 문종에게 "신숙주는 크게 쓸 인물이다"라며 자주 칭찬했다고 한다.
일본에 서장관으로 갔을때 몸이 아팠다가 나은 직후라 세종이 걱정했는데 신숙주는 "걱정하지 마십시오"라 하고는 일본에 갔다. 일본에 갔을 때는 일본인들이 붓과 묵을 가져와서 글씨 좀 써달라고 요청하자 그 자리에서 바로 써 주어서 주위 사람들이 "매우 비범하다"고 평가했다.
여기서 돌아오는 길에 쓰시마 섬에 들려 쓰시마 도주와 담판을 했는데, 쓰시마 도주는 "조선에 오는 무역선인 세견선의 수를 정하지 말자"고 억지를 부렸다. 그러자 신숙주가 "세견선 수가 정해지면 확실히 이익이 당신에게 돌아가겠지만, 정해지지 않으면 당신 밑에 애들이 지멋대로 자기들 이익만 챙길 것이란 생각은 안 해봤나?"는 말로 설득하여 조선에 오는 세견선의 수를 확실히 약정한 계해약조를 맺고 돌아왔다. 이 때의 경험은 뒷날 성종 때 대일 관계 등에 관한 주요 자료로 손꼽히는 <해동제국기>를 완성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 일본에서 돌아오는 배에선 풍랑이 거셌다. 그 때 배에 탄 사람 중엔 왜구가 납치해 갔던 백성들이 많았는데, 그 중 임신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왜인의 아이였다. 선원들은 "임신한 여인이 배에 탔으므로 바다에 내던져 용왕의 노여움을 풀어야 한다"고 했으나, 신숙주는 "남을 죽이고 삶을 구해서야 되겠냐"며 이를 말렸고, 오래지 않아 풍랑은 잠잠해졌다 한다. 이건 야사 이야기가 아니라 실록의 신숙주 졸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집현전에서 같이 연구하던 성삼문과는 꽤나 친하게 지냈으며, 안평대군과도 두루 친했는데......[5]

3. 정난공신


단종이 즉위하여 수양대군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함께 가게 되면서 완전히 수양 대군과 가까워진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수양 대군은 단종 즉위 사신으로 명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이때 신숙주도 동행시키려 했다. 신숙주는 여기에 따르면서 했던 말이 "장부가 어찌 아녀자의 품에서 편히 죽기를 바라겠습니까?"
여담이지만 수양대군과 신숙주는 1417년생 동갑내기다. 세조는 신숙주가 정승이 된 후에도 집현전 학사 시절의 호칭인 '신 수찬'이나 명에 사신으로 갔을 때 서장관으로 따라나섰을 때의 호칭인 '신 서장'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다만 계유정난 전후에 구체적으로 뭘 했는지는 애매한 점이 많아 알 수가 없다. 계유정난 때는 신숙주의 위치는 박팽년, 성삼문과 함께 언급할 정도로 큰 두각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계유정난 이후로는 완전히 수양대군의 오른팔로 활동하면서 단종의 양위를 주도하고, 수양 대군이 세조로 즉위하고 자신을 도운 좌익 공신 중 1등 공신으로 올라서 있다. 이런 행적 때문에 사육신들도 단종 복위 운동 중에 한명회, 권람, 윤사로와 더불어 신숙주를 처단 1순위로 올려놓았다. 아예 성삼문은 신숙주만 따로 언급하면서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그러나 죽어야 마땅하다"라고 언급한다. (세조 실록 2년 6월 2일) 변절자로 낙인찍힌 신숙주를 윤영손이 처단하려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이 제지하고 거사를 연기하기로 했다.
1456년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자, 정승들과 함께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 단종을 서인(庶人)으로 만들 것을 건의했고, 이어서 단종과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후 실록의 신숙주에 대한 평가를 보면 당대나 적어도 조선 중기 이전까지는 평가가 좋은 편이다. 김종직도 신숙주를 높이 평가해서 신숙주의 문집인 보한재집에 서문을 쓰기도 했다.[6] 이는 15세기까지의 사림들은 신숙주를 그리 나쁘게만 보지 않았다는 증거로 쓰이기도 한다. 김종직이 대놓고 성삼문을 충신이라고 했다는 언급이 있는데, 공식적으로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만일 진짜로 그런 말을 했다면 성종의 얼굴이 흙빛이 되는게 아니라 김종직의 눈에 흙이 덮혔을 것이다.
이후 사림이 득세하면서 사육신이 복권되는 과정에서 신숙주의 평가는 점점 낮아져서, 헌종(조선)은 "신숙주(申叔舟)는 어찌하여 육신(六臣)이 한 일을 하지 않았는가?" 란 말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건 헌종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세도정치기의 왕이라서 측근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에 가깝다. 사육신 문서에도 있지만 진짜 신숙주가 뭘 했는지, 사육신이 뭘 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3.1. 배신의 아이콘


