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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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라에서는 인도에서 보기 드문 설경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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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의 여러 저택 (맨션)들

1. 개요[편집]


힌디어 शिमला
영어 Shimla / Simla[~1972]

인도 히마찰프라데시주의 주도이자 최대도시. 찬디가르에서 동북쪽으로 50km, 루디아나에서 동쪽으로 120km, 데라둔에서 서북쪽으로 110km 떨어진 히말라야 산맥 기슭의 능선에 자리한다. 인구는 약 17만명으로 많지 않지만, 선선한 기후 덕에 1864년 인도 제국의 하계 수도로 선포되는 등 휴양 도시로써 찾는 이가 많다. 시내에는 영국령 인도 시절 세워진 영국풍 (신고딕) 별장 건물들이 여럿 남아있고, 겨울철의 눈과 어우러져 인도보다는 알프스에 가까운 풍경을 선사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모로코이프란과 비슷한 성격을 띈다.

고급 휴양지로써 심라에서는 맥마흔 라인이 설정된 1914년 심라 협약, 인도 자치령의 설립 및 인도-파키스탄 분리로 이어진 1945년 심라 회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을 마무리한 1972년 심라 협정 등 여러 정치 모임이 열렸다. 1898-1903년에 걸쳐 세워진 칼카-심라간 철로는 다르질링, 닐기리 철로와 함께 '인도 산악 철도'란 명칭으로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철도 교통과 함께 서쪽 10km 지점의 능선에 심라 공항도 있어 접근이 용이한 편이다. 2005년부터 심라에서는 산악 자전거 대회가 열리고 있는데, 주행 도중 펼쳐지는 절경 덕에 인기가 많다.

2.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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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지배기에 세워진 시청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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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령 인도 시절의 총독궁

18세기까지는 히말라야 지역의 흔한 빽빽한 삼림 지대 중 하나였다. 다만 근대에 들어 힌두교의 자쿠 사원이 들어섰고, 일대는 칼리의 화신인 힌두 여신 쉬야말라 데비의 이름을 따서 '쉼라'로 불리게 되었다. 1806년 (현재는 약 동남쪽으로 300km 떨어진) 네팔의 빔센 타파가 일대를 점령했는데, 영국-네팔 전쟁 (1814-16년) 도중인 1815년 영국군이 인근 말라운 요새를 기습 점령한 후 영국령이 되었다. 고향과 비슷한 심라의 자연환경에 반한[1] 영국인들은 1819년부터 별장을 세우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도로 등 기반 시설이 들어서게 되었다. 심라의 가옥 수는 1830년 30채에서 1881년 1141채로 늘어났다. 1832년에는 인도 총독 윌리엄 벤틴크 경과 시크 왕국의 마하라자 란지트 싱의 사절이 심라에서 회담하였다.

19세기 중반 들어 심라에는 영국인들과 인도 상류층의 사교 클럽이 여럿 생겨났고, 그들에 대한 서비스업 및 상업에 종사하기 위해 북인도 각지에서 이주민이 모여들어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1850-52년 달리 터널이 개통하며 심라에 대한 접근성은 크게 개선되었고, 1857년 세포이 항쟁 당시 유럽인 거주자들은 공포에 사로잡혔으나 별일 없이 지나갔다. 1863년 인도 총독 존 로렌스는 심라를 인도의 하계 수도로 선포하였고, 2년에1번씩 캘커타에서 심라로 행정 조직을 옮겨 거처하였다. 1876년에는 펀잡의 하계 주도를 겸하게 되었다. 영국 당국은 화재를 빌미로 '상부 바자르'의 인도인 거주지를 유럽인들을 위한 신도심으로 개조하였고, 시청과 총독 관저 등이 세워졌다. 한편 인도인들은 '하부 바자르'의 급경사 지대로 밀려났다.

한편 젊은 영국인 관료 및 장교들과 (남편을 임지에 두고 휴가를 온) 사모님들이 모인 심라는 자연스럽게 '간음의 도시'라는 불명예를 안기도 하였다. 상류층의 사교 모임이 잦아지며 심라로 향한 교통편은 더욱 개선되어 1903년 (히말라야 산지가 끝나는) 칼카와 철도로 연결되었다. 100km가 채 안되는 해당 노선에는 무려 806개의 교각과 103개의 터널이 있어 기술 혁신의 상징이자 '오리엔트에서의 영국의 보물'로 알려졌다. 20세기 들어 심라는 중요한 고위급 회담을 여러 차례 개최하여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1906년 심라의 총독 관저에서는 아가칸 3세가 주도하는 무슬림 대표단이 총독 민토 경과 회담하여 무슬림들의 발언권 확대를 요구하였고, 이는 전인도 무슬림 연맹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1913-14년 중화민국 및 티베트의 대표단이 심라에 방문하여 헨리 맥마흔 경이 맥마흔 라인을 국경으로 제안하였다.

1945년에는 인도의 독립을 논의하기 위한 심라 회담이 열렸으나, 결국 무슬림-힌두 대표단 간의 타협이 불발되어 향후 인도-파키스탄 분리로 이어졌다. 한편 태평양 전쟁 당시 심라는 1942-45년간 영국령 버마의 망명 총독부가 체재하기도 하였다. 인도 독립 후 인도령 펀자브의 주도가 임시적으로 심라에 있다가 1953년 칼카 인근에 조성된 계획 도시인 찬디가르로 이전되었다. 1956년 남펀잡 혹은 심라 '언덕 국가들'로 불리던 28개의 서부 히말라야 지역 번왕국들은 히마찰프라데시 연방령으로 편성되었는데, 1966년 심라는 캉그라 및 쿨루 등과 함께 그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971년 심라를 주도로 하여 인도의 18번째 주인 히마찰프라데시 주가 성립되었다. 이듬해 7월에는 파키스탄 대통령 줄피카르 알리 부토와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가 심라에서 회동하여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을 끝내는 강화를 맺었다. 현대에는 비록 정치적 중요성은 거의 사라졌지만, 여전히 인도의 고급 휴양지로 남아있다.

3.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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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4년 영국식으로 세워진 성공회 교회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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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나가르 등과 함께 인도에서 설경을 볼 수 있는 몇 안되는 대도시 중 하나이다. 델리 광역권과도 약 250km 거리로 멀지 않아 지금도 인도인들이 휴양차 즐겨 찾는 도시이다. 인도의 미칠듯한 여름 더위 속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하누만 신상 (스리 하누만 자쿠)은 인도에서 가장 큰 조각상 중 하나로, 2010년에 완공되었으며 높이는 33m에 달한다.

북인도에서 힌두교 비율이 압도적인 곳으로, 무려 93.5%에 달한다. 이슬람, 시크교가 각각 2% 전후를 이루며 불교와 기독교가 각각 1% 전후를 이룬다. 세얼간이 영화에 란초가 있는 곳으로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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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년까지 쓰인 표기[1] 그리고 '힌두스탄의 찌는 듯한 더위'에 실증을 내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