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케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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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케펠
Alice Keppel


파일:앨리스 케펠.jpg

이름
앨리스 프레데리카 케펠[1]
(Alice Frederica Keppel)
출생
1868년 4월 29일
잉글랜드 켄트 울리치[2]
사망
1947년 9월 11일 (향년 79세)
이탈리아 벨로스과르도
배우자
조지 케펠 (1891년 결혼)
자녀
바이올렛, 소니아[3]
아버지
제4대 던트리스 준남작 윌리엄 에드먼스톤 경
어머니
메리 엘리자베스 파슨스
형제
메리, 아치볼드, 제시, 루이자, 샬럿, 프랜시스, 소피아, 수잔나, 메리, 아치볼드

1. 개요
2. 생애
2.1. 로얄 미스트리스
2.2. 죽음
3. 여담



1. 개요[편집]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의 정부. 에드워드 7세의 마지막 정부이며 그의 임종을 지켰다.

영국 찰스 3세의 후처인 카밀라 파커 보울스의 외외증조할머니로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편집]


1868년에 영국 해군 제독이자 정치가인 4대 준남작 윌리엄 에드먼스톤의 11명에 달하는 자녀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애칭은 프레디. 에드먼스톤 가문은 오래된 명문가로 앨리스는 스튜어트 왕조의 직계 후손이다. 앨리스는 어린시절을 에드먼스톤 가문이 소유한 던트리스 성에서 보냈다.

매력적인 여인으로 성장한 앨리스는 사교계 남성들의 이목을 끌었다. 앨리스는 푸른 눈과 가느다란 허리, 큰 가슴을 가진 미인이었다. 또한 재치있고 똑똑했기에 쉽게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살 수 있었다. 1891년에 앨리스는 23살의 나이에 앨버말 백작의 아들이자 군인인 조지 케펠과 결혼했다. 부부는 상류층이지만 물려받을 재산은 없었다. 결혼했을 당시 앨리스에게는 7명의 언니와 1명의 오빠가 있었으며 조지는 장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지가 버는 돈만으로는 결혼 이전의 생활을 유지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이에 앨리스는 집 밖에서 돈 많은 귀족 남자들과 사귀기 시작했다. 앨리스의 애인으로는 그림소프 남작 어니스트 베켓과 알링턴 남작 험프리 스터트 등이 있었는데, 그중 어니스트 베켓은 앨리스의 장녀 바이올렛의 생부로 여겨진다.

아내의 외도에도 조지는 앨리스를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내가 편하게 애인들을 만나게 자리를 비켜주기까지 했다. 조지는 "마지막에 내 곁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아내가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라고 말했다. 이렇게만 보면 지고지순한 애처가 같지만 사실 조지도 애인들을 거느렸다(...). 게다가 앨리스가 애인들에게 받는 원조가 가정을 꾸리는 데 도움이 되었기에 조지의 입장에서 아내의 불륜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다.


2.1. 로얄 미스트리스[편집]


1898년, 29살의 앨리스는 런던 메이페어에 위치한 자택에서 야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앨리스는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이자 왕위계승자인 56세의 웨일스 공 에드워드 7세와 만나게 되었다. 머지않아 앨리스는 웨일스 공의 정부가 되었다. 웨일스 공의 애인이 되면서 앨리스는 경제적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웨일스 공은 자신의 자본가 친구들을 앨리스에게 소개해 주면서 그녀의 재정적 안정을 보장해주었다. 그리고 짭짤한 사업과 앨리스를 연결해줘 앨리스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매년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되었다. 또한 웨일스 공은 앨리스의 남편과 가족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주선해주었다.

웨일스 공은 에드워드 7세로 즉위한 후에도 앨리스와 긴밀한 사이를 유지했다. 앨리스는 말솜씨가 좋고 발이 넓었기에 에드워드 7세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앨리스는 왕의 정부이자 정치 고문으로 궁중에서 상당한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 7세의 본처 덴마크의 알렉산드라는 처음에는 똑똑한 앨리스를 좋아했다. 에드워드 7세에게는 많은 애인이 있었는데, 앨리스 이전에 총애하던 워릭 백작부인 데이지 그레빌이 워낙 경박한 인물이었기에 상대적으로 나아보였던 것이다. 이에 맞게 앨리스는 에드워드 7세가 아내에게 줄 선물을 골라주는 등 처신을 똑바로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앨리스가 에드워드 7세에게 가지는 영향력은 지나치게 커졌다. 에드워드 7세가 앨리스를 아예 자신의 침실로 끌어들이면서 덴마크의 알렉산드라는 가장 큰 연적인 앨리스를 미워하게 되었다.

1900년에 앨리스는 차녀 소니아를 낳았다. 남편 조지는 자신의 딸로 여겼지만 당시에 소니아가 에드워드 7세의 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앨리스는 에드워드 7세의 기분을 맞춰주는 일에 탁월했다. 그리고 도움이 되는 여러 조언을 해주었는데, 건강에 대한 조언만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고 한다. 에드워드 7세는 폭식과 폭연을 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으며 앨리스의 염려에도 생활 습관을 바꾸지 않았다. 결국 1910년 3월에 에드워드 7세는 외교차 프랑스로 가던 중 쓰러지게 되었다. 앨리스는 몸소 에드워드 7세를 간호했다.

1910년 5월 6일에 에드워드 7세는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소식을 접한 앨리스는 궁중의 문을 걷어차다시피 하며 에드워드 7세가 있는 방으로 돌진했다. 덴마크의 알렉산드라는 마지못해 그녀를 들여보냈다. 에드워드 7세의 죽음을 지켜본 앨리스는 무너져 내렸고, 흐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참다못한 덴마크의 알렉산드라는 시종들에게 명령해 울부짖는 앨리스를 끌어냈다.

에드워드 7세가 사망하면서 앨리스는 모든 입지를 상실했다. 왕위를 이은 조지 5세는 선왕의 정부를 꺼려 모든 궁중 행사에서 앨리스를 배제하면서 앨리스와 그녀의 남편은 영국 사교계에서 소외당하게 되었다. 앨리스는 외국과 영국을 오가며 생활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앨리스 부부가 영국에 발 붙일 곳은 사라져갔다. 결국 1925년에 앨리스는 남편과 함께 이탈리아로 아예 이민을 갔다.


2.2. 죽음[편집]


1947년 9월 11일에 앨리스 케펠은 간경화로 사망하였다. 두 달 후 남편 조지 또한 숨을 거두어 부부는 피렌체에 위치한 묘지에 나란히 묻혔다.


3. 여담[편집]


  • 앨리스의 차녀 소니아 케펠의 외손녀가 카밀라 파커 보울스다. 카밀라가 찰스 왕세자를 처음 만났을 때 한 말이 "우리 증조할머니가 당신 고조할아버지의 정부였던 거 알아요?"였다고 한다. 그리고 카밀라는 2022년, 앨리스가 오르지 못했던 왕비 자리에 앉았다.

  • 에드워드 7세의 장손 에드워드 8세가 평민 출신 이혼녀인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기 위해 퇴위한다는 소식을 접한 앨리스는 "나 때는 일이 훨씬 잘 풀렸는데.(Things were done much better in my day.)"라고 했다고 한다. 본인 증손녀는 훨씬 더 잘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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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혼 전 이름은 앨리스 프레데리카 에드먼스톤[2] 현재는 런던 그리니치 소속.[3] 카밀라 왕비의 외할머니이다.