역사적으로도 이 전향이 충격적이었는지 숙주나물에 이름이 붙기까지 했고 오늘날에도 변절자의 대명사처럼 회자된다. 세조에게 협력하고 집현전 동료인 성삼문의 처형을 주장하며 부귀영화를 누린 정인지나 나머지 집현전 선배 최항, 정창손처럼 세조의 정변을 도운 집현전 선배들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인 신숙주보다는 더욱 명확한 배신자의 전형을 보여주지만 세간의 평가는 신숙주에게 좀더 가혹하다. 그만큼 신숙주의 능력과 성품에 걸었던 기대와 믿음이 컸다는 반증일지도.정인지, 최항, 정창손은 다 선배들로 세종 말엽에 이미 고위직 관료들이였고, 대체로 그보다 낮은 관료들이였던 신숙주의 동기급들인 사육신들은 단종 복위하다가 사망했으나, 신숙주만 수양대군편에 붙었으니 비판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사림들은 그래도 국왕인 세조를 비판할 수는 없으니 대신 신숙주를 비판하는 소설들을 만들어냈고, 민가에서도 변절자 신숙주에 대한 수많은 설화들이 만들어졌다. 다만 이 설화가 실제로 조선 시대에 만들어졌는지는 불명. 진짜 민간 설화 중에서 조선 시대 기원이 밝혀진 것은 없다. 사림들이 단종을 동정했다는 증거만 많을 뿐[7].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자를 까기 위해 역사 속의 변절자 캐릭터 신숙주를 가져와서 비판하는 소설 등을 써냈다. 오늘날 알려진 신숙주의 변절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남효온의 '육신전'이나 이광수단종애사에서 알려진 설화들에 기초한 것들이 많다.[8]
  • 성삼문과 함께 "세손(단종)을 잘 부탁한다"고 한 세종대왕의 당부를 받았다. - 성삼문 문서에도 있지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다. 고명 절차는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정식 절차이고, 당하관이었던 성삼문과 신숙주는 고명 운운하기에는 직급이 너무 낮으며[9], 왕이 죽으면서 세자인 문종이 아니라 손자를 부탁하는 것은 지극히 불길한 행동이다. [10]
  • 쉬기 쉬운 녹두나물을 신숙주의 지조없음을 본따 이름을 붙여 숙주나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 숙주나물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녹두나물이 숙주나물이라 불린 기록은 적어도 일제강점기 이후다.맹꽁이 서당 보물섬 연재분에서도 이렇게 나왔던 것으로 보아 의외로 오랫동안 이렇게 알려진듯.
  • 사육신이 꾸미던 음모가 발각되어 국문을 받고 있다는게 알려졌을 때, 집에 돌아온 신숙주에게 아내가 사육신과 행동을 같이 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고 목을 매어 자결함. - 실록이나(세조 2년 1월 23일) 족보에 보면 신숙주의 아내는 사육신 사건이 있기 몇달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박종화의 단편 소설 <목 매이는 여인>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광수(소설가)단종애사에 채용되어 정설처럼 알려져 있다.
  • 신숙주의 지조없음을 비난하기 위해 사육신을 국문할 때 세조 옆에 서있다가 성삼문이 "이 변절자야!"라고 일갈하자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해서 세조가 옆으로 숨게 해주었다, 후일 생육신 김시습의 "이놈! 선왕의 신신당부를 어긴 이 못난 놈!"이라는 호통에도 아무 대꾸도 못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피했다는 일화도 있다 - 남효온의 소설 육신전의 기록.
  • 신숙주가 미모에 끌려 단종정순왕후 송씨노비로 달라고 청했다 - 김택영의 <한사경>에 나오는 서술로 이것을 이광수가 소설 단종애사에 실으면서 유명해진 이야기다. <한사경(韓史綮)>은 분명 역사책인 것은 사실이지만, 김택영[11]대한제국 시대의 인물로 이 책은 저자 본인도 역사서라고 하기는 애매하다고 '사史'로 끝내는 대신에 '경'을 더한 책이다. 무엇보다도 저자의 의도가 굉장히 강하게 드러나는데[12] 이중 하나가 세조의 왕위 찬탈이었기 때문에 저자의 의도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도 단종조차 죽였던 세조가 정순왕후 송씨를 노비로 만드려는 시도조차 하지않은걸 보면 오류가 있는 이야기다. 그래서 실제 있었던 사실로 보기 어렵다.
  • 신숙주의 남동생 신말주(1429년 ~ 1503년)는 형과는 달리 단종에 대하여 충성을 내보이며 낙향했다. - 신말주는 성종 때까지 벼슬을 하며 대사간 같은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 1990년에 KBS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파천무에서는 이 신말주가 세조의 즉위를 반대하여 상소를 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런 연유로 세조가 형은 공신, 동생은 역신이냐면서 불쾌해하나 신숙주를 봐서 처벌은 불문에 붙힌다.

4. 명재상의 일면


이렇듯 후대에 지조 면에서 성삼문과 비교되었지만[13] 업적은 뛰어나다. 능력과 업적만 놓고보면 정도전, 황희와 더불어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명재상의 반열에 넣어도 손색이 없다. 조선의 많은 재상들 중에서 신숙주만큼 다재다능했던 인물도 드물다.
집현전 학사들 중에서도 언어학에 천재적이었는데 성삼문과 함께 한자음 정리에 관한 질의를 위해 명나라의 언어학자 황찬을 여러번 찾아가기도 했으며[14] 중국어, 일본어, 여진어, 몽골어, 위구르어 등 동아시아 언어에 모두 능통해 걸어 다니는 인간 번역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나라들의 문화에 대한 글도 많이 남겨 문화사 연구에 업적을 남겼다.
또한 외교적 센스가 탁월해서 앞에서 언급했듯 쓰시마 섬에 갔을 때에는 계해약조를 맺기도 했고 대여진 외교도 담당하여 여진족과 반목이 있을 때 조선의 대표로 이를 조정하고 여진 추장들을 회합하는 역할도 했다. 이 풍부한 국제적 경험 탓인지 조선 역사상 외교를 관장하는 예조 판서 직을 제일 자주 맡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만큼 관련 분야에서는 당대 조선 최고의 학자로 평가받는다.

(전략)화폐가 행용되게 하는 방법은 경외(京外: 도성 외 지역)에서 시포(市鋪)를 열어 백성들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바꾸게 하는 것밖에 없는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바꾸자면 물건을 날라 가는 거리가 멀 수도 있으므로 반드시 돈의 유통(流通)에 힘입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으니, 이것이 화폐는 반드시 시포가 있어야 통용된다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시포를 설치하는 것은 인심의 소원에 의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후략)

-<성종실록>, 성종 4년 2월 11일, 조세제도와 화폐 유통 방법에 관한 원상들의 회의 중 신숙주의 발언 중에서

그리고 신숙주는 당대에 흔치 않게 민간 상업의 진흥을 지지한 인물이기도 하다. 성종실록을 보면 화폐의 유통과 이를 위한 시장의 발전에 대해 길게 논한 장면이 나온다. 해당 기사는 성종 실록 성종 4년(1473년) 2월 11일 기사 참고. 요약하면 '화폐 유통을 위해서는 큰 도시나 백성의 유동성이 많은 지방에 시장을 여는 것을 허용해서 백성들의 상업활동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강제로 시키는 것보다 민심의 동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덧붙이고 있다.[15] 이게 별것 아닌 이야기인것 같지만 신숙주의 이 의견은 조선에서 화폐 유통이 되지 않았던 원인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으며,[16] 농업이 근본이었던 조선 사회에서 민간상업의 진흥을 지지했다는 것은 사회 구조 자체를 보는 눈이 달랐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제법 시대를 앞서간 면모도 있었다는 소리다. 다만 신숙주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 친구 성삼문이나 후대의 조광조 같은 인물처럼 모든 것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다.
파일:attachment/diwjsqntleh.jpg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의 3번째 그림인 야전부시도(夜戰賦詩圖). 신숙주가 여진족을 정벌할 때, 여진족이 야습하자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시를 읊었다는 일화를 묘사한 그림이다. 영채 안쪽에 녹색 옷을 입고 여유롭게 누워 있는 사람이 신숙주다. 이 때 신숙주가 읊었다는 시는 다음과 같다.

虜中霜落塞垣寒 오랑캐 땅에 서리 내려 변방이 차가울사

鐵騎縱橫百里間 철기가 백리 사이를 마음대로 달리누나

夜戰未休天欲曉 밤 싸움 그치지 않았는데 날 밝으려 하고

臥看星斗正闌干 누워 보니 북두성이 비끼네

또한 군사 전략가로서의 능력도 갖추고 있어서 1460년에 8천의 군사를 이끌고 함경도 일대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귀환했다. 이 원정이 있었던 1460년이 간지로는 경진년이라 '경진북정(庚辰北征)'이라고 부른다. 이 때 적의 야습을 받자 본진에 태연히 누워서 쳐들어온 적을 걱정하는 시를 지었다는 일화도 남아있다. 이때 신숙주 부대는 추장급 여진족 90여명과 일반인 여진족 430여명을 붙잡거나 살해했으며 9백여채의 집을 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전과 규모로 보면 세종 때 최윤덕파저강 정벌에 버금가는 큰 전과였다. 사실 파저강 정벌보다 더 큰 승리이기도 했는데 파저강 정벌 때는 군사 2만 5천명을 데리고 가서 170여명을 죽였지만 이때는 1/4의 병력을 데리고 가고도 두배가 훨씬 넘는 성과를 올렸다. 성공적인 북정 후에는 북방 방비 강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한 이 때의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북정 기록인 <북정록>과 세조가 지은 병법서인 <병장설> 편찬에도 많은 역할을 했다. 거기에 함선에 대한 안목도 뛰어나서 성종 실록에는 조선 함선과 일본 함선의 차이를 일목요연하게 논하고 있는 장면도 있을 정도다. 자세한 내용은 판옥선 참고.
이러한 여러가지 공로로 세조는 물론 예종 대에는 남이의 옥사를 해결했다는 이유로 공신에 또 올랐고[17], 예종이 급사하자 가장 먼저 나서서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와 교섭, 성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18] 세조는 그를 당태종의 명신인 '위징'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런데 위징은 당 태종에게도 거침없는 간언을 잘 했지만, 신숙주는 이런 모습을 보이지 못했으니 예스맨에 가까웠다고 할까. 성종 실록의 사관은 신숙주의 이런 점을 단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사실 당 태종의 신하들에 비유하면 신숙주는 위징보다는 방현령과 비슷한 점이 많다.[19]
어쨌든 신숙주의 업적을 보면 행정, 군사, 외교, 정치적 감각까지 모든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한 당대의 엄친아이다. 하지만 변절자라는 편견 때문에 이런 엄친아스런 면모는 대중에 잘 알려진 편이 아니다.
1475년에 59세로 생을 마감할 때 유언으로 "저승 가서 읽을 책 몇 권을 같이 관에 넣어 달라"고 했다. 역시 자타공인의 책벌레다운 유언이다. 마지막에 "인생이란 마침내 이에 그치는가."라고 탄식했다고. 제법 적절한 때에 죽음을 맞아 한명회처럼 두 번 죽는 비운을 안 당했다는 점에서는 나름대로 행운아였다. 세조의 공신 그룹 중에서 성종 7년(1476)에 죽은 홍윤성과 함께 정말로 퇴장 타이밍이 적절했는데, 같은 원상이었던 성종 1년(1470)에 죽은 구치관처럼 막 좋을 때에 죽은 것도 아니고, 성종 18년(1487)에 죽은 한명회처럼 폐비 윤씨가 죽는 것도 보지 않은게 행운이었다. 그가 죽은 성종 6년은 성종이 친정하기 딱 1년 전이었다. 특히 신숙주 사후 3년 뒤(1478)에 죽은 정인지마저도 갑자사화이런 일을 당한 걸 생각하면...
또한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에 의하면 성종에게 죽기 직전에 "원컨대 일본과의 화평을 잃지 마소서."라고 진언했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징비록의 바로 첫머리에서 볼 수 있는 기록이다. 이는 류성룡이 "일본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했어야 한다"는 뜻으로 삽입한 기록이지만 당시 신숙주 정도로 일본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던 일본 전문가가 드물었다는 이야기다.
징비록이 일본에도 널리 퍼진 이유인지 이 말은 일본에도 잘 알려져서, 뒷날 에도 막부의 유학자이자 중신이었던 아라이 하쿠세키가 1711년 조선 통신사 정사로 파견된 조태억에게 "신숙주 공의 그 말씀은 참으로 대신으로서 나라를 걱정한 말씀이라 하겠소"라고 발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아무튼 신숙주를 행적으로 비판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그의 능력과 업적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 입장도 많으며 오히려 필요 이상으로 까인 탓인지 재평가가 상당히 활발한 인물 가운데 하나다.

5. 인물됨과 일화


변절자라는 평가에 비해 의외로 호방하고 태평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실록에서도 위의 수양대군의 회유를 받아들이면서 했던 발언 등, 신숙주의 성격에 대해 '활달했고 까다롭거나 자질구레한 것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어떤 일을 결정할 때는 거침이 없었던 인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위쪽 항목에도 나오지만, 소문난 수재이자 책벌레였다. 세종 시절에는 일부러 책을 읽기 위해 남들이 기피하는 궁궐 숙직을 도맡아 했다고 하며, 이 때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그만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고 말았는데 세종이 이걸 보고 본인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서 덮어 주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 현대인에겐 그 의미가 별로 실감이 안 날수도 있겠지만, 왕권이 서슬퍼렇던 옛날에는 대단한 사건이다. 청와대에서 당직을 서던 일개 행정관이 졸았는데, 지나가던 대통령이 자기 외투를 벗어서 덮어주고 갔다고 비유해도 한참 모자란다.
을 매우 좋아하는 술고래였다. 술버릇도 특이해서 세종 시절 곤룡포 사건이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아무리 술에 취해도 자고 일어나면 꼭 책을 읽었다고 한다.으어어 전하, 안 졸았사옵니다!! 또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있다. 세조가 술기운에 신숙주의 팔을 꺾었고, 세조가 똑같이 해 보라 하여 세조의 팔을 세게 꺾어 노여움을 샀다가 한명회의 도움으로 이를 모면한 야사도 있다. 이 이야기는 사랑의 학교에서 '벌주와 팔씨름'으로 각색되어 소개되었다. (한명회 문서 참고.)
사실 신숙주 집안은 주벽이 참 심한 집안이었다. 아버지 신장도 당대 제일의 술꾼이어서, 죽었을 때 당대의 대신 허조가 "이 훌륭한 사람을 술이 데려갔구나"라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손자로써 중종 때 정승을 지낸 신용개도 술꾼으로 유명했다.
신숙주의 저서인 <해동제국기>는 무로마치 막부일본에 대한 자세한 서술과 일본어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데 있는데 여기에서도 누가 당대 제일의 주당 아니랄까봐 너 술 먹었냐?, 이 술 맛있다 등 '술'과 관련된 기록이나 일본어 표현들을 꽤 많이 옮겨놓기도 했다[20]. 그런데 임진왜란 때에 이게 명에 들어가면서 그 내용이 문제시되어 '너네 우리 불러서 전쟁하면서 뒤로는 일본하고 손잡은 거지?' 하는 식의 고발을 받은 적이 있다(...). <노부나가의 야망 : 천하창세>에서 아이템으로 등장한 적도 있다. 다만 명나라 아이템으로 등장했다
신숙주의 호인 '보한재(保閑齋)'는 한명회의 호인 '압구정'과 비슷하게 별장 이름을 따서 지은 호라고 한다. 이 보한재라는 별장 역시 한명회의 별장 압구정처럼 한강변에 지은 정자라고 한다. 이것은 신숙주가 1452년에 친분이 있던 명 학자 예겸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나는데 '동쪽으로는 노량진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양화진이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별장 이름을 보한(保閑 : 한가로움을 보전한다)이라고 지은 건 "명예를 멀리하고 한가로이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겠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라고 예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히고 있다. 별장 이름도 한명회가 '압구정'이라고 이름한 의미와 비슷한데, 사실은 한명회의 압구정보다 신숙주의 보한재가 더 먼저 지어졌다.
한번은 일본에 갔다가 풍랑을 만났는데, 풍랑을 만나 선원들이 당황했던 데 반해 신숙주는 "지금 일본도 갔다 왔는데, 이 바람 타고 중국까지 가는 것도 괜찮지 뭐"라며 태연히 앉아 있었다는 일화도 있고, 이 때 선원들이 배에 타고 있던 임산부[21]를 바다에 제물로 바쳐 풍랑을 가라앉히려 하자 "남을 죽이고 삶을 구하는 것은 할 일이 아니다!"라며 이를 막아서 죽을 위기에 처한 그 여인을 살려준 이야기도 있다. 다행히 풍랑도 가라앉았다고 한다.
대동기문속 한 전설에 의하면 신숙주에게는 '청의 동자'라는 수호령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청의 동자는 신숙주가 과거를 보던 젊은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신숙주를 수호했는데, 신숙주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한다든가 신변을 보호해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귀신인데도 보통 사람처럼 밥을 먹었는데, 식사를 하면 먹는 소리는 나도 음식은 전혀 줄지 않았다고 한다.
뒷날 신숙주가 죽을 때 수명이 다해서 따라 소멸했는데 신숙주가 유언으로 "내가 죽으면 내 제사상에 청의 동자의 상까지 차리도록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숙주의 무덤 옆에 청의 동자의 자그마한 묘를 하나 더 만들었다고 한다. 다만 이 동자의 모습은 신숙주만 볼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왠지 물 건너의 모 바둑 귀신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어쩌면 스탠드 사용자였을지도.
야사 해동야언에 의하면 신숙주가 우의정에서 영의정이 되고 구치관이 새로 우의정이 되자 세조가 둘을 불러서 술 자리를 가졌다. 세조가 "오늘 두 분 정승 분들께 물어볼 말이 있는데, 잘 대답하면 좋고 못 대답하면 벌주를 내리겠소"이라고 운을 떼고 "신 정승"이라고 불렀다. 신숙주가 대답하자 "나는 신(新 : 새 신) 정승을 불렀지 신숙주 대감을 부른 것이 아니오"라며 신숙주에게 벌주를 내렸고, 다음에는 "구 정승"을 불렀는데 당연히 구치관이 대답하자 이번에 세조는 "나는 구(舊 : 옛 구) 정승을 불렀지 구치관 대감을 부른 게 아니오"이라며 구치관에게 벌주를 메겼다. 다시 한번 "신 정승"을 부르자 이번에는 구치관이 대답했는데 세조 왈, "이번에 나는 성으로 불렀거든?"이라며 구치관에게 벌주를 주었다.세조가 "구 정승"이라 부르자 신숙주와 구치관 둘 다 대답을 안 했는데 세조는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대답을 않다니 불경하다! 둘 다 벌주를 마셔라!" 라고 하며 두 정승 모두에게 술을 먹여버렸다. 간단히 말해 신숙주, 구치관의 성과 신(新), 구(舊)가 동음이의어인 것을 이용한 세조의 말장난이었다. 군신 간의 훈훈한 장면이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세조가 유치해보이기도 하는 일화다. 심지어 판본 중에는 이것과 위의 저 팔 꺾기 일화를 이어붙여서, 이것 때문에 열이 받은 신숙주가 술에 취한 척 하고 세조의 팔을 꺾어버렸다는 스토리가 있다. 나중에 그가 밤에도 책을 읽는다는 걸 안 한명회가 책을 읽지 못하도록 촛대를 치워서 신숙주는 그냥 잤고 그걸 본 세조가 의심을 풀어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6. 대중 매체에서


사극에서는 주로 나약한(혹은 줏대 없는) 지식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변절자'라는 평가는 둘째치고, 역사적으로 보면 행정, 외교, 군사와 정치 감각도 뛰어났던 만능 관료였지만 정치 모략이 주가 되는 사극에서는 상대적으로 한명회 때문에 많이 묻히는 분위기다. 더욱이 이 시대를 다룬 사극들이 계유정난이나 성종 시대의 궁중 암투에 비중을 두고 있는 나머지 세조의 치세를 상세히 묘사하지 않아서 신숙주의 활약상이 많이 나올 기회가 없었다. 안습. 그나마 신숙주의 활약상이 잘 나온 사극은 KBS 2TV한명회다. 여기서는 세조 치세가 빠짐없이 묘사되어서 신숙주가 여진 정벌에서 활약하는 것도 묘사하고 있다.
왕과 비에서는 이정길이 연기했다. 이 작품에서는 형식적이나마 개념인의 모습을 보인다.
대왕 세종에서는 풋풋한 청년 관료로 등장했다. 외국어에 두루 능통한 능력자라 문자 창제에 윤회가 끌어들이려 하나, 아버지 신장의 죽음이나 처조부 윤회가 병든 것이 악덕 고용주 세종 때문이라 여기고 이에 대한 반감에 거부한다. 그러나 황희의 중재로 결국 합류, 훈민정음 창제를 돕는다. 흥미로운 것은 작중 현덕왕후가 죽은 뒤 문종이 낙심하고 있을 때 성삼문, 박팽년을 비롯한 다른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문종을 위로하며 "저하, 기억하십시오. 저하의 뒤에도, 또한 아기씨의 뒤에도, 저희가 있을 것입니다." 라며 간지나게 문종과 그 아들인 단종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데, 훗날 수양대군의 반정을 앞서 도운 변절자 중의 변절자가 신숙주였음을 감안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대사다.
공주의 남자에서는 여인천하윤임, 불멸의 이순신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맡았던 배우 이효정이 연기했다. 주연급 중 하나인 신면의 아버지로서 기존의 변절자 이미지가 아닌 능력과 야심을 겸비한 인물로 그려진다. 수양대군 편을 든 것도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집현전을 박차고 나와 조선을 경영하는 자리에 오르기 위함이었다. 아들에게 "나는 이 나라를 훌륭하게 경영할 자신이 있다. 나는 수양 대군을 성군으로 만들 것이다."라고 하는 장면은 나름대로 멋지다. 이제까지의 사극 속 신숙주처럼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에서 탈피하여 권력지향적이고 냉정한 기회주의자로 묘사하다. 다만 수양대군에게 그런 신숙주의 냉정함과 야심은 좋은 도구일 뿐이다. ("대나무는 곧지만 속이 비어 있다.") 신숙주의 후손들이 단체로 공주의 남자에 묘사된 신숙주의 모습에 대해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으나 패소했다. 링크
영화 관상에서 주인공인 관상가 김내경이 문종의 명령을 받아 주변 대신들의 관상을 평가할때 등장했는데, 이때 신숙주에게 내린 평가는 "머리가 좋아서 관직에 오르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듯 하고, 지금으로서는 권력보다는 아녀자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이다(...) "장부가 어찌 아녀자의 품에서 편히 죽기를 바라겠습니까?"라고 했다는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맨 위의 초상화를 참고하긴 했는데(본문에도 신숙주가 초상화와 비슷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컷이 있다.) 현실적이고 냉철한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상당히 쿨시크 냉정해 보이는 인상으로 묘사되었다.
단종애사 에서는 천하의 개쌍놈으로 등장한다. 세종의 고명을 받고도 단종을 배신하고 수양 편에 붙은 것만으로도 죽일 놈인데, 안평 대군을 죽이는 것도, 단종을 귀양 보내는 것도, 마지막에 사약을 보내는 것까지 죄다 신숙주가 앞장서서 실행하는 것으로 나온다. 작중 사육신도 다른 놈들보다 신숙주를 제일 먼저 쳐죽여야 한다고 분개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 그런데 단종애사의 다른 대목은 대부분 근거가 없는데, 신숙주를 먼저 죽여야 한다는 것은 성삼문의 실제 증언이다. 가까웠다가 멀어지면 더 싫어지는 듯.

7. 가족과 후손


공주의 남자에 등장하는 신면[22]은 실제로 신숙주의 차남이다. 신숙주가 가장 아낀 아들이었지만 이시애의 난함경도 관찰사로 함경도에 파견되었는데 이시애군에 악착같이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실록을 보면 "승지가 된지 5년이 되었어도 실수가 없었으며 임금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자못 자상하고 명확하였다"는 평을 받는 것을 보아 제법 촉망받는 인재였던 모양이다. 이 때 신숙주는 세조의 의심 겸 견제 조치로 인해 옥에 갇혀 있어서 아들의 죽음을 옥중에서 들어야 했다. 위에서 언급된 신용개는 바로 신면의 아들이다.
신면 외에 신숙주는 아들이 많았는데 장남 신주, 삼남 신찬, 4남 신정, 5남 신준, 6남 신부, 7남 신필이 있었다. 이 중 장남인 신주는 일찍 사망했고 4남인 신정이 특기할만한데 신정은 그야말로 호부견자였다. 성종옥새위조하여 남의 재산을 탈취했다는 혐의를 받고 사약을 받아 죽었다. 바로 위의 형 신찬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하는가 하면, 큰형 신주의 아들인 신종호의 재주가 뛰어나다는 평판이 돌자 이를 시기해서 조카를 원수처럼 미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숙주 본인 역시 신정을 두고 "우리 집안 말아먹을 놈은 바로 저놈이다"라고 고개를 내저었다고 하며 실록에서 찬평을 받고 있는 신면에 비해 신정은 실록에서도 막장이라고 인증하고 있을 정도다 그래도 아버지에겐 효자였다는 기록도 있다. 신정의 사사에 대해서는 신정 본인이 막장이기도 했지만 훈구파 영수의 자제이기도 했기 때문에 성종 나름대로의 훈구파 견제조치였다는 해석도 있다.
장남인 신주의 아내가 한명회의 딸로, 즉 신숙주와 한명회는 사돈이다.
고전에서 자주 회자되는 <기재기이>를 저술한 신광한은 신숙주의 손자다.
폐비 윤씨의 외당숙이며, 신윤복도 이 사람의 후손이다.
독립운동가신규식 선생과 민족 사학자로 유명한 신채호 선생이 신숙주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선대는 변절의 아이콘으로, 후대는 지조와 절개의 아이콘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그래도 나라는 안 팔아 먹었다.

8. 영정


파일:chalogo2.png 대한민국의 보물
612호

613호

614호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
신숙주 초상
사천 흥사리 매향비
파일:신숙주2.png
申叔舟 肖像
신숙주 초상화. 1977년 11월 15일 보물 제 613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 관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 중 하나로 꼽힌다. 야사 용재총화에 의하면 신숙주가 젊은 시절에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당시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홍경손이 함께 공부하던 동료들의 이름을 넣어서 "글씨는 누구처럼, 활쏘기는 누구처럼" 이런 식으로 나가는 시를 한 수 지었는데, 이 시를 보면 "눈매는 신숙주처럼 할 것이며"라는 구절이 있다. 초상화를 보면 눈매가 좀 특이하게 묘사된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사람들에게는 신숙주의 눈매가 꽤 비범했던 것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티벳여우

9. 그 외


경기도 의정부시에 그의 묘가 있는데, 2006년에 이런 일#을 당하기도 했다. 물론 이 표지판은 제대로 세워 놓았다. 참고로 안내판이 있는 저 지점에서 신숙주 묘를 찾아가려면 2.2km이라는 거리가 말해주듯이 한참 들어가야 한다. 신숙주 묘역은 영의정까지 지냈던 인물답게 상당히 넓고 봉분 크기도 큰 편이다. 부인 윤씨와 나란히 묻혀 있으며 신숙주 부부의 묘역 위편에 일찍 죽은 장남 신주의 묘가 있다. 묘역 주변에 신숙주의 후손들이 살고 있어서 묘역 관리가 잘 되고 있는 편이다.

10. 관련 문서



[1] 본래 봉상시에서는 문성, 성헌, 문렬을 추천했으나 이조 판서 정효상이 이를 무시하고 문충을 추천했다.[2] 다만 장원 급제를 했다면 33년으로 확 준다. 장원 급제자는 종6품에 제수되기 때문이다. 사실 종9품에 제수되는것도 과거 급제자 33인 중 최하위 등급을 받은 이들일 뿐 나머지는 등수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종9품부터 시작하진 않는다. 여기다가 조선시대 관리가 되는 법이 과거만 있는 것이아니라서 아비가 고위관직자라면 하급관리로 취직할 수 있었다. 다만 과거급제를 하지 못한다면 청요직에 갈 수 없었고, 당상관이 되는 길도 매우 어려웠다.(3년에 한 번씩보는 정규시험 외에 특별한 경사가 있을 때마다 과거를 열어서 33명씩을 선발하였는데, 이 안에 들지 못한 사람이 왕의 선택을 받아서 당상관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선택을 받아도 대간들의 비판을 받아서 철회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하급관리로 먼저 관리생활을 시작하고, 틈틈히 과거를 준비해서 시험보는 경우가 여럿 있었다. 이렇게 급제하면 하급관리로서의 경력도 인정받아서 곧바로 종6품 이상으로 승진이 가능하였다.(조선은 정3품 당하관까지 일정 근무 일수를 채우고, 근무평가에 따라서 품계가 승진하는 방식으로 체제가 조직되어 있었다.)[3] 그말인즉슨, 대왕은 더 늦게까지 안 자고 있었다는 소리다. 실제로 세종은 신숙주가 있는 걸 알고, 약간은 "누가 이기나 해보자!" 하는 심정으로 일부러 남아 있었다는 말도 있다.[4] 창제 작업에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다. 여러 이유로 중국에서 사신으로 갈 때 세종이 부탁한 자료를 가져오는 것이 전부였다. 훈민정음은 세종과 가족이 비밀리에 만든 프로젝트이고, 신하들은 아무도 몰랐었다. 쉽게 말해 훈민정음은 세종과 그 가족이 만든 문자였다. 자세한 내용은 세종훈민정음 문서 참조.[5] 단적으로 안평대군이 꾼 꿈을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에는 신숙주의 찬이 붙어 있다.[6] 서문을 써줬다는건 곧 "나는 이 사람이 쓴 이거 좋게 평가함"(사실상 이 사람의 학문적 성취가 좋다고 평가하는것) 이라고 하는것이다.[7] 소위 '쫓겨난 왕자'에 대한 동정은 이 동정론이 어떻게 형성되었느냐를 떠나서 복잡하다. 심지어 전두환백담사에 갔을 때도 불쌍하다는 여론이 돌았던 것이 현실이라....[8] 그런데 단종애사는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을 쓴 다음에 발표한 소설이라서, 친일파 비판 그런거 없이 그냥 재미있으라고 쓴 것일 수도 있다. 단종애사와 역시 이광수가 쓴 소설 세조대왕만 놓고 비교하면 친일을 하면서 바뀐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전에 민족개존론이 들어가면 해석이 애매해지기 때문이다. 덤으로 같은 친일파인 김동인은 세조를 영웅으로 묘사하는 대수양을 썼다.[9] 정상적인 국가의 고명절차이기 때문에 고명은 최고위직을 대상으로 한다. 세종의 고명을 받은 대신이 모두 당시 기준으로 정승이나 정승 후보군인 찬성인 것이 이 때문. 또한 정승이나 찬성이 아니라면 고명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참찬이나 판서 뿐이다.[10] 애초에 문종은 단명했기 때문에 병약하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과로와 병 때문에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일뿐 체격도 크고 건장한 사내였다. 세종 본인도 당뇨와 격무에 시달리면서 당시 기준으론 살만큼 충분히 살았는데, 병치레를 조금 할지언정 아직 젊은 아들이 금방 죽을 거라고 생각할 리가 없다. 게다가 문종은 즉위 전인 세자 시절부터 7년 이상을 국정을 총괄했던, 사실상 이미 군주였다. 또한 문종은 적장자로서 정통성에서 흠잡을 데가 없었으며, 그 아들인 단종은 출생 당시부터 왕의 세손으로서 완벽한 정통성을 갖고 있었다. 즉, 세종이 죽을 당시 그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 한창때고 능력도 뛰어난 적장자가 차기 왕으로 오를 예정이고, 그 뒤에는 마찬가지로 적장자인 손주가 왕에 오를 예정이라 정통성에서 그 누구도 흠을 잡을 수 없고, 나라도 잘 굴러가고 있는 시점이라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의례적으로 뒷일을 부탁하는 고명 절차를 밟은 것은 실록에 남아있는 사실이나, 멀쩡히 잘 살아있는 아들을 내버려두고 신하들에게 손주를 부탁한다고 했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아무리 뛰어난 신하라도, 단종에게 있어 태종이 탄탄하게 다져준 왕권을 누리고 있는 아버지 문종보다 든든한 보호자가 있을까?[11] 김택영의 역사관이나 이전 역사서에서 보이는 한계 같은 것은 일단 넘어가자. 다만 일부 김택영 관련 서적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박은식, 신채호와 함께 구한 말 3대 역사가' 운운은 완벽한 과장이다. 이 사람 책에서는 일본의 근대 역사서를 생각없이 번역한 바람에 우리 나라 역사를 쓰면서 임나일본부를 긍정한 부분까지 존재한다.[12] 당시 중국에 망명 중이었던 김택영은 심지어 이성계조선을 세운 것을 고려에 대한 찬탈이라고 표현했다. 21세기에서 보는 제3자적 시각에서 보면 틀린 말이라고 할 순 없지만, 이 때는 그 이성계의 후예 조선 왕가가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 시기이므로 당연히 용납될 수 없는 표현이었다. 이 때문에 김택영은 당시 한국 유림에게서 사적(史賊)이라고 불리면서 매장당한다.[13] 성삼문의 시호는 충문(忠文), 신숙주의 시호는 문충(文忠). 시호까지도 정반대다.[14] 이걸 훈민정음 창제와 엮는 경우가 차고 넘치는데, 이 때는 이미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고 1년도 지난 뒤의 이야기다.[15] 조선의 화폐 유통은 시장 경제의 미발달로 인해 태종, 세종대왕은 물론 뒷날의 왕이나 재상들도 번번이 실패했다. 화폐 유통은 뒷날 숙종 때에나 정착된다.[16]세종대왕조차 이 시장의 흐름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무리한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가 피본 적이 있었다.[17] 하지만 남이의 옥사는 신숙주나 한명회가 자신들을 위해 어거지로 죄를 뒤집어 씌어 사형시킨 것이다. 신숙주는 1468년에 남이(南怡)를 숙청한 공으로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에 봉해졌다. 이것을 보면 적어도 그가 인격적으로 본받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다만, 남이 항목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는 남이 본인이 처신을 잘못해서 자초한 점이 훨씬 크다.[18] 이 때문인지 신숙주는 종묘에 '직속 주군'이란 이미지가 강한 세조가 아닌 성종과 함께 배향되어있다.[19] 둘 다 행정능력이 탁월하고 주군의 정권 장악에 큰 공을 세운 브레인이자 명재상이었으며, 자기가 모셨던 주군에게 순종적으로 처신해서 주군의 총애를 받았지만 간혹 사소한 일로 면직된 적이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20] 다만 술 이야기는 조선 후기 통신사들의 사행록에도 왕왕 등장한다. 일본 측이 술을 보내왔는데 향기롭고 맛있었다거나, 무슨 술이 유명하다거나, 어느 마을을 지났는데 맛 좋은 술이 나는 곳으로 전국에 이름이 났다는 등등.[21] 더욱이 이 임산부는 일본에 끌려갔다가 온 여자였다.[22] 실제로 공주의 남자에서 가장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나쁘게 묘사된 인물이 신면이다. 신면과 관련된 장면의 90%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다. 오히려 이시애의 난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악전고투하다가 장렬하게 순국한 진정한 무인이 더 정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